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베르 신전 (2)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세라비의 표정은 여전히 돌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차라리 너를 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세라비의 턱이 떨리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로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애롭게 미소 지어 주고, 나라를 위해 몸을 갈아 버텼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사람, 그가 처음으로 내민 손을 잡아 준 사람에게서는 차라리 너를 모르는 게 나았다는 말이 나오게 했다. 그 말은 너무나 잔인하고 슬펐다. 그것은 그들이 함께 했던, 비록 매우 짧긴 했지만, 주고받았던 온기와 달콤하고 황홀했던 시간들도 모두 차라리 없었던 것만 못했다는 말이었다.
그는 세라비를 안았다. 그녀는 게로스를 뿌리치지도 안기지도 않은 채 눈물만 흘렸다.
“의도한 게 아니었다고 해도, 어쨌든 넌 나를 버렸어.”
“나 너 버리지 않아. 다시 되돌릴 수 있어.” 게로스는 다급히 말했다. “스칼하븐과 국혼도 하지 않을 거야.”
세라비는 고개를 들어 게로스를 보았다. 트루아벨에 잠깐 가 있으라고 얘기한 후로 그녀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스칼하븐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이기면 돼. 솔렌하고 뤼넬을 어떻게 깨워야 하는지 알아냈어. 브리엘 부대사가 플로르 왕자를 데리러 갔어. 트루아벨은 가까우니까 내일이면 도착할 거야.”
“그걸 깨우면 무슨 일이 생기는데?”
“위기에서 구해 주겠지, 전설대로.”
“넌 그런 거 안 믿잖아.”
“이젠 믿어.” 게로스는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믿고 싶은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외국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전쟁을 끝내고, 그의 나라는 다시 평화를 찾고, 세라비를 배신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는데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비록 그는 세상에서 사라지겠지만 말이다. 칼베르 국민들은 왕을 애도할 것이고 세라비는 연인을 잃고 슬퍼하겠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에서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세라비가 그와 라그나의 결혼을 멀리서 지켜보는 미래보다는 이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럼 국혼 수락한 걸 번복한다고? 받아들일까?”
“받아들이게 할 수 있어.”
“넌 뭐든지 계획하고 자신하는구나.” 세라비는 약간의 냉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 나도 무서워. 계획하지만 계획대로 안 되고, 자신하지만 실패해.”
세라비가 자신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것 같다고 느끼며 게로스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너만은… 내가 계획한 게 아니었어.”
세라비는 말없이 게로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내가 미워?”
“너 미워한 적 없어. 미우면 구하러 오지도 않았겠지…”
“나 그럼 따귀 안 맞는 거야?”
“레이한테 들었어? 너네 이제 서로 별 얘기 다 하는구나.” 세라비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게로스는 세라비의 어이없어하는 얼굴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조금 아까 같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을 다시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 이제 어차피 못 보나? 세라비하고 다시 얘기를 하게 되니 자꾸 잊게 되네.’ 그는 침울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신 세라비의 볼살을 살짝 꼬집었다. “아얏.”하고 세라비가 그에게 눈을 흘겼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이 점점 차가워져서 두 사람은 불가로 가서 앉았다. 장작이 타면서 탁탁 소리를 내고, 틈새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불꽃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렇게 추운데, 레이랑 플로르 왕자님은 이런 바람을 뚫고 오고 있는 걸까?”
“트루아벨에서 하루 자고 내일 오지 않을까? 아무튼, 자국도 아닌데 말려들어서 고생하고 있네. 플로르도, 브리엘 부대사도, 너도…”
“플로르 왕자님은 자기가 선택해서 온 거고, 레이는 신의 계시 따르다 보니까 온 건데 뭐.”
“너는?”
세라비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난… 삼촌이 가라고 해서…”
게로스는 그 모습이 우스워서 소리 내서 웃었다.
“세르비카 경한테 감사해야겠네.”
“조카를 사지에 보내 놓고 무슨 감사를 받아. 잠이나 자자.”
게로스는 ‘너 말고, 내가…’하고 말하려고 했으나 세라비가 일어나서 카페트 위에 방석 여러 개를 겹쳐 깔아 잘 자리를 만드는 바람에 말하지 못했다. 그도 일어나 방구석에 잘 개켜서 놓여 있던 담요를 가지고 왔다.
“숲에서 낙엽 깔아 잠자리 만들던 거 생각난다.” 세라비가 말했다.
“그러게. 너무 호화롭다. 나 이렇게 좋은 데서 자도 되는 거야?”
“너 왕인데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위선적으로 들리는 거 알아?” 세라비가 담요를 덮고 누우면서 말했다. 게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숲에서 잘 때보다 좋은 점이 있어.” 옆에 누운 게로스에게 담요를 잘 둘러 덮어주며 세라비가 말했다.
“뭔데?”
“교대로 안 자도 되는 거?”
“그러네.” 게로스는 옆으로 누워 세라비의 살짝 올라간 듯한 코의 발랄하고 귀여운 선을 바라보았다. 졸음이 오는지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몇 번 깜박거렸다. 게로스는 세라비에게는 미안하지만 좀 더 깨워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에 세라비가 잠들면 이제 얘기를 할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넌 삼촌이 싫어?” 게로스는 세라비에게 말을 시키기 위해 아까 하던 얘기를 생각해 내고 물었다. “너를 키워주신 분이라며.”
“삼촌이랑 나 잘 안 맞아. 맨날 혼났거든.”
“뭐 때문에 혼났는데?”
