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살아나고 있는 도시와 시들어가는 사람

신들은 약속을 지켰다

by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사람들이 북적이는 트루아벨의 거리 ⓒ Mabon / AI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트루아벨의 거리는 활기를 찾고 있었다.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리는 거리와 골목에는 노점에서 파는 사과 조림과 계피와 정향 냄새가 감돌았다. 행인들은 장갑 낀 손으로 뜨거운 사과차와 끓인 포도주를 호호 불며 마시고는 다시 분주히 갈 길을 갔다. 다시 영업을 시작한 식당과 술집에서는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가게 앞에는 ‘스튜 있음’, ‘영업합니다’와 같은 손으로 쓴 푯말들이 내걸려 있었다.


트루아벨을 떠났던 상인들과 피난민들도 마차와 수레를 끌고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도시가 무사한 것을 보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북쪽에서 트루아벨로 피난을 왔던 사람들도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향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불안해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주택가 골목에는 털모자를 쓰고 장갑을 낀 아이들이 복숭아처럼 빨갛게 된 얼굴로 입김을 뿜으며 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지저귀는 것 같은 맑은 웃음소리가 흐린 겨울 하늘 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발렌도르 대공저에는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대공저 안쪽의 깊숙한 곳에 마련된 천장이 높은 방에는 벽난로의 불이 은은하게 타오르며 짙은 자주색 벨벳 커튼이 달린 캐노피 침대에 누운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두꺼운 커튼이 반쯤 드리워진 크지 않은 창문으로 회색의 겨울 하늘이 비스듬히 내다보였다. 세라비는 환기를 시키려고 잠시 창을 열었다. 멀리서 재잘재잘 까르륵 하는 아이들의 새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도시는 살아나고 있었다. 바람이 차서 세라비는 창문을 도로 닫고 게로스를 돌아보며 이 도시처럼 이 사람도 다시 살아나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세라비는 침대 옆의 등받이와 팔걸이가 달린 의자에 앉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방 안에 들리는 소리는 타닥타닥 불꽃 소리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신들이 사라진 후, 사람들은 게로스에게 달려갔다. 그는 살아 있었다. 몸에 상처도 없고 피도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의식은 없었다. 오귀스트 대공은 트루아벨에 사람을 보내 의사를 데리고 왔지만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차도가 없자, 대공은 코린과 의논하여 게로스를 트루아벨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신전은 너무 외딴 곳이었고 더 많은 의사를 부르고 약을 대기 위해서는 트루아벨이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는 그래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게로스를 옮기는 것을 도왔다. 그들은 게로스를 눕혔던 신전의 침상 째로 그를 들어 올려 절벽 아래로 옮긴 다음 마차에 태워 아주 느린 속도로 트루아벨로 이송했다.


게로스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세라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게로스가 겨울을 맞은 나무가 잎을 다 떨어뜨리고 말라가듯이 시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구겨지듯 일그러져 갔다. 대공은 비밀을 지켜 줄 대공저의 주치의만 남겨놓고 더 이상 의사를 오지 못하도록 했다. 어차피 어느 의사가 와도 그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게로스가 누워 있는 방에는 사용인들조차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왕의 마지막 모습이 밖에 알려지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방 청소와 침상 정돈 등도 대공비가 직접 했다.


레이는 게로스에게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는 게로스의 변한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이 그에 대한 예우라고 여겼다. 그는 신들에게 맞서던 위엄 있는 왕의 모습으로 그를 기억하고 싶었다.


플로르는 방 입구까지 가서 게로스가 누워 있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고는 무릎을 꿇고 한참 동안 있다가 돌아갔다. 플로르는 게로스의 사랑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신 플로르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밀어냈던 그 손길을 플로르는 영원히 기억할 참이었다.


젊음을 바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플로르는 몰랐으나, 대공이 게로스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그는 수일 내로 죽을 것이다. 아니면 늙어 시들어버린 채로 그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산 채 누워있을 수도 있었다. 그것을 산 것이라고 표현한다면 말이다.


