10장 「쉼의 멍에를 메고 따르라 초청하시다」
《주님 없는 복음》 10장을 읽으면서 오래 붙들게 되는 말씀이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참 많이 들었던 말씀이다.
힘들 때 위로를 주는 말씀으로도 들었고, 지친 사람에게 예수님이 건네시는 따뜻한 초청으로도 들었다.
그런데 이번 장을 읽으며 이 말씀이 단순한 위로 이상의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와서 쉬어라”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셨다.
곧이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쉼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멍에를 말씀하신다.
처음에는 이상하다.
쉬게 해주겠다고 하시면서 왜 또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가.
멍에는 보통 무거움의 상징 아닌가.
자유의 반대말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오히려 이 역설 속에 복음의 핵심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자유라는 것을 내가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내 판단으로 선택하고, 내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
내 이성과 경험과 능력으로 삶을 잘 설계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성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살려고 할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질 때가 많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더 생산적이어야 했다.
더 절제해야 했다.
감정을 더 잘 통제해야 했다.
더 지혜로워야 했다.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아버지,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신앙인이 되어야 했다.
삶은 점점 하나의 거대한 자기계발 프로젝트가 되었다.
하루를 잘 살았는지 평가하고,
실패한 부분을 분석하고,
다시 계획하고,
다시 고치고,
또다시 부족함을 발견한다.
은혜 없는 자기계발은 어쩌면 매일 자기 자신에게 제출하는 성적표와 비슷하다.
아무리 높은 점수를 받아도 다음 날이면 시험이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나를 끊임없이 평가한다.
오늘은 잘했나.
어제보다 나아졌나.
왜 이것밖에 못했나.
왜 또 흔들렸나.
왜 아직도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나.
그렇게 스스로를 완성하려 할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지쳐갔다.
이런 나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게로 오라.”
그 말씀은 단순한 초대가 아니다.
내가 내 힘으로 나를 구원하려는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말씀처럼 들린다.
내가 내 인생의 절대적인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바카라임지고 통제하려는 무거운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의 멍에를 메라.”
처음에는 이 표현이 불편하다.
특히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복종과 멍에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내 삶을 내가 결정하고 싶다.
나의 이성으로 판단하고 싶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다.
누군가의 권위 아래 들어간다는 것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신앙의 역설은 그 반대인 것 같다.
내가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을 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잘못된 주인에게서 벗어나 참된 주인에게 속할 때 자유로워진다.
죄의 멍에를 지고,
사람들의 인정이라는 멍에를 지고,
성공해야 한다는 멍에를 지고,
내가 나를 완성해야 한다는 멍에를 지고 살아가면서
나는 내가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멍에를 내려놓고 자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멍에가 쉽고 그 짐이 가볍다고 말씀하신다.
왜일까.
예수님의 멍에는 내가 나를 구원해야 한다는 멍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완벽해져야 사랑받는다는 멍에도 아니다.
내가 충분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멍에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이미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을 의지하는 멍에다.
내가 나를 떠받치는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 나의 무게를 맡기는 삶이다.
그래서 멍에인데 쉼이 된다.
복종인데 자유가 된다.
포기인데 오히려 생명이 된다.
10장에서 맥아더는 이 구원의 초청에 겸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똑똑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고, 지능이 낮아야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지식의 양이 아니다.
문제는 마음의 태도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성경도 알았다.
율법도 알았다.
종교적 경험도 많았다.
그러나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무지함이 아니라 의존성이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안다.
구원도 그런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성인이 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구원의 출발점이다.
나는 스스로 나를 구원할 수 없다.
내 지성도,
내 철학도,
내 경험도,
내 재산도,
내 성취도
나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 수 없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을 참 어려워한다.
나는 도움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내 힘으로 해결하고 싶다.
내가 이해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통제하고 싶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그 자리에 칼을 댄다.
너는 스스로 충분하지 않다.
처음 들으면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는 완전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하나님일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필요도 없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필요도 없다.
나는 피조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 질서가 회복될 때 마음에 쉼이 찾아온다.
이번 장에서 또 중요한 것은 계시다.
인간의 이성은 귀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창조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도 있다.
철학을 통해 인간과 삶을 깊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이성이 스스로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아버지를 아는 이는 아들이며, 아들의 뜻대로 아버지를 나타내 주는 자가 아버지를 안다고.
이 말씀이 나에게는 중요하게 다가온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삶을 분석하고,
철학을 읽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삶의 원리를 찾는 것을 좋아한다.
스토아 철학의 절제도 배울 것이 있고,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질문에서도 많은 생각을 얻는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생각해도 인간의 이성만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구원은 발견이라기보다 계시다.
내가 하나님에게 올라가 알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믿음에는 겸손이 필요하다.
“내가 알아냈습니다.”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라는 고백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계시를 받은 사람에게 회개가 일어난다.
