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로장 쉬르쿠젤의 약속

레이가 본 다른 미래

by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말발굽 소리가 젖은 흙 위에서 둔탁하게 울렸다. 게로스와 코린, 세라비와 레이, 그리고 네 명의 호위병들은 큰길을 피해 쿠젤 강을 따라 난 좁은 농로를 조심스럽게 따라가고 있었다.


강물은 잿빛으로 흐르고, 수확이 끝난 들판은 짧게 깎여 있었다. 벌거숭이가 된 버드나무와 너도밤나무들이 바람에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밭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한 돌집 농가들은 모두 피난을 갔는지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말들은 코끝을 벌름거리며 숨을 골랐다. 세라비는 두꺼운 망토 안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침묵뿐인 일행의 기척만이 싸늘한 공기 속을 가르고 있었다.


그들은 버려진 농가에서 쉬어 가며 이튿날 저녁 쿠젤 강을 끼고 있는 로장 쉬르쿠젤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은 반은 피난을 갔고 반은 집 안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말을 탄 사람들이 나타나자 도망치거나 문을 걸어 잠갔다. 그래서 그들은 주민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마을을 떠나 강가에 있는 작은 수도원으로 갔다.


수도원은 남풍의 신 쉬드르를 모시는 수도원이었지만, 모두 도망쳤는지 텅 비어 있었다. 약탈이나 파괴의 흔적은 없었다. 급히 도망쳤는지 수도사들의 물건도 대부분 그대로 있었고 불을 피울 수 있도록 소량의 장작과 아주 조금이긴 했지만 램프를 켤 기름까지 있었다.


레이는 세라비와 코린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수도원 밖으로 나갔다. 호위대의 장교가 폐하는 후원에 계신다고 알려 주었다. 레이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가로 이어지는 수도원의 후원에는 맑고 차가운 밤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어스름이 내린 강 맞은편에 초승달처럼 완만한 능선들의 그림자가 부드럽게 떠올랐다. 불 켜진 농가가 한두 집 보이다가, 카마가 중천에 떠오를 때쯤 불은 꺼졌다.


게로스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는 그 옆으로 가서 자신이 왔다는 기척을 했지만 게로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레이는 쓰러진 고목 위에 앉았다.


“목숨을 구해 드렸는데 쳐다도 안 보시는군요.” 레이가 말했다.


게로스는 레이를 보고 웃어 보였다. 레이는 그것을 보고 ‘여자들이 좋아하게 생기긴 했군.’하고 생각했다.


“뭘 해드려야 할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게로스가 말했다. “왕의 목숨을 구하면 보통 어느 정도의 포상이 주어지는지…”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때인가요? 포상을 주시려면 일단 나라가 망하지 말아야 하지 않습니까.”


“대사님은 말을 너무 직설적으로 하셔서 제가 깜짝깜짝 놀라게 되네요.” 게로스가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나라 안 망하게 하려고 지금 트루아벨에 가는 겁니다.”


“유물들을 깨우는 데 혹시 왕가의 혈통이라도 필요한 건가요?” 레이가 물었다. “그래서 플로르 왕자님이 필요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게로스는 선선히 대답했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계시는군요. 도미니크 사제가 그 사실을 알려주고 죽었습니다. 저에게 달려드는 오스틴 병사를 퀼테베르 여신의 낫으로 찔러 죽이고 말입니다.”


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결국 약속을 지켰구나, 라고 그는 생각했다.


밤공기는 이제 매우 차가워서 게로스는 손을 녹이기 위해 입김을 불었다. 레이는 물귀신 여울에서 한 것처럼 포슬한 마법의 불을 밝혔다. 불은 어둠 속에서 눈이 부시지 않도록 따뜻하고 은은한 빛을 내며 타올랐다.


게로스는 불에 손을 쬐며 말했다. “편리하군요. 마법이라는 건. 장작이 없어도 아무 데서나 불을 피울 수도 있고 말입니다.”


“온도가 아주 많이 올라가진 않아서 그냥 추운 날 급히 불 쪼일 때나 좋습니다. 물을 끓이거나 요리는 못 해요. 공기 속의 작은 입자들을 빠르게 부딪치게 해서… 아, 이런 얘기는 재미없으시죠.”


게로스는 소리 내서 웃었다. “아, 방금 라마야나 선생님인 줄 알았어요. 말투까지 진짜 똑같네요. 저도 선생님한테 마법 이론을 배웠었거든요.”


레이도 따라 웃었다. “편리하긴 합니다. 위급할 때에는… 이것 덕분에 적어도 얼어 죽진 않으니까요.”


‘본인이 위급할 때 저걸로 목숨을 건졌나 보군.’하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세라비 님하고 화해는 하신 건가요?” 레이가 갑자기 물었다. 게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오기 싫었는데, 세라비 님이 폐하 따귀라도 때려주기 전에는 집에 못 가겠다고 억지로 저를 끌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빨리 한 대 맞고 끝내시죠.”


‘플로르 왕자님 이후로 이제 이런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는데, 내가 대체 뭐라고 두 사람 사이에서 이러고 있는 거람.’하고 레이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레이는 그가 본 것을 게로스에게 말해야만 했다. 그에게 시간이 없다는 것도.


“제가 사과를 할 처지나 되나요.” 게로스가 마침내 말했다. “용서해 달라고 할 자격도 없고요.”


