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이라고?
1부. 남들의 첫 번째 질문. 중국에서 유학했다고?
“페이 이거, 친 이거”
손뽀뽀 하나, 볼뽀뽀 하나.
세계 각국이 우리가 뭐 잘하는지 보여주는 국제 행사, 엑스포. 특히나 상해 엑스포는 역대 최대 규모였고, 한글을 형상화해 수려하게 지어진 한국관은 중국관을 빼면 단연 인기 1순위였다. ‘세계가 당신 눈앞에, 우리는 당신 곁에!’ 엑스포 자원봉사자들의 슬로건처럼, 그해 상해에는 말 그대로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상해에 사는 나에게 엑스포는 피할 수 없는 축제였다. 도시 전체가 엑스포로 들썩이던 어느 날, 우연히 한국관 홍보 도우미 모집 공고를 봤다. 지원 자격은 교수님의 추천서, HSK 8급과 토익 700점 이상, 그리고 엑스포 전 기간인 6개월 동안 상해에 머물 수 있을 것.
어? 이거 딱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영어, 중국어, 한국어 3개 국어가 가능한 데다, 상해에서 학교를 다니는 나에게는 딱 맞는 조건이었다. 게다가 한국을 알리는 ‘국위선양’이라면 풍물패에서부터 내가 제일 좋아하던 일이었다.
한국무역협회의 서류와 면접을 거쳐 90명 남짓의 도우미가 뽑혔고, 나 역시 그중 한 명이 되었다.
발대식 날, 도우미 대표로 숏컷을 한 언니가 단상에 올라 선서를 했는데, 언니뿐 아니라 동료들이 다 너무 예뻐서 의아할 정도였다. 앞으로 입게 될 유니폼과 한복을 받고, 엑스포가 열리기 전부터 한국을 오가며 서비스 교육과 메이크업 교육, 전시물 공부까지 했다.
드디어 엑스포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단정하게 머리를 말아 올리고, 흰 블라우스에 푸른 펜슬 스커트의 유니폼을 입었다. 이동할 때는 늘 두 줄로 맞춰 걸어야 했다. 그 많은 도우미를 모두 한국에서 데려온 국가관도 드물었지만, 이런 차림으로 줄지어 걷는 건 우리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한국관 도우미들은 어디를 가나 눈길을 끌었다.
지금 생각하면 영락없는 승무원 차림이었다. 실제로 홍보 도우미들 대부분은 승무원 준비생이었다.
물론 나는 예외였다.
하루 평균 3만 5천 명이 방문했던 한국관은 4~6시간은 기본으로 대기해야 했다. 대기 공간도 따로 없고, 대기 번호도 따로 없어서 정말 말 그대로 줄 서서 대기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겐 특이한 역할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PO, performance operator로, 대기열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작은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었다. 거창한 공연은 아니고, 주로 아이들과 놀아주고 지침을 달래주는 역할이다. 31도를 웃도는 습한 날씨에 몇 시간씩 줄을 서다 보면 더위를 먹고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고, 사소한 일로 싸움이 붙기도 했다. 관람객들은 잔뜩 예민했고, 나는 그런 그들을 최전방에서, 가장 오랜 시간 상대해야 했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는 ‘성형왕국’이었는데, 한국의 성형 기술이 한창 뜨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형외과 홍보 모델인 양 다짜고짜 어디 성형했냐고 묻는 질문을 받기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성형하지 않았음을 변명해야 했으며, 그럼 또 왜 안 하냐는 꼬리 질문을 받았다.
한국관 1층은 오픈된 공간으로 가운데에 한강을 형상화하여 물이 흐르도록 설계되었는데, 본격적인 전시가 시작되는 2층으로 진입하기 위한 대기 줄은 1층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설계자의 의도와 달리 한국관의 한강은 종종 화장실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보람찬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주로 풍선으로 강아지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는데, 절대 그냥 주는 법은 없었다.
‘페이 이거(飞一个), 친 이거(亲一个)’ (손으로 뽀뽀 날리기, 볼에 뽀뽀하기)
뽀뽀를 받아내고서야 풍선 강아지를 주었다.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뽀뽀를 해주고는, 내가 만든 강아지를 애지중지 들고 가는 귀여운 뒷모습과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활짝 웃으며 씨에씨에(谢谢, 고마워요)를 남발하는 큰 뒷모습들이 내 행복이었다.
어떤 관람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높은 구두를 신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나를 불러 들고 있던 손선풍기의 바람을 쐬어주기도 했다. 유니폼이나 한복이, 한국관이, 혹은 우리가 너무 예쁘다며 연신 쓰다듬는 할머니들도 있었고, 소란이 벌어지면 다른 관람객 대신 미안하다며 사과해주기도 했다. 고생이 많다는 그 한마디로 나의 불평불만은 잠잠해졌다.
근무는 오전과 오후 2교대였다. 오전엔 학교 수업을 들어야 했던 나는, 오후에 상해 구경을 하고 싶던 동료들과 근무를 바꾸곤 했다. 서로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근무를 바꾸지 못한 날도 큰 문제는 없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도 자원봉사자로 대거 나설 만큼 큰 행사였던 터라, 학교에 근무계획서만 내면 출석으로 인정해 주었고 시험을 레포트로 대체해 줄 때도 있었다. 오프는 동아리 행사에 맞췄다. 동아리원들도 내 덕에 엑스포 구경을 조금 쉽게 할 수 있어 이해해주었다.
오후 근무가 끝나면 다른 언니들과 엑스포 곳곳을 돌아다니고, 상해를 잔뜩 누볐다. 엑스포 출입 비표 줄에는 국가관 대표 배지들로 무거워져 목이 아플 지경이었고, 나는 여기 사는 사람이니 언젠가 가겠지 하고 미뤄뒀던 상해 관광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쉴 틈 없이 바빴지만, 그 모든 것이 즐거웠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중 스물셋의 나는 어린 편에 속했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언니들을 곧잘 따라다녔는데, 그중에는 발대식에서 선서를 하던 그 언니도 있었다.
언니는 VIP 의전을 담당할 정도로 예쁘고, 영어도 중국어도 잘했다. 한국관 전시의 마지막 벽면에는 대표 도우미 몇 명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그중에도 언니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성격도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언니가 있는 파티는 안 즐거울 수가 없었다.
언니는 몰랐겠지만, 나는 그런 멋진 언니를 꽤나 동경했다.
6개월의 엑스포 기간 중 겨우 한두 달을 남겨두었을 무렵, 언니는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귀국한다고 했다.
카타르 항공에 합격했다고 했다.
승무원이라고?
사실 나는 승무원을 딱히 자격 요건도 높지 않고, 그냥 예쁘기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카타르라는 나라도 처음 들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나의 롤모델이었던 그 언니가 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