그는 게로스를 보러 가지 않았다. 대공이 ‘알아보기 어려우실 겁니다’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많이 변하고 있음을 플로르는 직감했다. 그는 앞으로도 게로스를 보러 가지 않기로 했다. 플로르는 게로스를 여전히 7년 전 대관식장의 계단을 오르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스무 살의 청년 왕으로 기억할 생각이었다.


플로르는 그 방을 다시 찾지 않았지만, 자신이 전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을 담아 편지를 남겼다. 그는 언젠가 게로스가 다시 눈을 떠서 그 편지를 읽게 되리라고 믿었다.


곧이어 이카리아 국왕의 이름으로 보낸 사절단이 도착했다. 레이첵이 세르비카 경에게 현재 상황과 위치를 알리는 편지를 보내 놓았던 것이다.


이카리아 사절단은 놀랍게도 세르비카 경이 직접 이끌고 있었다. 그는 플로르 왕자가 무사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했다. 그리고는 레이첵의 등짝을 갈기며 다음부터는 허락받고 가라고 혼을 냈다.


세라비는 대공저의 응접실에서 삼촌을 맞이했다. 삼촌이 라를르로 찾아와서 칼베르로 가라고 했던 그날이 마치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아마 세르비카 경도 세라비를 보낼 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세르비카 경은 세라비를 보고 짧게 한 마디 했다.


“잘했구나.”


세라비가 기억하는 한 이것은 삼촌에게 처음으로 듣는 칭찬이었다.


이카리아 사절단이 떠나기 전날, 레이첵은 게로스가 누워 있는 방 앞으로 가서 조용히 세라비를 불렀다.


“누나, 이제 집으로 가요…”


방 안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레이첵은 기다렸다. 한참 후에 세라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먼저 가.”


다음날 세르비카 경은 플로르 왕자와 레이첵을 데리고 이카리아로 돌아갔다.


며칠 후 클로드 에티엔이 트루아벨에 도착했다. 그는 게로스의 얼굴을 보지 않고 그가 누운 침대 발치까지만 다가와 무릎을 꿇고 한참 동안 흐느꼈다. 그리고 세라비의 손을 잡고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한 다음 방을 나갔다.


파렌베르크에서는 미니스트렐이 다시 문을 열고, 피난 갔던 사람들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도시는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조금씩 복구되고 있었다. 클로드 에티엔은 코린을 데리고 파렌베르크로 돌아가기 전에 그쪽 상황을 알려 주고는, 이어서 또 다른 놀라운 소식도 전해주었다.


스칼하븐에서 지원군을 왜 보내지 않았는지 몰랐던 사람들은 이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게 되었다. 라그나 공주는 칼베르에 오는 길에, 본국에서 에르다 여왕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토르켈 대공의 쿠데타 소식을 듣고 급히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라그나가 승리했는지, 토르켈이 승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토르켈 대공을 따르는 세력과 정통 왕위 계승자인 라그나를 따르는 세력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파렌베르크까지 다 점령해 놓고 오스틴이 왜 갑자기 돌아가 버렸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오스틴에 아직 남아 있던 첩자들이 서둘러 칼베르로 귀국하면서 오스틴 내부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알게 되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과 전쟁 지원에 지친 지방 영주들이 한꺼번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반란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레지널드 왕은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한꺼번에 다 막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레지널드 왕은 에이번홀트를 버리고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반란군은 에이번홀트의 왕궁을 점거하고, 도망친 레지널드 왕과 사만다 공주를 잡아 처형했다. 레이첼과 스테이시와 헤일리 공주는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자신들의 영지에 숨었다.


이제 오스틴 소식은 당분간 들을 수 없을 거라고 클로드 에티엔은 말했다. 그것이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스칼하븐은 운이 좋다면 그보다는 빨리 새로운 왕으로부터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그러나 오스틴은 끝없는 내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거기서도 누군가가 신들을 불러내지 않는 한, 그것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신들은 약속을 지켰다. 모든 것이 게로스가 원한 대로 되었다. 칼베르와 이카리아에는 다시 평화가 돌아왔다.

병상에 누운 게로스 곁을 지키며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세라비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이전 21화81. 신들의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