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나를 믿지 못하는 너

플레베르 신전 (1)

by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동 틀 무렵, 자고 있는 게로스에게 레이가 찾아와서 자기가 먼저 트루아벨로 가서 플로르 왕자를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지금 다 같이 트루아벨로 가는 중인데 뭐 하러 그렇게 하십니까? 괜히 왕복으로 움직이느라 힘드실 텐데요.”


“다음 마을인 로멜리에 플레베르 신전이 있습니다. 도심인 트루아벨보다는 거기가 신들의 유물을 깨우기에 더 좋지 않을까요?”


“신들이 도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혼란에 빠질까 봐서 그러는 거라면 타당한 생각이긴 합니다.” 레이가 신들이 트루아벨에 나타나는 것을 마치 도심에 괴물이나 멧돼지가 나타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게로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다음 마을에 플레베르 신전이 있는 것은 저조차도 잊고 있었는데, 대사님은 잘도 아시네요.”


“제 스승님이 칼베르 사람이라는 것을 잊으셨군요.” 레이가 말했다.


게로스도 로멜리 쉬르쿠젤에 플레베르 신전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곳은 칼베르 안에 있는 플레베르 신전들 중에서도 꽤 큰 곳이었다. 강가에 있고 경치도 좋아서 게로스도 어릴 때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그가 그곳에서 아버지의 저주를 기록한 사제의 노트를 찾은 후로는 다시 가지 않았지만.


게로스는 그런 기억 때문에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경로상 더 적당한 곳이 없었으므로 동의했다. 레이는 호위대의 병사 한 명과 함께 즉시 트루아벨로 출발했다. 게로스는 급히 말에 올라 달려가는 레이의 뒷모습을 보고, 그가 자신에게 시간을 더 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임을 깨달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말 위에서 이동하며 보내는 대신 잠깐일지라도 호젓한 곳에서 휴식이라도 취하기를 바라는 것일 것이다.


출발하기 전, 레이는 게로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이럴 때는 무조건 사과부터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레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들었다. 세라비가 아직도 그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로스 플레베르 신전.png게로스가 신전 앞 절벽에서 쿠젤 강과 로멜리 마을을 바라보는 모습 ⓒ Mabon / AI

게로스와 세라비와 코린은 그날 늦은 오후가 다 되어 로멜리 쉬르쿠젤에 도착했다. 신전은 높이 솟은 절벽 위에 지어져 있었다. 로멜리 마을은 강을 사이에 두고 신전과 마주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게로스가 20년 전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던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성인이 된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로멜리 마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로장 쉬르쿠젤처럼 대부분 피난을 간 모양이었다. 신전에도 사제들만 남아 지키고 있었다. 레이가 트루아벨에 가는 길에 미리 들러 얘기를 해 둔 모양인지 그들은 이미 신전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고 왕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짧아진 계절이라 늦은 오후인데도 이미 주변은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반들반들하게 닳은 돌로 된 외벽과 종탑은 흐린 하늘 아래 쓸쓸하게 솟아 있었다. 사제들이 신전 입구와 외벽의 스콘스에 이른 횃불을 걸었다. 그러자 너도밤나무와 잡목 숲이 병풍처럼 둘러싼 신전은 둥지처럼 따뜻하고 아늑해 보였다.


게로스는 절벽 가장자리에 서서 그 아래 묵묵히 흐르는 잿빛 강물과 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갈대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로멜리 쉬르쿠젤과 트루아벨은 빨리 움직이면 반나절이면 올 수 있는 거리였다. 플로르 왕자 때문에 천천히 오더라도 내일이면 그들은 여기 도착할 것이었다.


‘브리엘 부대사의 말이 맞다면, 내게 남은 시간은 하루도 안 된다.’ 게로스는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반사하여 차가운 빛을 띠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파렌베르크가 넘어갔으니, 오스틴은 금방 지방까지 치고 내려가 나라를 완전히 점령하려고 하겠지. 그러면 우리가 떠나온 기지를 포함한 외곽 기지의 부대들은 지금쯤 이미 교전 중일 가능성이 높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만약 오늘 밤이 내 마지막 밤이라면….’