세라비는 어릴 때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다섯 살 밖에 안 된 어린 딸을 걸리적거린다고 집안일 해주는 아줌마에게 맡겨 놓고 멀리 여행을 떠났다가 사고로 돌아가신 세라비의 부모님 얘기, 아버지의 동생인 세르비카 경이 거두어서 세 살 아래 사촌인 레이첵과 함께 자란 얘기, 클레망스 숙모가 딸이 생겼다고 좋아하며 예쁜 드레스며 장신구 같은 것들을 잔뜩 준비해 놨는데 세라비가 옷은 험하게 입느라 다 찢어먹고 장신구는 손도 안 대서 실망해했다는 얘기, 삼촌 집이 너무 답답해서 원래 살던 라를르로 도망가려고 계획을 짜 탈출했다가(세라비는 자기가 그때 겨우 열세 살이었는데도 정말 치밀하게 계획을 잘 짰다고 말했다) 3일 만에 삼촌에게 도로 잡혀온 얘기, 세라비가 어른이 되면 집에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고 그리제트 아줌마가 13년 동안 라를르의 집을 틈틈이 돌보아 주었다는 얘기, 아줌마가 아직도 자기를 부모님이 내팽개친 다섯 살 애기처럼 생각한다는 얘기…
“그래서 우리 집엔 낚싯대가 있어.” 세라비가 말했다. “부모님이 낚시를 좋아하셨대. 난 쓸 줄 모르지만.”
“너도 생각보다 인생이 평탄치 않구나.” 게로스는 이렇게 말했으나, 부모님이 버리고 간 아이 치고는 세라비가 너무 밝아서, 말은 저렇게 하지만 세르비카 경이 잘 키웠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다섯 살 때부터 부모님 없었어.” 게로스는 이렇게 말하고 속으로 놀랐다. 누군가에게 부모님 얘기를 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세라비를 위로해주고 싶어서이거나 아니면 부모님이 왜 돌아오시지 않는지 궁금해하며 잠들었던 다섯 살의 자신을 위로해주고 싶어서인지도 몰랐다.
세라비는 이 말을 듣고 게로스 쪽으로 돌아누웠다. “너도?”
“응, 아버지는 병이 나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게로스는 이곳 플레베르 신전에서 발견했던 저주의 기록과 아버지가 죽기 전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애써 머릿속에서 흩어버렸다. 아무리 그가 세라비에게 모든 속내를 다 얘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저주와 아버지에 대한 얘기만은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참이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 순간, 저주라는 단어가 마치 시커멓고 찐득거리는 검은 진흙처럼 세라비에게 달라붙어 삼켜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넌 아버지 닮았지? 엄청 미남이셨겠다. 초상화 있어?”
“안 봐도 될걸?”
“왜?”
“그냥 내가 그 얼굴 그대로야.”
세라비는 그 정도야? 하면서 게로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게로스는 잠시 세라비를 마주 보다가 덧붙였다. “머리랑 눈 색깔만 달라. 난 그쪽은 어머니 닮았어.”
“어머니도 초상화 있겠네? 어떤 분이셨어?”
다섯 살 때 헤어진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기억이 날 리가, 하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클로드 에티엔 닮았어.”
세라비는 클로드 에티엔의 농부아저씨 같은 푸근한 얼굴을 떠올리며 까르륵하고 웃을 뻔했다. 그러나 곧 아차, 어머님 얼굴 얘긴데 웃으면 안 되지! 하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다정한 분이셨겠구나.”
이번엔 게로스가 쿡쿡 웃었다. 그래, 공주의 초상화라면 상당히 미화된 것일 텐데도 초상화 속의 어머니는 빈말로라도 미인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마도 아버지 얼굴만 보고 결혼한 게 틀림없었다. 평민인데도 공주의 남편이 될 정도였으면 아버지는 얼굴뿐 아니라 말재주나 수완도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빨리 죽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럴 때 아들에게 ‘애인한테 절대 하면 안 되는 말’ 같은 것은 가르쳐 주실 수 있었을 텐데.
게로스는 어릴 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그 후 신전에서 저주의 기록을 찾은 후로는 아버지를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상상을 하는 자신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 자신도 마지막 모습이 가까워 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잡다하고 쓸데없는 얘기는 밤이 깊어도 계속되었다. 학교 다닐 때 얘기, 의전행사 때 순서 까먹은 얘기, 레이첵이 짝사랑한 여자애 얘기… 게로스는 얘기하다가 갑자기 세라비가 자신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대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뭐 해?”
“심장 뛰는 소리 들어.”
게로스는 피식 웃고는 “그래, 많이 들어라.”하고 말했다.
“우리 나중에 바다 놀러 갈래?”
게로스는 뜬금없는 바다 얘기에 잠시 당황했다. 파빌리온에서 세라비가 지평선의 푸른 띠 같은 것을 가리키며 저기는 바다냐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 만약에 시간이 있었더라면 세라비하고 도브론이나 에트레타, 아니면 더 멀리 리비에르 같은 곳에 놀러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왜 이렇게 짧았을까? 하고 게로스는 서글프게 생각했다.
그러나 바다에 놀러 가는 상상을 하자 아주 조금은 현실이 잊혔다. 그래서 게로스는 세라비를 안아주며 “그래, 바다 놀러 가자.”라고 말했다.
세라비는 여전히 게로스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바다 놀러 가자는 얘기를 하는데 왜 이렇게 슬프게 들리지?’
절벽 아래 강가의 메마른 갈대밭에서 솨아아 하고 갈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히 창 틈으로 바람이 휘이잉 소리를 내며 새어 들어 창문을 덜그럭거리게 했다. 그날 밤은 코린도, 사제들도, 호위대의 장교와 병사들도 게로스에게 아무것도 보고하러 오지 않았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