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자에게 먼저 찾아오신 주님

4장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을 제시하시다」를 읽으며

by신아르케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너무도 다른 사람이다.

한 사람은 남자였고, 다른 사람은 여자였다. 한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다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한 사람은 종교 지도자였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종교적 지식도 슬롯적 지위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자리에 있었다.

니고데모는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의 삶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함께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이 필요했다.

니고데모의 종교적 성취도 그를 구원할 수 없었고, 사마리아 여인의 깨어진 삶도 스스로 고칠 수 없었다.

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가 장벽이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죄와 상처로 뒤엉킨 삶이 장벽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필요한 구원자는 한 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나는 이 사실이 참 중요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사람을 너무 쉽게 분류한다.

저 사람은 신앙에 가까운 사람,
저 사람은 신앙에서 너무 멀리 있는 사람.

저 사람은 착한 사람,
저 사람은 문제가 많은 사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구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니고데모에게도 거듭남이 필요했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생수가 필요했다.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구원이 필요하고, 바닥까지 내려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구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기다리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지나가셨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깊은 역사적·종교적 갈등이 있었다. 많은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멀리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경계를 넘어가셨다.

요한은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했다고 기록한다.

맥아더는 이 장면을 단순한 지리적 이동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준비된 만남으로 바라본다.

그날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평범한 하루였을 것이다.

물을 길으러 우물에 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분을 만나게 된다.

그녀에게는 그날이 구원의 때였다.

이 장면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신비로운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물을 길으러 갔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미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나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뒤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계셨던 순간들.

예수님은 여행으로 피곤하셨고 목이 마르셨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의 참된 인성이 드러난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피로를 느끼셨고 목마름도 느끼셨다.

그런데 동시에 그분은 처음 만난 여인의 삶을 알고 계셨다.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고 계셨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한 장면 안에서 묘하게 교차한다.

목마른 한 인간으로 우물가에 앉아 계시면서도, 한 여인의 영혼 깊은 곳을 알고 계시는 분.

그리고 그분이 먼저 말을 거신다.

“물을 좀 달라.”

여인은 놀랐을 것이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평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민족과 성별과 신분의 벽보다 한 영혼을 먼저 보셨다.

그리고 대화는 물에서 시작해 생수로 옮겨간다.

예수님은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그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인은 처음에는 그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

“그 물을 제게 주세요.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까지 물을 길으러 오지도 않겠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우물물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갈증은 더 깊은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욕망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마시며 산다.

돈이라는 물을 마시고,
성공이라는 물을 마시고,
사람들의 인정이라는 물을 마시고,
사랑이라는 물을 마시고,
쾌락과 편안함이라는 물을 마신다.

그것들은 어느 정도 우리의 갈증을 달래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목이 마르다.

조금 더 필요하다.

조금 더 인정받고 싶다.

조금 더 가지고 싶다.

조금 더 사랑받고 싶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마실수록 갈증이 깊어질 때도 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깊은 갈증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인이 생수를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왜 갑자기 남편 이야기인가.

나는 이 장면이 《주님 없는 복음》 전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생수를 값없이 주겠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녀의 죄를 모른 척하지 않으셨다.

구원이 은혜라고 해서 죄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은혜는 죄를 덮어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죄에서 건져내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다.

예수님은 그녀의 말을 인정하시면서, 그녀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함께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그녀에게 얼마나 아팠을까.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모욕하기 위해 그 사실을 꺼내신 것이 아니다.

의사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상처를 열어보듯, 예수님은 그녀가 외면하고 싶었던 삶의 문제를 드러내셨다.

구원은 죄를 이야기하지 않고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균형을 놓쳐서는 안 된다.

회개는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께 내는 비용이 아니다.

“내가 이만큼 후회했으니 이제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라는 거래가 아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다.

다만 참된 믿음은 자신이 붙들고 있는 죄와 아무런 갈등 없이 공존하려 하지 않는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드러난다.

생명이 들어오면 죽음의 냄새를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회개는 구원의 가격이라기보다 새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흔적에 가깝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도 그의 가장 깊은 부분을 건드리셨다.

