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와 베니스의 상인>

그람시의 문화 이론으로 본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bywinterfyellb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의 4대 희극으로 권선징악의 전형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유태인 샤일록과 안토니오 및 그 일행의 대립은 뚜렷하게 드러나며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명확하지만 셰익스피어라는 작가가 그렇게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조금 낯선 전개이다. 하필 이탈리아의 베니스, 르네상스의 중심지를 작품의 한가운데로 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이를 보다 문화적인 역사 배경으로 따라가 보고자 한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이탈리아가 당장 몇 세기인지는 나와있지 않지만 고리대금업과 무역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미 르네상스 시기의 초엽 이상은 벗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퍼거슨의 <르네상스>에 따르면 이탈리아는 자신의 지리적 이점을 베이스로 해서 부를 축적하고 그 과정을 통해 상업자본주의의 기본적 방법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에서 특수했던 점은 상업 자본가의 재산을 증대시키는 고리대금업과 은행업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중세시대부터 고리대금업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이탈리아의 이러한 현실에 반대 입장을 내었으나 12세기~13세기 초엽 궁핍한 귀족들이 비생산적으로 대출을 하던 것과 달리 14세기, 15세기부터는 상업이나 공업을 위해 대출이 쓰이게 되면서 교회도 그 교뢰를 수정하게 되었다.


12세기부터 화폐가 증대하면서 봉건귀족들은 도시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도시귀족층을 이룬 이들은 부유한 시민층과 결혼하여 봉건 생활양식에서 탈피하고 있었다. 자본이 없이는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에게 토지를 빼앗기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교육받은 세속인이 늘어나면서 르네상스의 예술과 문화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베니스의 상인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희극적인 낭만이 존재하면서도 현실적인 내용을 날카롭게 비추고 있다. 바사니오가 포셔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서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릴 때 보증을 서 달라고 부탁했을 때 안토니오가 샤일록을 만나는 장면이 그러하다.


고리대금업자이자 유태인인 샤일록은 안토니오가 평소에도 자신이 고객들의 골수를 빼먹는 일을 매번 실패하도록 방해하자 그를 혐오하고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인이고 유태인을 핍박한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던 샤일록이 안토니오에게 말하는 성경의 야곱과 라반의 약속 우화는 그 스스로의 탐욕을 드러낸다.


그해에 태어나는 줄무늬가 있는 새끼 양들을 모두 자기가 갖는다고 라반과 약속한 야곱은 짝짓기 철이 되면 나뭇가지 껍질을 벗겨 암컷 앞에 놓았고 그 결과 암컷 양은 줄무늬가 있는 새끼만 낳아 야곱이 모든 새끼 양들을 다 가지고 간다는 내용의 우화를 들며 샤일록은 훔치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한다. 그러자 기독교인 안토니오는 사탄도 악을 위해서라면 성경마저 인용하는 시대라며 개탄을 하며 홧김에 샤일록과 삼천 타카트와 더불어 자신의 살점마저 보증금으로 내놓는 계약을 해버린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문화적 층위는 크게 두 가지 축이다. 기독교인과 유대교, 그리고 고리대금업자와 상인 혹은 프롤레타리아트이다.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고리대금업은 르네상스 시대에 성행했다. 특히 해외 무역을 하는 안토니오에게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기서는 고리대금업을 사악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아직 종교적으로 고리대금업이 좋지 못한 이미지로 비추어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민족적으로도 그렇거니와 종교적으로도 평소에 편견과 차별을 받는 유대인에 대한 구두쇠에 괴팍한 이미지를 갖는 사람들의 모습은 샤일록을 선량한 유럽인 안토니오와 비교하여 절대악처럼 보이게 만든다.


요점은 베니스의 상인에는 절대악과 절대선의 갈등이 아닌 계급적 갈등이 문화 슬롯적으로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급투쟁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바사니오와 포셔의 로맨스에서는 외려 부정된다. 포셔가 약혼자를 고르는 방법은 금, 은, 납 상자 주에서 하나를 택하는 시험을 내는 것이다.


