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엔 화장을 지우지 못했다
‘쉐푸루 전마담’
중국 유학 시절의 내 별명이다.
외동에 맞벌이 부모님. 어릴 적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가게 되었을 땐 친구들과 늘 붙어 있는다는 사실이 신이 났다.
그건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학생 기숙사에서 친구와 같이 생활을 할 때에도,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집을 구해 살 때에도, 나는 누군가와 늘 함께였다.
지금은 술을 거의 안 마시지만, 그땐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그렇듯(?) 나도 그 술자리가 좋아 열심히 마셨다. 학교 근처 ‘쉐푸루(学府路)’라는 골목에 가면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 겸 술집이 몇 개 모여 있었는데, 한국인 유학생들은 그쪽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밤이면 거의 거기서 살았다.
야외 테이블에 앉기라도 하면, 나는 친구들과의 대화를 자주 끊곤 했다. 자꾸만 아는 사람들이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같이 입시 준비를 한 친구들, 과 선후배 동기들, 풍물패 사람들, 통번역 동아리 사람들까지. 온 동네 한국인은 다 알아서, ‘쉐푸루 전마담’이라고 불렸다.
화려한 별명과 달리, 나는 늘 외로웠다.
금요일이면 누군가 나를 불러주지 않을까 싶어서 쉽게 화장을 지우지 못했다. 내가 나서서 만나자고 했다가 혹시나 거절당할까 두려웠고, 그렇다고 누가 불러주지 않으면 또 서운했다. 다들 주말이면 신나게 노는 것 같은데, 나만 소외당하는 거 아닐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은 커져만 갔다. 동아리에서, 과에서 하는 단체 모임은 줄어들었고, 내가 갈 수 있는 술자리도 줄어들었다. 다들 각자 친한 무리가 생겼다. 다행히 나도, 잘 맞는 무리가 생겼다.
그리고 그즈음, 첫사랑이 시작됐다.
동아리에서 만난 그 아이의 군 입대를 6개월 남겨둔 시기였다. 휴학하고 한국에 들어갔던 그 아이가, 입대 전 다시 상해에 와 지낸 한 달은 내 대학 시절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 아이는 내 수업이 끝나면 자전거를 타고 데리러 왔고, 풍물패와 통번역 동아리 활동을 모두 함께했다. 내 베프들과도 너무 잘 어울려서 여섯이서 우르르 몰려다니며 마라탕을 먹고, 오락실을 가고, 볼링을 쳤다.
모든 순간이 즐거웠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내게 말했다.
“이렇게 여럿이서 함께 웃을 수 있는 날은 오래가지 않을 거야.”
그건 친구들에 대한 불신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아니었다. 곧 귀국하여 군대를 가야 할 그 아이는, 이 관계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기에 더욱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 입장에 나를 대입해보니, 너무도 맞는 말인데, 지금껏 인지하지 못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흘러가는 순간들을 더더욱 움켜쥐고, 함께 한 번이라도 더 웃고, 함께 하나라도 추억을 쌓으려 노력했다.
여느 20대 초반의 연애처럼, 찬란했던 첫사랑과의 연애가 끝이 났다. 그 아이는 입대와 함께 이별을 선언했다. 나는 노래 가사처럼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계속 썼다. 닿지도 못할 마음을 실컷 쏟아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흐르면서 눈물 흘리는 날도 점점 줄었다.
그 아이의 말대로 우리 무리의 만남은 오래가지 않았다. 싸운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를 배척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휴학을 한다거나, 군대를 간다거나. 혹은 그저 자연스레 만나는 횟수가 줄었고 인원이 적어졌다.
아, 그때 걔 말대로 그 순간을 즐긴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곁을 채워주던 이들의 빈자리는 여전히 허전했다.
4학년이 되자, 3년을 함께 살았던 친구가 휴학했다. 정들었던 큰 집을 떠나 마지막 1년은 스튜디오형 원룸으로 이사했다. 이제 다들 학점 관리와 졸업 논문, 그리고 취업 준비로 바빠졌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집 꾸미는 재미도 잠깐이었다.
침대 옆 커다란 창문은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쓸쓸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쳐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조용한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했다. 쉐푸루를 가도 내가 아는 얼굴들은 이제 소수였다.
그게 무서움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혼자 남은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쉐푸루 전마담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