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심이 시리즈 08. 그리움은 문도 두드리지 않고 들어왔다
오늘 영심이는 밤늦게 찾아왔다.
문도 두드리지 않았다.
벨도 누르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들어와
내 방 한쪽에 앉았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하냐."
나는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올린 채 물었다.
영심이는 대답 대신
휴대폰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떠 있었다.
I miss you.
나는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세 단어뿐인데, 이상했다.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느려졌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밤빛도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누가 보냈어?"
내가 묻자 영심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도."
"그럼 왜 들고 왔어?"
"네가 오늘 이 말을 피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내가? 누구를?"
영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너무 많은 대답을 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린 것도 아닌데
마음이 갑자기 허전해질 때.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예전의 어느 저녁이 불쑥 걸어 들어올 때.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컵을 들고 있다가 문득,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리움이 손끝에 묻어 있을 때.
나는 그런 순간마다
그 감정을 얼른 치워버리려고 했다.
별거 아니야.
지나간 일이야.
다들 그렇게 살아.
그렇게 말하면서
마음속 서랍을 닫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닫은 서랍은 가끔 밤에 혼자 열린다.
그 안에는 사람이 있을 때도 있고,
시간이 있을 때도 있고,
장소가 있을 때도 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예전의 내가 앉아 있다.
더 자주 웃던 나.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설레던 나.
누군가의 연락 하나에 하루가 환해지던 나.
상처받기 전이라 아직 마음을 덜 아끼던 나.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보지 못했다.
보고 싶다는 말은
늘 누군가를 향해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밤에는
그 말이 내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I miss you.
너를 보고 싶다.
네가 그립다.
네가 없는 자리가 느껴진다.
영어로는 참 짧은데,
그 안에 빈 의자 하나가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영심이가 말했다.
"이 말은 꼭 사람한테만 쓰는 게 아니더라."
"그럼?"
"그때의 나한테도 쓰고, 지나간 계절한테도 쓰고, 아직 정리 못 한 마음한테도 쓰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목이 조금 잠겼다.
우리는 보통 그리움을 약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못 잊어서, 아직 미련이 남아서 생기는 마음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보고 싶다는 말을 쉽게 삼킨다.
입 밖으로 꺼내면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 될까 봐.
붙잡고 싶다는 뜻으로 들릴까 봐.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하지만 어쩌면 그리움은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때가 소중했다는 뜻.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실제로 있었다는 뜻.
그 시간이 나를 조금은 바꾸고 지나갔다는 뜻.
그리움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발걸음이 아니라
내 안에 남은 온기를 확인하는 손일지도 모른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다시 보았다.
I miss you.
짧고 조용한 말.
하지만 그 말은 내게 묻고 있었다.
너는 누구를 그리워하니.
무엇을 그리워하니.
혹시, 너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니.
나는 창밖을 보았다.
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영심이는 어느새 내 옆에 누워 있었다.
남의 마음 들쑤셔놓고, 자기는 벌써 졸린 표정이었다.
"야."
"응."
"그리워하는 것도 괜찮은 거야?"
영심이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괜찮지."
"왜?"
"그만큼 진심이었던 거니까."
나는 그 말을 오래 들고 있었다.
진심이었던 마음은
사라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아주 작게 남아 있다가
어느 밤, 문득
"I miss you."라는 얼굴로 찾아온다.
그날 밤 나는 알았다.
보고 싶다는 말은
누군가를 다시 붙잡는 말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내가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래 외면했던 나에게
늦게나마 건네는 인사였다.
I miss you.
오늘은 그 말이
밤늦게 찾아왔다.
나는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리움은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한때 진심이었다는 마음의 증거였다.
나는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 쉼표 JEONGSEON
영심이는 한 번에 큰 소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괜찮다는 말 뒤에 숨은 상처를 지나, 이번에는 보고 싶다는 말 뒤에 남은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앞뒤의 영심이 이야기도 함께 읽어보시면, 이 작은 문장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조금 더 선명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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