“폐하는 세라비 님을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생각보다 정신력이 강한 분입니다. 자격이 없으면 그만큼 몇 대 더 맞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저 자가 나보다 세라비를 더 잘 아는 것은 알지만, 직접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 게로스는 레이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가 먼저 침묵을 깨고 물었다. “폐하는 만약 곧 죽는다면 뭘 하고 싶으신가요?”


게로스는 이 뜬금없는 질문에 놀랐다. 레이가 그냥 심심해서 하는 질문은 아닐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질문의 의도는 무엇일까 생각하던 게로스는 라마야나가 레이를 만나는 미래를 보고 파렌베르크를 떠났던 사실을 떠올렸다. 제자인 그도 혹시 뭔가 보고 저러는 것일까?


“왜요? 혹시 제가 죽는 미래라도 봤나요?”


그는 반 농담처럼 말한 것이었기 때문에, 레이가 바로 “네.”라고 대답하자 충격을 받았다. 잠시의 정적이 또 흐른 후 게로스가 물었다.


“왜 죽던가요?”


레이는 마법의 불을 모닥불 쑤시듯이 막대기로 찔러대며 대답했다.


“신들이 나타나고, 폐하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솔렌과 뤼넬 때문인가요? 그것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나와 플로르 왕자 두 사람이 다 필요합니다. 플로르 왕자는 괜찮았나요?”


레이는 나직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대답했다. “플로르 왕자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어떻게 알죠?”


“그전에 왕자님이 무사히 이카리아의 왕이 되시는 미래를 보았거든요.”


“그렇다면 나만 죽는다고 치고… 신들이 그래서 전쟁을 끝내 주던가요?”


레이는 게로스가 자신이 죽는다는 말에 이렇게 담담하게 반응하고 심지어 남의 일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보지 못했습니다.”


게로스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천천히 정리해 보았다. “신들은 인간과 본성이 다르니, 의미 없이 사람을 죽이진 않을 겁니다. 아마 뭔가를 해 주고 대신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다음 전설에 전해지는 대로 위기에서 구해 주겠죠.”


“폐하는 본인이 죽는다는데 매우 무덤덤하시군요.” 레이가 씁쓸하게 말했다.


“죽는 게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로스가 말했다. “하지만 죽는 사람 한 명으로 전쟁이 끝난다면 나쁜 거래는 아닐 것 같은데요. 포르 칼레즈부터 시작해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고 있을지도 모르구요.”


레이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게로스는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도 대사님께서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는 솔렌과 뤼넬이 진짜로 뭔가를 일으키는지 확신이 없었는데, 이젠 확실해졌으니 빨리 진행하는 일만 남았네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레이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그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쓰러진다는 게 곧 죽는다는 말은 아니지 않나요?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레이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가 본 것이 비록 물리적으로는 단순히 쓰러지는 것이었지만, 미래를 보는 자는 그 장면이 말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레이도 알고 있었다. 게로스는 죽는다. 신들이 나타나면.


그러나 그는 게로스가 ‘그냥 쓰러졌다 일어나는 거 아니냐’ 라는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증거가 있어야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믿지도 않던 솔렌과 뤼넬을 깨워 보겠다고 플로르와 조우하러 트루아벨까지 달려가고 있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가장 절박한 순간에는 결국 신을 찾으니까. 그 자신도 잿더미가 된 섬을 등지고 반쯤 부서진 배에 올라 오직 살아야겠다는 의지만으로 쉬드르 신에게 기도하며 간신히 이카리아에 돌아왔던 것처럼.


레이가 대답하지 않자 게로스는 그가 본 미래가 자신이 진짜로 죽는 것임을 깨달았다.


“미래는 보시는 분이라면…” 게로스가 물었다. “남의 죽음을 당사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금기일 텐데, 왜 말해주시는 거죠?”


“의미 있게 죽든, 의미 없이 죽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맞으니까요.” 레이는 게로스의 침착한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폐하는 안 그러시길 바라거든요.”


게로스는 강물을 바라보는 레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레이는 쿠젤 강이 아니라 바르스홀름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많이 보신 분처럼 얘기하시네요.”


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게로스는 레이의 슬픔도 아니고 후회도 아닌 표정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물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무슨 일 하셨었나요?”


레이는 짧은 침묵 후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이런저런 일 했어요.”


게로스는 그를 이해했다. 말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언젠가 그들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좀 더 가까워져서 친구가 된다면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말이다.


“나중에 얘기해 달라고 하고 싶지만, 나중이 없어서 안타깝네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레이가 대답했다.


게로스는 나무 그루터기에서 일어났다. 레이도 따라 일어나며 마법의 불을 공중으로 흩어 지워 버렸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려던 게로스는 문득 생각나서 레이에게 말했다.


“약속 하나만 해줄 수 있나요?”


“더 이상은 안 하려고 생각 중이었지만, 폐하라면 하나 더 추가해 보죠.”


“세라비를 집에 반드시 데려다주세요. 라를르의 집에요.”


레이는 게로스의 입에서 라를르라는 단어가 나오자 왠지 웃음이 나왔다. 세라비가 게로스 앞에서도 동네 얘기 엄청 했나 보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혼자서도 잘 찾아가실 분이긴 하지만, 집까지 잘 가는지 제가 바카라임지고 잘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도원 안은 정문에서 교대로 불침번을 서는 호위병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들었는지 조용했다. 두 사람은 약속의 표시로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는 각자의 잠자리로 돌아갔다.

로장 쉬르쿠젤.png초겨울 밤 수도원 후원, 강가를 배경으로 레이와 게로스가 은빛 마법의 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침착하게 대화한다.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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