게로스는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클로드 에티엔에게 업무 인수인계서를 남겨야 할까? 아니면 앙투안에게? 아니면 코린에게? 코린은 지금 여기 같이 있으니 말로 하면 되겠지. 갑자기 준비할 시간이 생긴다는 것도 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부재 시 절차는 이미 다 준비되어 있었다. 신하들은 거기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니 사실상 준비할 것은 딱히 없었다. 클로드 에티엔에게 마지막으로 몇 가지 더 당부할 사항이 떠올라 그는 그것을 문서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순간조차도 일 생각이나 하고 있네, 나란 사람은…’


게로스는 자신의 처지가 갑자기 우스워졌다. 레이가 자신에게 시간을 주려고 한 것은 업무 인계서나 작성하라고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다지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자신의 짧은 인생을 돌아보았다. 사는 것을 기꺼워하지는 않았으나,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왠지 서글펐다. 왕가에 태어나 화려하게 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지막 순간에 떠올리고 싶을 만큼 행복했던 순간은 없었다. 극히 최근에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이카리아 여자와 같이 보낸 시간들만 빼고.


내 인생 왜 이렇게 삭막하지, 라고 중얼거리며 신전 쪽을 바라보니, 2층의 사제들의 처소 창문에 세라비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게로스와 눈이 마주치자 창가에서 사라졌다.


트루아벨로 보내기 전, 자신을 보면 환하게 웃던 세라비가 이젠 그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니, 게로스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된 원인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더욱 씁쓸했다. 기지를 떠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둘만 얘기할 기회도 없었지만, 잠깐 기회가 생겨도 세라비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는 세라비를 트루아벨로 보낸 그날 이후 그녀와 아직 말 한마디도 해보지 못했다.


그는 평생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에게 용서를 비는 자는 있었어도 그가 용서를 빌 일은 살면서 발생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젠 해야만 했다. 그 말을 듣고 세라비가 울거나 화를 내더라도, 레이의 말처럼 한 대 때리더라도, 혹은 차갑게 외면하며 용서하지 않더라도, 이젠 사과할 시간도 없었으니 지금 용서를 구해야 했다.


게로스는 신전 안으로 들어가 이층의 세라비가 방금 창가에 나타났던 방으로 들어갔다. 사제들은 왕의 일행에게 그들이 가진 가장 좋은 방들을 내어준 모양이었다. 꽉 닫히지 않는 창문에서 찬 바람이 새어들어왔지만 벽난로에는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두꺼운 카페트 위에는 푹신한 방석들이 소파 대신 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물동이에 든 물을 쏟아내는 플레베르 여신상이 작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세라비는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라비.”


세라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뭐 보고 있어?”


게로스는 창가로 가까이 가서 세라비의 옆에 섰다. 아까 절벽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신전 바깥에 사제들이 있어서 몰랐는데, 이 방에서 세라비와 둘이 강물과 불 꺼진 마을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세상이 멸망해서 단 둘만 남은 것 같았다.


“깜깜하네…”


세라비는 고개를 조금 끄덕여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용기를 얻어 게로스는 다시 말해 보았다.


“…잠깐 얘기해도 될까?”


세라비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게로스가 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을 때 갑자기 세라비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브레보뉴 숲에서 너는 나한테 실망할 얘기를 해주겠다고 했었지.”


“알아, 기억나.”


세라비는 아무 감정도 없는 말투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걸 그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어.”


“미안해.” 게로스는 마침내 말했다. “너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 너를 보내자마자 포르 칼레즈가… 이유야 어쨌든 미안해. 용서해 달라고 할 자격도 없지만, 난 너에게 진심이야. 그때도 지금도.”


“난 네가 외국 공주와 국혼을 수락해서 실망한 게 아니야. 내가 너였어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내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 네가 좋아서 그렇게 한 게 아닌 거 나도 알아.”


“그래…” 게로스는 대답을 흐렸다.


“난 그래서 네가 그렇게 한 거 이해해. 원망도 하지 않아.”


“그럼 뭐에 실망한 거야?”


