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리아제 신무기의 정체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너도밤나무와 단풍나무 가지에 매달린 마른 잎이 바람에 흔들리다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정원의 마른 잔디 위에는 낙엽의 이불이 부드럽게 쌓여 있었다. 풍접초와 코스모스의 꽃대는 시들어 굽어 있었고, 씨앗을 남긴 꽃대들만이 정원에 남아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정원 구석의 나무들 사이로 바람에 흔들리는 해먹이 하나 보였다. 누군가 걸어놓고 걷는 것을 깜빡한 모양이었다.
테사는 사령부 고위 간부 숙소로 쓰고 있던 뤼미에르관 2층의 방에서 정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파렌베르크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 지방의 대도시들을 차례로 치면 칼베르 전체를 갖게 될 것이었다. 테사는 여기까지 온 긴 세월을 떠올렸다. 7년 전, 바로 이곳 슐로스 루와얄에서 언니들과 동생들이 꽃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서 있을 때 그녀는 견장이 달린 장교의 예복을 입고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에 이미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을 그날 처음으로 후회했다.
7년 만에 그녀는 정복자로서 포로가 된 게로스와 재회했다. 테사는 게로스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대관식 날 모든 나라에서 온 수많은 귀빈들이 모여 있었으므로 게로스는 테사를 잠깐밖에 보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햇빛처럼 빛나던 스무 살 청년은 이제 고귀하고 품위가 넘치는 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드럽고 차분하게 상대방을 천천히 바라보던 그 눈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테사의 부끄러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더 깊게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계집애 같이 생긴 놈이라며 모욕하며 뺨을 후려치려고 다가오는 테사를 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로스를 도저히 때릴 수가 없었다.
테사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게로스를 처형하고 지방으로 흩어진 왕가의 친척들도 잡아들이는 대로 모두 죽일 작정이었다. 정복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테사의 가슴속에서는 네가 왜 여기 온 줄 안다는 것처럼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던 그 자의 눈빛이 떠나지 않았다.
‘살려서 회유에 성공한다면 칼베르를 합법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 나라 국민들, 왕 이름 부르면서 싸우던데, 왕 죽은 거 알면 저항이 바로 성전이 되어버릴 텐데…’
‘칼베르에서는 그가 신이라더니, 이런 미친 나라 같으니라고.’ 테사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만일 게로스를 회유할 수만 있다면, 칼베르 국민들은 그를 따라 오스틴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알고 있는 한 게로스는 쉽게 회유될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그동안 숨어서 전쟁을 준비하고 오스틴에 공작질을 한 것을 보면 회유에 넘어가는 척하면서 또 다른 짓을 꾸미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어떻게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같이 리스코바를 치고 그 나라를 준다고 할까?
그때, 테사의 시야에 황급히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들어 오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뤼미에르관 현관에 당도하기도 전에 이렇게 외쳤다.
“칼베르 왕이 탈출했습니다!”
테사의 목구멍에 갑자기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테사가 게로스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 이유들을 고민하고 있는 동안 그는 이미 탈출해 버린 것이었다. 손아귀에 넣은 지 단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그 자는 테사의 눈을 들여다보며 갈등하게 만든 다음 그녀를 비웃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그를 때리려고 했다가 손을 거두는 것을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모두 보았다. 사령관이자, 제독이고, 정복자인 그녀가 점령국 왕의 눈빛에 흔들려서 차마 때리지 못하고 손을 거두는 것을. 그들은 모두 보았고, 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이미 전했거나 전할 것이다.
테사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녀는 두 손을 하얗게 되도록 꽉 쥐며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찾아내. 그리고 바로 죽여버려.”
그녀는 게로스의 방을 지키던 경비병들을 직접 처단하기 위해 왕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기 방에서 뛰어나와 이 모든 상황을 파악한 마이라와 에런은 그런 테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각자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레이와 코린, 게로스와 세라비는 파렌베르크 외곽의 기지로 퇴각했던 부대와 합류했다. 장 바티스트와 미니스트렐 사령부의 군 간부들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게로스가 살아 돌아온 것을 보고 전쟁에서 승리라도 한 듯 환호하고 기뻐했다.
“루브론에서 출발한 지원군이 내일이면 도착합니다. 스칼하븐은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브뤼게트 섬 근처를 지나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저희 영해로 곧 들어오니 협공해서 파렌베르크를 탈환할 수 있을 겁니다!”
게로스는 장 바티스트의 설명을 들으면서 상황실 구석의 의자에 앉은 세라비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세라비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옆에 앉은 레이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레이는 파렌베르크의 무너진 서쪽 시가지를 통과하던 중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하고 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코린이 재빨리 그를 붙잡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아직 무너지지 않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레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잠시 쉬어가야만 했다.