각각의 상자에 쓰인 글귀는 다음과 같다. “나를 선택하는 자는 만인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나를 선택하는 자는 신분에 알맞은 것을 얻으리라.”, ”나를 선택하는 자 전 재산을 걸고 모험을 해야 할 것이다.”. 이들 중에서 모로코의 왕과 에라곤의 왕은 각자 금 상자와 은 상자를 택하지만 허상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결혼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바사니오는 심지어 안토니오의 배가 난파되어 그의 재산이 파산된 위기임에도-정작 바사니오는 아직 모르지만 – 겉보기에 속지 않고 납상자를 과감하게 고르고 결혼에 성공한다. 여기서는 신분과 같은 세속적인 것들 이를테면 하부구조나 계급이라고 불리는 것을 오히려 거부하며 본질을 보는 어떤 이상(ideal)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계급투쟁을 옹호한 것일까 아니면 부정한 것일까? 베니스의 상인은 낭만적인 정의의 승리, 다시 말해 파산한 안토니오의 샤일록에 대한 법정 승소가 결론인 것인가? 역사를 통해 문화를 분석한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그람시라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무엇이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두 개의 질문 모두에 반대할 것이다. 첫째 셰익스피어는 르네상스의 화려함보다도 당대 계급 간 문화적 투쟁의 현실을 비추려고 했으므로 옹호도 대립도 그의 입장이 아니다. 둘째 베니스의 상인은 르네상스라는 위대한 문화 혁명의 요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주장부터 보면, 그람시는 문화를 자의식의 작업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두는 비판적인 지식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두 층위에서의 대립적 갈등을 두고 역사적 맥락에서 고려할 때 상당히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람시에 따르면 상이한 세계관들은 각기 완결적인 총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서로 다른 실들이 뒤섞여있는 복합적인 직물 같은 구성을 띈다고 한다. 유대인이면서 고리대금업자라는 민족적 슬롯 계급적인 샤일록의 세계관과 기독교인이면서 상인이라는 안토니오의 세계관이 서로 충돌하면서도 서사를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또한 우리는 필연적으로 슬롯적 존재이며 이미 어떤 슬롯적 세계의 일부지만, 의식적이고 비판적인 활동을 통해 새로 등장하는 진보적이고 역동적인 문화의 일부가 될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안토니오와 바사니오가 포셔와의 혼인을 포기하지 않고 성공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법정에서 안토니오가 극적으로 승리하는 과정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포셔라는 막대한 상속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자라는 구혼 상대임에도 고리대금업까지도 이용하면서 자신의 신념과 우정을 따르는 바사니오와 안토니오는 인문주의 시대의 ‘개인’이라는 문화 주체를 확인시킨다. 마찬가지로 법정에서 결국에는 포셔의 도움으로 샤일록과의 계약 증서에서 허점을 찾기는 했지만 정해진 법만이 아니라 휴머니즘으로 도덕적인 사면을 샤일록에게 요구하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능동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베니스의 상인에 드러난 이 같은 문화적인 담론은 르네상스 담론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람시에 따르면 문화적 혁명의 중요한 차원은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슬롯관계들의 총체이자 슬롯 여건들의 총체라고 한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두고 지배계급에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창조하려던 엘리트주의적 문화운동이라고 평가했다. 예를 들어 당시 일상어와 라틴어 간의 언어적 갈등은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위한 경제적 정치적 투쟁의 통합적 일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언어와도 같은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서조차 엘리트와 비엘리트 집단이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세계관의 상호 간 지속적인 변화와 변형이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고 본 이러한 관점에서 부자와 상인, 고리대금업자와 가난한 프롤레타리아가 모두 등장하여 각자의 계급적 서사를 이끌어가는 모습은 르네상스를 보다 슬롯비판적인 측면에서 셰익스피어가 고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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