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신들의 바람

게로스! 내가 가고 있어…! 내가 당신을 구하겠어!

by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짙은 푸른색의 바다 위를 가르는 스칼하븐의 함선 ‘송곳 물결’ 호는 은빛 비늘을 가진 것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스칼하븐의 국기처럼 진청 바탕에 파도를 뚫고 나오는 은색 청상아리 문양이 그려진 돛에는 왕실 기함의 상징인 붉은 띠가 둘러져 있었다.


뱃머리에 달린 금속으로 된 청상아리의 입은 닫혀 있었지만 붉은 눈은 칼베르를 향하고 있었다. 뱃머리에 선 여자의 눈도 청상아리의 눈과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흑은색의 망토를 입고 창백한 블론드의 풍성한 머리칼을 스칼하븐 식으로 땋아 올린 그녀는 바다 바람을 맞으며 뱃머리에 서서 새벽녘의 어두운 수평선에 떠오르기 시작한 포르 칼레즈의 절벽과 높은 솟아오른 등대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망토에 달린 올리브 잎을 새긴 브로치를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다른 손으로는 망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석이 박힌 펜을 더듬어 보았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부르짖고 있었다.

‘게로스! 내가 가고 있어…! 내가 당신을 구하겠어!’


그녀가 부르짖는 사람의 나라는 지금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녀는 7년 전 자신을 때려눕힌 오스틴의 공주들을 떠올렸다. 테사, 그래, 이번에도 너일 줄 알았다. 남자 따위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군복을 입고 서서 남들이 안 볼 때 게로스를 가장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걸 내가 몰랐을까 봐?


마음대로 안 되니까 칼베르를 무력으로 정복해서 게로스를 무릎 꿇리려는 게지. 하지만 네 뜻대로는 절대 되지 않을 거다. 내가 가고 있으니까. 네 목을 잘라 파렌베르크 성벽에 내걸고, 투구와 검은 녹여서 닻쇠로 쓸 가치도 없으니 바닷속에 처넣어 주겠다.


“비겁한 오스틴 놈들! 블리 하이맛! 말라 카스타!”


그녀는 스칼하븐 전통어로 알고 있는 욕을 죄다 퍼부었다. 곁에 서 있던 마들리엔 달벡은 긴 한숨을 쉬었다. 단발머리에 초록색 눈을 한 공주의 수석 전략관 마들리엔은 학창 시절부터 라그나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미친 짓을 한두 번 보아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미친 짓은 무려 7년이나, 시들해지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더욱더 불타오르며 지속되었다.


‘10년 채우나 했더니… 그나마 아스트리드 대사가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바람에 이 짓도 곧 끝나게 생겼네.’


라그나 공주가 국혼 수락 문서와 브로치와 펜을 받아 들고 기뻐 소리치고 날뛰던 모습을 떠올리며 마들리엔은 다시 한번 긴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대관식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라그나가 대체 게로스의 무엇을 보고 7년째 저 꼴을 하고 있는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잘 생긴 남자 따위야 스칼하븐의 7천 개 섬을 뒤지다 보면 아무리 적어도 열댓 명은 나오지 않겠는가? 그녀가 스칼하븐의 여왕이 되면 국서가 되겠다고 몰려들 남자들 중에 그만큼 생긴 사람 찾는 게 과연 그렇게 어려울까?


마들리엔은 전쟁이 시작된 지 일 년쯤 지났을 무렵 라그나가 좀 진정된 틈을 타서 넌지시 그 얘기를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라그나는 코웃음 쳤다.


“다른 사람은 안 돼. 게로스 같은 사람은 없어.”


마들리엔은 라그나가 혹시 에르다 여왕처럼 칼베르를 집어삼키려고 그 나라 왕을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것인가도 의심해 보았다. 그러나 라그나는 그저 게로스만을 원했다. 정확히 말하면 게로스 왕의 왕비가 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지금도 뱃머리에 서서 바람을 타고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모든 사람들이 듣든지 말든지 외치고 있었다.


“게로스, 내가 간다! 당신과 내가 힘을 합쳐 오스틴을 몰아내고 함께 스칼하븐과 칼베르를 다스리는 거야!”


에르다 여왕도 역시 라그나의 어머니였다. 여왕은 칼베르를 ‘우리 민족이 건너가 세운 스칼하븐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모녀의 광기와 미친 짓은 4년째 온 나라의 자원을 전쟁에 갈아 넣으며 소용돌이치는 해류처럼 모든 것을 끌어들이며 삼키고 있었다. 마들리엔은 새벽의 강한 바람에 펄럭이는 라그나의 망토 자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곧 칼베르에 도착하니, 대체 어떻게 생긴 인간이길래 전하가 저 지경인지 나도 알게 되겠군.’


