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심이 시리즈 07. 괜찮다는 말 뒤에는 늘 밤이 있었다
오늘 영심이는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평소 같으면 현관문도 안 두드리고 들어왔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나는 소파에 기대 누워 있다가 고개만 살짝 들었다.
"뭐야. 오늘은 왜 이렇게 얌전해?"
영심이는 대답 대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아주 얇은 미소를 짓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Never mind."
그 녀석은 들어오자마자 작게 말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또 누구냐."
녀석은 조금 더 환하게 웃었다.
"Never mind."
"Don't worry."
"It's okay."
말투가 너무 공손해서 처음엔 나도 그냥 웃었다.
"아, 됐어. 신경 쓰지 마. 그런 뜻이지?"
영심이가 한숨을 쉬었다.
"뜻은 그런데, 쟤가 항상 그 뜻으로만 쓰이는 건 아니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영심이는 신발을 벗고 들어오며 말했다.
"가끔은 상처받은 사람이 제일 먼저 꺼내는 말이야."
따뜻한 조명이 켜진 밤의 방 안에서 영심이가 소파에 기대앉아 컵을 들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다.
"Never mind."는 소파 끝에 아주 조심스럽게 앉았다.
누가 조금만 미안한 표정을 지어도 먼저 손을 저었다.
"Never mind."
누가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도 녀석은 웃었다.
"Never mind."
누가 장난처럼 던진 말에 마음이 살짝 베였는데도 녀석은 또 웃었다.
"Never mind."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야, 너 왜 자꾸 괜찮다고 해?"
녀석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다고 하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괜찮다고 하면 상대는 더 묻지 않는다.
괜찮다고 하면 상황은 빨리 정리된다.
괜찮다고 하면 분위기는 덜 어색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괜찮다고 말한 사람만 계속 괜찮지 않은 채 남는다.
나는 물었다.
"그럼 안 괜찮을 땐 뭐라고 해야 하는데?"
"Never mind."가 대답 대신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영심이는 조용히 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녀석 앞에 슬쩍 밀어놓았다.
"천천히 말해도 돼."
그 말에 "Never mind."의 미소가 아주 조금 풀렸다.
마치 오래 붙이고 있던 반창고가 끝에서부터 천천히 떨어지는 것 같았다.
녀석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
"사실은 조금 속상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한 문장이 괜찮다는 말보다 훨씬 작았는데, 이상하게 방 안을 더 오래 채웠다.
영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해도 돼."
"하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불편해하잖아."
"가끔은 불편해야 알게 되는 마음도 있어."
그 말에 나는 괜히 창밖을 보았다. 밤은 이미 깊어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자주 마음을 빨리 접는다.
상대가 민망할까 봐.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봐. 내가 예민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래서 웃는다. 괜찮다고 말한다. 별거 아니라고 한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마음은 그 말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괜찮다고 말한 뒤에도 혼자 방에 돌아와 오래 생각한다.
왜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을까. 왜 그 순간 웃어넘겼을까. 왜 나는 내 편을 들어주지 못했을까.
"Never mind."는 물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너무 예의 바른 사람처럼 보였는데, 이제 보니 그냥 지친 사람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는 언제 제일 많이 찾아와?"
녀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을 꺼냈는데 상대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얼굴을 할 때."
그리고 다시 말했다.
"내가 상처받았는데, 그걸 설명하는 내가 더 초라해질 것 같을 때."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괜찮다고 하면 적어도 더 초라해지진 않으니까."
영심이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너도 알지?"
"뭘?"
"그렇게 접은 마음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계속 쌓인다는 거."
"Never mind."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컵 내려놓는 소리만 작게 났다.
나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Never mind."는 쿨한 말이 아니었다.
어떤 날에는 가장 조용한 구조 요청이었다.
나 지금 괜찮은 척하고 있어.
나 조금 아팠어.
나 사실은 더 말하고 싶었어.
하지만 네가 더 듣고 싶어 하지 않을까 봐 내가 먼저 이 말을 꺼낸 거야.
Never mind.
신경 쓰지 마.
아무 일도 아니야.
하지만 사실은, 아무 일도 아닌 척하고 싶은 일이야.
영심이는 소파에 앉아 "Never mind." 옆에 조용히 기대었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좋았다. 누군가의 마음을 억지로 파헤치지 않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지도 않는 침묵.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아주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러다 영심이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꼭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돼."
"그럼 뭐라고 해?"
"이렇게."
영심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Actually, it hurt a little."
사실은, 조금 아팠어.
"Never mind."가 그 문장을 따라 하려다 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은 좀 어렵다."
"알아."
"말하면 울 것 같은데."
"울어도 돼."
그 말에 녀석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이번엔 상처를 숨기려는 웃음이 아니었다.
조금은 들킨 사람의 웃음, 조금은 살 것 같은 사람의 웃음이었다.
늦은 밤 따뜻한 조명이 켜진 집 안에서 영심이가 현관 앞에 서 있고, 한 사람이 조용히 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따뜻한 실내조명과 차가운 밤 복도가 대비되는 장면이다. 영심이는 문 앞에 서서 돌아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고, 방 안에는 막 끝난 대화의 온기가 남아 있다. 이 이미지는 “Never mind.” 뒤에 숨었던 마음이 처음으로 자기감정을 인정하고 돌아가는 순간을 담고 있다.
돌아갈 시간이 되자 "Never mind."는 천천히 일어섰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는 동안 녀석은 평소처럼 말하려다 멈췄다.
"Never…"
그리고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바꾸었다.
"I'll tell you next time."
다음엔 말해볼게.
영심이는 웃었다.
"그래. 그게 더 좋다."
문이 닫히고 난 뒤에도 그 말은 한참 방 안에 남아 있었다.
괜찮다는 말이 늘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뜻도 아니었다.
오늘 영심이는 알고 있었다.
사람은 가끔 상처를 숨기려고 웃는다.
그리고 어떤 웃음은, 너무 오래 참은 마음이 마지막으로 접어 올린 작은 종이학 같은 것이라는 걸.
오늘 영심이는 "Never mind."를 보내고 나서도 한참 동안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물었다.
"쟤, 다음에도 올까?"
영심이가 대답했다.
"오겠지."
"또 괜찮다고 하려나?"
영심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마 처음엔 그러겠지."
그리고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그래도 오늘은 자기 마음이 괜찮지 않았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됐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오늘 하루도 충분했다.
영심이 집에는 오늘도 누군가 찾아옵니다.
어떤 말은 웃으며 들어오고, 어떤 말은 조용히 앉았다 갑니다.
영심이 지난 이야기
"You got this!"는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응원도 너무 크면 사람을 지치게 할 수 있다는 걸.
▸ 영심이 시리즈 06. 오늘은 "You got this."가 너무 시끄러웠다
영심이 첫 번째 이야기
"Take your time."은 어느 날 불쑥 우리 집에 들어와 마음부터 천천히 놓고 갔다.
▸ 영심이 시리즈 01. 천천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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