세라비는 억누르던 것이 터지듯 말했다. “…그 얘기를 대공 전하를 통해서 듣게 한 거…!”


게로스는 세라비의 앞으로 다가섰다. 세라비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녀가 테라스 벽을 타고 올라온 이후로 이런 돌조각 같은 표정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다 티 나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세라비가 이렇게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을 짓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만나러 갈 수가 없어서 편지로라도 전하려고 했어… 하지만 도저히 너한테 내가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게 되었다고 쓸 수가 없었어. 미안해. 정말 비겁한 행동이었어.”


그는 살면서 한 번도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설령 더러운 뒷공작을 하더라도 다 이유와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세라비에 대해서만은, 그는 그저 용기가 없어서 가장 중요한 말도 남을 통해 듣게 만든 비겁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 상황이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 선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때 전했어야 했다. 두 사람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대공의 입을 통해 듣게 할 것이 아니라.


“너는 나를 마치 휴가라도 가라는 듯이 발렌도르로 보냈지. 전쟁이 날지도 몰라서 안전한 곳으로 보내는 거라는 말조차 해주지 않았어. 내가 불안해할까 봐 그런 거였겠지. 스칼하븐 공주와 결혼한다는 말도 나에게 해주지 않았어. 그것도 아마 내가 들으면 화내거나 슬퍼할까 봐 그런 거였겠지.”


게로스는 더 이상 말하는 것조차 변명처럼 느껴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린애도 아니고, 네 보호가 필요한 이 나라 국민도 아니야.” 세라비는 갑자기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는 듯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평민이고 너는 왕이니, 너하고 완전히 동등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관계에 있어서는 동등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넌 나에게 중요한 얘기는 하나도 해주지 않았어. 넌 나를 믿지 못한 거야.”


게로스는 레이가 발렌도르로 피난 가기 전, ‘이제 두 분은 이런 얘기 솔직하게 해도 되는 사이 아니십니까? 사실은 세라비 님이 못 미더운 게 아닌가요?”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세라비가 불안해할까 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왠지 대답하지 못했다.


세라비는 그의 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 있는 인형이 아니었다. 그녀는 안전한 곳에서 뛰어나와 검을 들고 전쟁터를 가로질러 자신을 버린 남자를 구하러 오는 사람이었다. 플로르 왕자와 레이첵을 데리고 브뤼메 산맥으로 도망치는 것도 세라비 혼자서 못 해낼 이유가 없었다.


레이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못 미더운 게 아니냐’,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냐’, ‘생각보다 정신력이 강한 분이다’라며 열심히 게로스에게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 자식은 그보다 세라비를 잘 알고 있었다. 게로스가 세라비를 별관에 데려다 놓고 그의 옆에서 꽃처럼 웃고 있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 레이는 옆에서 계속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모두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는 세라비를 사랑하게 된 것을 후회했다. 아니, 사랑하게 되었어도 표현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희박하게라도 외국 공주와의 국혼 가능성이 있으면, 세라비를 그냥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 그러면 세라비는 여전히 그를 무서운 왕으로만 생각하다가 이카리아로 돌아갔겠지. 그는 여전히 외롭겠지만, 세라비는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세월이 흐른 후 레이나 플로르나 레이첵과 함께 '그 사람 너무 무서웠어. 나 진짜로 감옥에 갇힐 뻔했어.' 같은 얘기나 주고받으면서 자신을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그는 그의 인생에 정략결혼 말고 다른 길은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살면서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해 왔었다. 그러니 사실 세라비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었다. 사랑이나 연애 같은 것은 원래 그가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여행기나 모험 소설 같은 재미있는 바카라은 한 권도 없이 바카라임과 의무와 당장 해야 할 일들과 그 후에 해야 할 일들을 적은 바카라들로 숨 쉴 틈도 없이 빽빽하게 채워진 서재와도 같은 그의 마음에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이상한 여자가 담을 넘고 벽을 기어올라 들어와서 여기 왜 이래요? 하고 묻기 전까지는.

게로스 세라비 신전 내실-1.png신전 내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세라비와 세라비에게 다가가는 게로스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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