레이는 지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게로스를 구출하러 와서 보여 주었던 단호하고 민첩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세라비는 그런 레이의 옆모습을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장 바티스트가 스칼하븐을 자꾸 들먹이며 상황 보고를 하고 있는데도 세라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게로스는 세라비와 내내 같이 말을 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 한 마디 아직 해보지 못한 상태였다. 말도 레이하고 같이 타려는 것을 레이가 먼저 코린하고 타버리는 바람에 세라비는 게로스의 말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안전하게 있으라고 발렌도르에 피난 보내 놨더니, 전쟁터가 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파렌베르크에 돌아와 자신을 구출하고, 그러고 나서는 자신과 눈도 안 마주치는 세라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게로스는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미우면 돌아오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스칼하븐과의 국혼 수락 후 게로스는 세라비를 앞으로 영원히 못 볼 거라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밀 통로에서 레이가 세르비카 대사도 와 있다고 했을 때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통로에서 나오자마자 그가 본 것은 피투성이가 된 세라비가 오스틴 병사들과 싸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세라비는 그의 눈앞에서 죽었을 것이었다. 그가 충격으로 얼어붙어 있는 동안 뒤따라온 레이는 즉시 몸을 날려 병사를 처치하고 세라비를 구했다. 그 동작에는 일시의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동작을 취해야 할지 몸으로 익혀 너무나 잘 아는 사람 같은 익숙한 반응이었다.
이 사람은 그냥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는 전투를 알고 있는 자였다.
그는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가 몸을 돌려 도망치려던 오스틴 마법사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림락의 미치광이…!’
림락.
게로스는 이 단어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그는 스칼하븐과 오스틴에 보냈던 첩자들이 입수해 왔던 기밀문서들과 비공식 문서들을 떠올렸다. 림락. 그것은 스칼하븐의 부대 이름이었다.
스칼하븐 북부의 외곽인 바르스홀름에 주둔하던 특수 침투부대 림락은 오스틴 본토에 상륙해서 수도인 에이번홀트까지 순식간에 뚫고 들어가 주요 군사 시설물들을 파괴하고 정부 주요 인사들을 암살한 후 언제 왔다 갔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정도로 치밀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어둠의 전사 부대였다. 자국의 수도에까지 적이 들어왔다는 것은 오스틴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들은 이 림락 부대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으나 그들은 마치 유령 부대처럼 소리 없이 나타나 주변의 비 군사 시설물은 건드리지도 않고 부숴야 하는 시설물만 깨끗하게 파괴한 다음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래서 오스틴의 기밀문서들에는 림락이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거기에 ‘림락의 미치광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림락은 특수부대로서 마법사들도 전투원으로 싸우고 있었다. 림락의 미치광이는 그들 중 하나에게 오스틴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그가 오스틴의 군사 시설들을 미친놈처럼 다 파괴하고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브리엘 부대사가… 림락의 미치광이라고?’ 게로스는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림락은 2년 전에 전멸했는데… 어떻게…?’
게로스의 머릿속에서 이제 모든 퍼즐들이 거의 맞춰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스칼하븐에서 입수한 비공식 문서들 중에 림락의 ‘이카리아제 신무기’가 가끔 언급되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게로스는 코린과 ‘구식 무기도 없는 이카리아에 무슨 신무기인가’라고 농담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코드명 외델레그, 스칼하븐 전통어로 ‘황폐’라는 의미를 가진, 이카리아제 신무기.
그것은 진짜 무기가 아니라 레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게로스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아직도 허공을 멍하니 응시 중인 레이를 바라보았다. 림락은 위치가 발각되면서 오스틴의 기습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 바르스홀름에는 민간인들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틴은 민간인이고 군인이고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인 다음 섬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버렸다. 오스틴에서 데리고 온 파괴 마법사들은 배를 댈 수 있는 작은 만까지 모두 무너뜨려 바닷속으로 처넣었다. 바르스홀름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스칼하븐 내부 문서에도 ‘생존자 없음’으로 기록된 바르스홀름의 기습 공격은 스칼하븐 전력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이때 자칫하면 오스틴이 전쟁에서 승리할 뻔했으므로 게로스도 코린도 나름대로 스칼하븐을 뒤에서 지원하는 공작을 다시 펼쳐야만 했다.
왜 이카리아의 마법사인 브리엘 부대사가 스칼하븐 편에서 싸우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만약 림락의 생존자라면, 그는 아마도 지옥을 보고 돌아왔을 것이다.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며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하던 것은 파렌베르크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거기에서 바르스홀름을 다시 본 것이었다.
게로스는 레이가 다시 눈에 초점이 돌아오며 원래대로의 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세라비는 레이가 숨을 못 쉬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놀라고 걱정했지만, 게로스만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게로스는 세라비가 이미 레이의 그런 반응을 본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세라비는 당황하는 대신 코린에게 레이를 말에서 내려 달라고 해서 재빨리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익숙한 듯이 옷도 풀어주고 식은땀도 닦아주고 팔다리도 주물러 주었다. 세라비의 연인이 자신인지 레이인지 게로스조차 헛갈릴 지경이었다.
“폐하…?”
게로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장 바티스트가 이상한 듯이 그를 불렀다.
게로스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도미니크 아르노가 죽기 전에 일러준 방법이 있었다. 그는 장 바티스트와, 상황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발렌도르로 가겠다. 지금 바로.”
장 바티스트는 깜짝 놀랐다. “발렌도르는 스칼하븐이 포르 칼레즈에 도착하면 합류할 예정입니다. 직접 가시겠다고요?”
“지금 가야 해. 이카리아 왕자를 만나야 한다. 바로 호위대를 구성해 줘.”
게로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레이의 눈길과 마주쳤다. 레이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 지 깨달았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