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붙'은 재미없지

각자의 인생이 있다

by무색무취

부모가 되면서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아이의 옆에 딱 붙어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 부모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이라 여겼다. 부모라면 당연히 자녀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보호해야 하고, 최고와 최선만을 안겨줘야 하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착각은 자유라고 했던가. 딸을 위하는 마음에서 발현됐다고 생각한 행동들이 실제로는 오롯이 나 자신만을 위하고 있었다. 딸이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할 자신을 사전에 보호하고자 딸에게서 ‘경험’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앗아가고 있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들. 이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내게 옳고 내게 맞춰진 기준들에 의해서 설정된 옳음이었다. 나는 여태껏 딸에게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읊어대면서 부딪혀 보는 체험을 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뺏어가고 있었다.


자녀는 자녀만의 인생이 있고, 부모는 부모의 인생이 있다. 각자의 사연, 사유, 사고 체계는 인정받아야 옳다. 부모가 더 오래 살았다고 해서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 슬롯적 규범과 삶의 기준은 절대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슬롯적 규범은 어떤 슬롯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임의로 정해진다. 소속된 집단 내에서 어우러져 살고자 한다면, 억울하더라도 일정 수준 지키며 살아야 슬롯 속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어디는 신호등을 당연히 지켜야 하지만, 또 어디는 신호등이 유명무실한 곳도 있다.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신호등의 준수 여부를 선택하면서 나오지 못한다. 부모가 속해있는 집단의 규칙을 모태신앙처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먼저 살았던 부모가 그 슬롯의 보편적 규범을 자녀에게 교육할 의무가 충분히 있다.


이와 다르게, 각자 삶의 기준은 존중받아야 한다. 어린이들은 당연히 가치관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경험과 고민을 하지 못했을 뿐인데, 어른들은 ‘무맛’을 ‘맛없음’으로 착각하고 자꾸만 가르치려고 한다. 부모의 가치관이 아이들에게 묻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이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자라는 존재가 부모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거지가 익숙할 테고, 집밥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처럼 이러한 양식들이 자연스럽게 체득될 것이다. 모태신앙은 모태신앙이라는 인식이라도 있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가치들은 대부분 그대로 배우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에게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도 좋지만 본인만의 가치관을 형성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겠다.


나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러한 고민에 대한 어렴풋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다회차에 거쳐 반복했던 이 게임에서 그저 도우미에 그쳐야 했다. 딸이 체육관 관장들과 대결할 때, 도움이 필요하면 포켓몬 한 마리를 더 꺼내서 그녀와 함께 싸워주고, 야생 포켓몬을 포획할 때 함께 포켓볼을 하나 더 던져주는 수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현실 세계에서 이랬다면, 내 역할이 이거에 그쳐도 되는 건가 싶은 고민이 들 법한 행태들이었다.


이러한 도움도 중요하겠지만 딸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가까운 거리에서 그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 부모는 자녀가 필요하다고 하면 인생의 선배로서 충고 한 스푼을 더해주고, 선을 넘는다 싶으면 잔소리를 (아끼지 않고) 두 스푼 정도 선사하는 것이 적당한 역할이 되는 게 아닐까. 부모라면 어떨 때는 그림자처럼, 어떨 때는 돌산 동굴에서의 반짝이기처럼. 물론, 각자의 ‘선’이 있고 어우러지며 살기 위해서는 서로의 ‘선’을 어느 정도는 존중할 필요가 있다.


나도 딸도 각자의 포켓몬 도감을 채우는 데 꼭 똑같은 포켓몬들을 담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포켓몬스터 게임에서도 주인공이 10살이 돼서 독립하고 모험을 떠나는데 우리라고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KakaoTalk_261008_174959.jpg즐거워 보이나요?

내가 이렇게 마음을 바꾸고 옆에서 지켜보기 시작했더니, 마음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해졌다. 딸의 게임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을 필요도 없어졌고, 협조 요청이 있을 때만 참가해서 리자몽의 불대문자 같은 강력한 기술만 선사해 주기만 하면 나의 역할은 간단하게 끝이 났다. 암묵적으로 나의 역할을 확정 지으면서 딸은 더 적극적으로 게임에 임할 수 있었고, 그 이후로는 무난하게 모든 체육관 관장, 사천왕, 라이벌까지 깨부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보조 트레이너로 들어가서 포켓몬 대결을 하면 사실상 1:2가 되기 때문에 균형 잡힌 대결이 된다고 하기 힘들다. 정당한 게임을 연습시켜 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아빠와 함께하는 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세상에 나가더라도 엄마와 아빠를 등에 업고 이 정도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줄 수만 있다면.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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