그러나 마들리엔의 기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포르 칼레즈가 가까워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남풍이 마치 그들을 밀어내듯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계절에, 그리고 바람이 잔잔한 새벽에, 이렇게 강한 남풍이 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송곳 물결’ 호와 그를 따르는 함대는 앞으로 나아가려 애썼지만, 돛은 북쪽을 향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고 키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라그나의 곁으로 함대의 ‘바람 사제’가 다가왔다. 모든 국민이 걸음마를 떼자마자 배를 타는 스칼하븐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동서남북 모든 방향의 바람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다.


“이것은 신들의 바람입니다.” 사제가 말했다. “남풍의 신 쉬드르께서 저희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라그나가 말했다. “다 왔는데 왜 여기서!”


이제 바람은 함선의 돛은 물론이고 돛대마저 휘어지게 할 정도로 강하게 불고 있었다. 그들이 포르 칼레즈로 다가가려고 하면 할수록 바람은 더 거칠어졌다. 배가 높은 파도에 위아래로 요동치며 갑판 위에 있던 기물들이 차례로 날아갔다. 사람들은 뭔가를 붙들지 않으면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라그나 공주도 청상아리 조각 옆의 난간을 붙들고 겨우 서 있었다.


“저곳을 보십시오. 신들입니다.” 사제가 먼 수평선 어딘가를 가리켰다.


동이 터 오는 새벽하늘 먼 끝자락에 무언가 밝은 것이 빛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저 남쪽 하늘이 좀 밝아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으나, 스칼하븐 사람들은 눈이 좋았다. 라그나의 눈에도 막대기 같은 빛의 선이 하늘과 땅 사이에 걸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라그나는 하는 수 없이 배를 돌려 그들이 지나 온 브뤼게트 섬으로 향했다. 함대는 바람을 등에 받으며 파도 위를 날아가듯이 달려 칼베르에 가장 가까운 스칼하븐 영토인 브뤼게트 섬에 도착했다.


브뤼게트 섬의 파도는 잔잔하고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방금 포르 칼레즈 앞바다에서 미친 듯이 불던 바람이 마치 거짓말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가 여기에서 발이 묶여 있는 동안, 게로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라그나는 한탄했다. “대체 남풍이 이 계절에 왜 불어!”


포르 칼레즈 대신 혹시 몰라 더 서쪽의 포르앙블루 쪽에 보내 두었던 배 두 척도 견디지 못하고 다음날 브뤼게트로 돌아왔다. 포르앙블루도 사정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들은 포르앙블루로 가며 작은 항구에서 어촌과 모래 해변까지 모두 상륙을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같았다. 그들은 칼베르에 다가갈 수 없었다. 무언가가 그들을 막고 있는 것처럼.


함대는 브뤼게트 섬에 정박한 채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라그나가 아무리 신경질을 부리며 하늘에 대고 저주를 퍼부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북쪽 수평선에 청상아리 돛을 단 배가 한 척 나타났다. 본국에서 온 전령선이었다.


전령선은 브뤼게트 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기함으로 다가왔다. 전령선 뱃머리에서 긴급의 표시로 붉은 깃발을 흔드는 자는 라그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브리엘가르트의 늙은 왕실 내무관 에이나르 스빈손이었다.


에이나르는 급히 라그나의 배에 올라 라그나 앞에 엎드렸다. 그는 원통한 듯 흐느끼고 있었다.


“전하!” 노인은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라그나는 깊이 탄식하며 고개를 숙였다. 라그나가 떠나오기 전에도 에르다 여왕은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그러나 약을 쓰면 금방 회복되곤 해서 라그나도 크게 걱정하지 않고 출발했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왜 하필이면 지금이란 말인가, 하고 라그나는 슬픔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에이나르는 더욱 크게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라그나는 그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해 보라!”


“전하…! 대공께서…!”


“대공? 토르켈 말인가?”


스비알란드 대공 토르켈은 에르다 여왕의 남동생이었다. 그는 라그나를 싫어해서 그녀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라그나 공주는 저 자를 미리 없애야 한다고 여러 번 어머니에게 말했으나, 에르다 여왕은 ‘그래도 내 동생이니 나쁜 뜻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다’라며 넘어가곤 했다.


라그나는 에이나르의 입에서 토르켈의 이름이 나오자 불안에 휩싸여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공께서… 스스로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라그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라그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얼어붙었다.


마들리엔도 역시 충격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토르켈이 왕위를 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여왕이 죽자마자 바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브리엘가르트에 그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상당히 많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폐하께서 승하하신 것도 혹시 대공의 짓인가?” 마들리엔이 물었다.