니고데모에게는 자기 의였다.

평생 율법을 공부하고 종교생활을 해 온 사람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깨어진 관계와 죄의 문제를 건드리셨다.

두 사람에게 같은 문장을 반복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내게는 매우 인상적이다.

복음은 하나지만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획일적이지 않았다.

의사는 모든 환자에게 같은 처방전을 주지 않는다.

환자의 병을 먼저 본다.

한 사람에게 필요한 치료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치료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사람의 중심을 보셨다.

그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 무엇이 그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지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는 종교적 자부심을 무너뜨리는 말씀을 하셨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삶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셨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전도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전도에는 복음의 내용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죄와 은혜, 십자가와 부활, 믿음과 회개라는 복음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말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죄바카라감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만 이야기하기 전에 자기 의가 무너져야 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성공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사람의 인정에 매여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상처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전도하기 전에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주님, 이 사람에게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보다 먼저 이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의지하여 지혜롭게 말해야 할 것이다.

대화는 곧 예배 이야기로 옮겨간다.

여인은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하는지 묻는다.

사마리아인은 그리심산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예배 중심지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소보다 더 깊은 문제를 말씀하신다.

참된 예배자는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예배하느냐보다 누구를 어떻게 예배하느냐가 중요하다.

이 말씀도 내게는 상당히 도전적이다.

우리 역시 예배의 형식과 장소와 방식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어떤 음악을 사용하는가.

어떤 분위기인가.

어떤 예배 순서를 사용하는가.

어디에서 모이는가.

물론 이런 것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훨씬 본질적이다.

“너는 누구를 예배하고 있는가.”

그리고

“진리 안에서 그분을 예배하고 있는가.”

여인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예수님은 그녀가 찾던 구원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밝히신다.

그리고 여기서 여인의 삶에 변화가 나타난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간다.

물동이를 내던졌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놓아두고 급히 사람들에게 간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와서 보라.”

자신의 삶을 알고 계신 그분을 만나보라고 한다.

나는 이 변화가 아름답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과거조차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이야기가 된다.

“그분은 나를 알고 계셨다.”

죄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죄를 감추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의 증언을 듣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시 《주님 없는 복음》의 중요한 주제가 나타난다.

참된 믿음은 흔적을 남긴다.

행동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삶에 변화가 생긴다.

살아 있는 나무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완벽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모든 신학을 이해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삶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물물을 가지러 왔던 사람이 생수를 발견했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을 사람이 이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며,

자기 삶의 이야기를 숨겼던 사람이 그것을 복음의 증언으로 사용한다.

이것이 은혜가 사람에게 들어왔을 때 일어나는 변화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의로운 사람만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자의 필요성을 느끼기 어렵다.

주님은 죄인을 찾아오셨다.

그러나 여기서 ‘죄인’은 특별히 나쁜 사람 몇 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니고데모도 죄인이었고 사마리아 여인도 죄인이었다.

한 사람의 죄는 종교적인 옷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의 죄는 삶의 상처와 관계 속에 드러나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나 자신을 본다.

어떤 날의 나는 니고데모처럼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날의 나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내 실패와 욕망과 상처를 감추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필요한 분은 같다.

그리스도.

그분은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오신다.

그러나 나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두지는 않으신다.

내가 붙들고 있는 자기 의를 드러내시고,

내가 감추고 있는 죄를 드러내시며,

내가 마시고 있는 물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생수를 주겠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진다.

그러나 값싼 것은 아니다.

그 생수를 마신 사람은 이전과 똑같은 방향으로 영원히 걸어갈 수 없다.

완벽해서가 아니다.

새 생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물가에 서서 다시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으로 목마름을 채우려고 하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내 삶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실 때, 나는 그것을 피할 것인가.

아니면 그분 앞에 내려놓을 것인가.

그리고 조용히 기도한다.

주님,
제가 계속 다시 목마를 물만 찾아다니지 않게 하소서.
제가 숨기고 싶은 곳까지 주님의 빛이 들어오게 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며
저 또한 누군가에게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