회개는 단순히 죄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중심이었던 방향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자기 의에서 은혜로,
자기 주권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내 힘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로 오라”는 말씀 자체에 회개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내가 있던 자리에서 떠나야 그리스도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죄를 붙들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께로 향할 수는 없다.
자기 의를 끝까지 붙들면서 은혜를 구할 수도 없다.
회개는 완벽하게 깨끗해진 뒤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이상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있다.
회개가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라면 믿음은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이다.
둘은 떼기 어렵다.
내가 죄에서 돌아섰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께 가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반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죄의 방향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그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래서 회개와 믿음은 함께 간다.
하지만 이 역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공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다.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바카라임이 함께 나타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권적으로 이루신다고 말한다.
동시에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내게로 오라.”
고 부르신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을 모순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두 풀어내기 어려운 성경의 깊은 긴장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먼저 역사하신다.
그리고 인간은 실제로 믿고 회개한다.
하나님이 마음을 여신다.
그리고 인간은 실제로 그리스도께 나아간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반응을 없애지 않고,
인간의 반응이 하나님의 은혜를 공로로 만들지도 않는다.
이 균형이 복음의 신비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나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없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아무리 열정적으로 말해도,
내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는 없다.
그 일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아무 바카라임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내게 주어진 바카라임은 분명하다.
복음을 정확하게 전하는 것.
사랑으로 전하는 것.
왜곡하지 않는 것.
결과를 내 힘으로 만들어내려 하지 않는 것.
사람을 회심시키는 바카라임은 하나님께 있지만,
복음을 충실하게 전할 바카라임은 내게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전도에도 쉼이 생긴다.
내가 결과까지 바카라임지려고 할 때 전도는 또 하나의 멍에가 된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 마음은 자유로워진다.
나는 이번 장을 읽으며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특히 내가 내 삶을 주도적으로 통제하려 했던 시간들을 생각한다.
내 계획이 옳다고 믿고,
내 판단을 신뢰하고,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 자신을 만들어가려고 했을 때
겉으로는 단단해지는 것 같았지만 안에서는 오히려 불안이 커질 때가 있었다.
나는 철학적으로 삶을 분석했다.
더 절제하려 했다.
규칙을 만들었다.
생활을 관리했다.
감정을 다스리려고 했다.
더 생산적인 사람이 되려고 했다.
그리고 조금만 계획에서 벗어나도 불편해졌다.
왜 이것밖에 못했을까.
왜 아직도 이런 감정을 느낄까.
왜 나는 더 완전하지 못할까.
나는 나 자신을 고치는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다.
철학도,
자기계발도,
절제도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를 구원하고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또 하나의 멍에가 된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절망도 떠오른다.
그에게 절망은 단순히 슬프거나 우울한 감정만이 아니다.
자아가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잃은 상태와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 말이 이해될 때가 있다.
밤이 되어 모든 역할이 사라질 때가 있다.
일도 끝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잠시 멈추고,
눈을 감으면 결국 나라는 존재 하나만 남는다.
그때 내가 온 우주 가운데 혼자 던져진 존재라고 생각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이상한 두려움이 올라온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어도,
내 존재 자체를 나 혼자 떠받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그러나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를 맡길 때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상황이 즉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마음의 무게가 달라진다.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고백한다.
주님,
저는 피조물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제 힘으로 저를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맡깁니다.
이 고백을 할 때 이상하게 마음에 쉼이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인간이 불완전하게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가 심히 좋았다고 말한다.
인간이 잘못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닌 존재로 만들어졌다.
유한한 존재다.
의존적인 존재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그리고 타락 이후에는 죄까지 더해져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존성은 결함이 아니다.
피조물됨의 본질이다.
나는 이것이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모든 것을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다.
나는 하나님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면 된다.
나는 그분의 자녀이면 된다.
그래서 이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싶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없이 완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감사합니다.
저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유한한 피조물로 지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의 유한함이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는 문이 되게 하소서.
나의 지혜와 능력과 재산과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게 하소서.
그것들을 감사히 사용하되 그것들 위에 나의 구원을 세우지 않게 하소서.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할수록 무거운 멍에를 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리고 오늘도 주님의 초청을 듣게 하소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주님,
오늘도 갑니다.
나의 죄를 들고,
나의 부족함을 들고,
나의 불안을 들고,
나의 통제하려는 욕망까지 들고 주님께 갑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무거운 멍에를 내려놓습니다.
대신 주님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주님께 배우게 하소서.
주님께 복종하게 하소서.
그 복종이 속박이 아니라 자유임을 알게 하시고,
그 의존이 패배가 아니라 평안임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멍에 아래에서 비로소 내 영혼이 쉴 수 있음을 매일 경험하게 하소서.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 할수록 무거워지고,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할수록 가벼워지는 이 복음의 역설을 오늘도 살아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