“그것은 아닙니다.” 에이나르가 대답했다. “폐하의 곁은 항상 의사들과 제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평안히 잠드셨습니다… 그런데, 토르켈 그 자가…!”


라그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토르켈 숙부, 그 자를 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어머니에게 그렇게 여러 번 말했건만,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라그나는 지금 국혼의 조건을 지키기 위해 칼베르로 가는 길이었지만, 왕위를 빼앗긴 채 그냥 칼베르로 갈 수도 없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영원히 토르켈의 것이 될 것이었다. 비겁하게 여왕이 죽고 왕위 계승자인 공주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 자리를 채어간 숙부가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돌아가면… 게로스는!”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간신히 방어하고 있을 게로스를 생각하며 그녀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오스틴의 전력은 반 이상이 다 칼베르로 갔으니, 어쭙잖게 함대의 일부만 칼베르에 남겨놓고 라그나가 브리엘가르트로 돌아간다면 그 후에 일어날 일은 스칼하븐과 칼베르의 공동 패배뿐이었다. 토르켈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람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라그나는 이미 칼베르에 상륙해서 오스틴과 싸우고 있었을 테니 소식을 듣고도 금방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왕위를 채간 것임에 분명했다.


라그나는 원통함을 못 이기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그 자리에 엎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7년을 기다려서 게로스의 신부 자리를 얻어냈다. 그런데 지금 그 자리를 코앞에 두고 브리엘가르트로 돌아가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게로스를 두고 돌아갈 수는 없어, 내가 떠나면 그는 오스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죽을 텐데…! 대체 얼마나 남겨놔야 숙부의 반란도 진압하고 칼베르의 오스틴도 물리친단 말인가?


라그나가 머릿속으로 함대를 분리할 계획을 짜고 있는 동안, 마들리엔은 또 한 사람의 급한 손님을 맞이했다. 포르 칼레즈 앞바다에 바람이 좀 잦아드는지 보라고 보내 놓았던 배가 급히 브뤼게트로 돌아왔던 것이다.


배에서 내린 장교는 숨을 헐떡이며 급하게 기함에 승선했다. 이번엔 또 뭐지, 하고 마들리엔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공주와 그 앞에 엎드려 역시 통곡 중인 에이나르에게 달려와 외쳤다.


“오스틴 함대가 철수 중입니다!”


라그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들리엔이 급히 물었다.


“모두 다? 아니면 일부만 돌아가는 건가?”


“모두입니다.”


“어떻게 알지?”


“포르 칼레즈 등대에 칼베르 국기가 다시 걸렸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있을까, 하고 마들리엔은 생각했다. 오스틴이 철수하니, 스칼하븐의 지원은 이젠 필요 없게 되었다. 칼베르가 겨우 며칠 만에 자력으로 오스틴을 다 몰아내는 것이 가능한가? 혹시 루스카의 아직 전쟁에 나서지 않은 부족과 계약을 했나? 그러나 아무리 루스카의 용병들이 뛰어들었다 하더라도 오스틴이 이렇게 갑자기 한꺼번에 퇴각할 리는 없었다. 칼베르 내부에서, 혹은 오스틴 진영에서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새벽의 하늘에 나타난 빛과, 갑자기 계절에도 맞지 않는 강한 남풍, 오스틴의 갑작스러운 철수. 마들리엔은 혼란스러운 머리로 생각했다. 이것들이 모두 우연일까?


라그나는 몸을 일으켰다. 칼베르는 이제 라그나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왕위는 토르켈이 가져갔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명확했다.


“그 자가 잊고 있는 것이 있군.” 라그나는 분노로 떨며 말했다. “모든 함대가 아직 내 손에 있는데, 그 자리에 얼마나 앉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마들리엔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원래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어, 하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라그나에게 말했다.


서쪽 수평선에 오스틴의 함대가 줄을 지어 떠나가는 것이 이제는 브뤼게트 섬에서도 보였다. 라그나는 포르 칼레즈 쪽을 바라보며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국혼의 조건을 어겼으므로 게로스와의 결혼도 파기될 것이다. 애초에 스칼하븐의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자신과의 국혼을 수락한 것이니 이제 그것이 필요 없어진 지금에 와서 그가 라그나에게 다시 결혼하자고 할 리도 없었다. 자신을 좋아해서 수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상관없었다. 그만 가질 수 있다면, 그게 정략이든 거래든 뭐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손에 닿기 직전이었는데…!


그녀는 두 주먹을 쥐었다. 양손에는 브로치와 펜이 쥐어져 있었다. 나중에 아스트리드를 통해 칼베르에 돌려보내야 할, 잠시 동안 그녀의 물건이었던 것들이었다.


“토르켈은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반역자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도록 하지.”

청상아리 선수상(船首像)과 뱃머리에 서있는 라그나 공주의 모습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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