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씨 뿌리는 비유: 복음을 받는 네 가지 마음」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선포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 말씀은 단순한 종교적 구호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고, 이제 사람들은 그 말씀 앞에서 반응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 대제사장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구약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권위와 기존 질서를 흔드는 존재로 보았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씀하실 때는 신성모독으로 여겼고,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자 점점 더 적대적으로 반응했다.
심지어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을 사탄의 힘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나는 이 장면에서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을 본다.
진리를 가까이에서 본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완고하면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을 수 있다.
성경을 많이 알아도 믿지 않을 수 있다.
종교적으로 열심이어도 믿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정보의 양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
마태복음 13장에 이르러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신다.
비유는 단순히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교육 도구만은 아니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드러내고, 완고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 의미가 가려지는 기능도 있었다.
같은 말을 듣는데 어떤 사람은 더 깊이 깨닫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바로 그 질문에 답하신다.
씨앗은 동일하다.
복음도 동일하다.
그러나 땅이 다르다.
나는 이 비유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복음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다.
씨앗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다.
곧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복음이다.
복음 전도자는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시대에 맞게 설명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표현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씨앗 자체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씨앗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네 종류의 땅을 말씀하신다.
첫 번째는 길가다.
사람들의 발에 계속 밟혀 단단해진 땅이다.
씨앗이 떨어져도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새들이 와서 먹어버린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을 듣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설명하신다.
그 마음은 굳어 있다.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다.
이 사람을 단순히 무신론자나 방탕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겉으로 도덕적이어도 마음은 굳을 수 있다.
교회에 오래 다녀도 마음은 굳을 수 있다.
성경을 많이 알아도 말씀 앞에 자신을 내어놓지 않으면 길가와 같은 마음일 수 있다.
오히려 종교적 자기 확신이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도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작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말씀을 들을 때 정말 듣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생각의 틀 속에서 말씀을 걸러 듣고 있는가.
내 생각과 맞으면 받아들이고, 불편하면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두 번째는 돌밭이다.
이스라엘 지역에는 얕은 흙 아래 바로 암반이 있는 땅이 많았다.
씨앗이 떨어지면 흙이 얕기 때문에 처음에는 빨리 싹이 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히려 반응이 빠르다.
그러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다.
해가 뜨면 금세 말라버린다.
이 마음은 말씀을 처음 들을 때 기쁘게 반응한다.
감동도 있다.
눈물도 있다.
열정도 있다.
교회에 나가고 싶어지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뿌리가 없다.
말씀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고, 신앙 때문에 손해를 보고,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지면 금세 흔들린다.
그리고 결국 떠난다.
여기서 나는 감정 자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복음 앞에서 기뻐하고 감동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감정이 깊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순간의 뜨거움이 믿음의 전부는 아니다.
참된 믿음은 시간이 필요하다.
뿌리를 내리는 시간.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시간.
불편한 진리를 피하지 않고 견디는 시간.
시험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붙드는 시간.
나는 신앙의 깊이가 얼마나 조용하게 자라는지 생각하게 된다.
겉으로는 화려하지 않아도, 땅속에서 뿌리가 깊어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
세 번째는 가시떨기다.
이 땅에는 씨앗이 들어간다.
싹도 난다.
어느 정도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함께 자라는 것이 있다.
가시다.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다른 욕망.
이것들이 점점 자라서 말씀을 눌러버린다.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이 세 번째 땅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말씀을 싫어하지 않는다.
교회도 다닌다.
신앙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음 안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돈.
성공.
직업.
명예.
외모.
건강.
자녀.
사람들의 인정.
안정된 미래.
이것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때다.
건강을 돌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건강을 잃으면 삶의 의미까지 무너질 정도로 그것을 붙든다면 문제가 된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자녀가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우상이 된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을 소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나를 소유하는 것이 문제다.
가시는 처음부터 거대한 나무로 시작하지 않는다.
작은 싹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조금 더 벌고 싶다.
조금 더 인정받고 싶다.
조금 더 편안하고 싶다.
조금 더 안전하고 싶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것들이 내 마음의 공간을 차지한다.
말씀이 숨을 쉬지 못한다.
기도할 마음이 사라진다.
하나님의 뜻보다 세상의 기준이 더 크게 들린다.
그때 나는 이미 가시가 너무 많이 자란 밭이 된 것은 아닐까.
마지막은 좋은 땅이다.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깨닫고, 결국 열매를 맺는다.
어떤 사람은 삼십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백 배.
여기서 나는 위로를 받는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성장 속도도 다르다.
은사도 다르다.
환경도 다르다.
사명도 다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열매와 내 열매를 비교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열매인가가 아니라 열매가 있는가이다.
참된 생명이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열매가 나타난다.
사랑이 자란다.
죄에 대한 민감함이 생긴다.
회개가 깊어진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돈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용서하는 힘이 생긴다.
인내가 자란다.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시간이 많아진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때로는 후퇴한다.
넘어진다.
죄를 짓는다.
그러나 방향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열매가 보인다.
이것이 맥아더가 강조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열매가 구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참된 구원은 결국 열매를 만든다.
열매를 달아야 살아 있는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삶에 아무 열매도 없는데 과거의 한 번의 결단만으로
“나는 구원받았다.”
라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이 불편하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과거의 한 순간을 붙들고 싶어 한다.
언제 영접 기도를 했다.
언제 세례를 받았다.
언제 교회에 등록했다.
언제 감동적인 경험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현재의 땅을 보게 하신다.
지금 내 마음은 어떤 땅인가.
나는 과거에 어떤 땅이었는가보다 지금 어떤 땅인지가 중요하다.
지금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지금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지금 가시를 뽑고 있는가.
지금 열매를 맺고 있는가.
이 질문은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동시에 은혜를 구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좋은 땅이 되는 것조차 내 힘만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마음의 굳은 부분을 스스로 다 알지 못한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돌을 다 발견하지 못한다.
가시가 얼마나 자랐는지도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갈아엎어 주셔야 한다.
말씀으로 굳은 땅을 깨뜨려 주셔야 한다.
성령께서 돌을 드러내 주셔야 한다.
세상의 염려와 욕망이라는 가시를 뽑아 주셔야 한다.
나는 씨앗을 바꿀 수 없다.
복음을 더 매력적인 것으로 새로 만들 수도 없다.
해야 할 일은 오히려 반대다.
주어진 말씀을 그대로 받고,
그 말씀 앞에서 내 마음을 정직하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묻게 된다.
나는 길가인가.
말씀을 듣지만 아무 변화가 없는가.
나는 돌밭인가.
감정은 뜨겁지만 뿌리가 얕은가.
나는 가시밭인가.
예수님도 원하고 세상도 놓지 못한 채 두 주인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좋은 땅인가.
말씀을 듣고,
깨닫고,
붙들고,
시간이 지나며 열매를 맺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쉽게
“나는 좋은 땅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주님,
제 마음을 살펴주소서.
딱딱하게 굳어진 부분이 있다면 깨뜨려 주소서.
감정만 뜨겁고 뿌리가 없는 곳이 있다면 말씀 안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소서.
제 마음을 뒤덮고 있는 가시가 무엇인지 보여주소서.
세상의 염려와 돈과 인정과 욕망이 말씀을 질식시키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좋은 땅이 되게 하소서.
많은 열매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참된 생명이 있음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삼십 배이든,
육십 배이든,
백 배이든,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 다시 깨닫는다.
복음의 씨앗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씨앗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내 마음의 밭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싶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내 삶을 돌아보았을 때,
말씀을 많이 들었다는 흔적만 남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이 실제 삶에서 열매가 된 사람으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