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분수를 알라
나는 Gameboy의 <포켓몬스터 피카츄>과 <포켓몬스터 레츠고! 피카츄>까지 하면 똑같은 게임을 적어도 5번 이상 완주했을 것이다. 게임의 스토리는 당연히 숙지하고 있었고, 할 때마다 내가 생각하는 궁극의 포켓몬 조합을 재현해서 효율적으로 게임을 끝내기 위해 매번 노력했다. 게임 진행 중에 이미 알고 있는 대화들은 쓱쓱 지나가고 나중에 쓸 포켓몬들의 경험치를 축적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반면, 게임을 처음 접하는 딸은 모든 대화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워낙 열심히 읽어서 독해 능력이 향상됐을 것이라 믿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계속해서 새로운 사건과 포켓몬들이 등장하니 신기하고 재밌기만 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봐야 하는 대목이 있다. 내가 앞에서 ‘지식’이 아닌 ‘지혜’를 설파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옆에서 간섭하는 것은 나의 다짐에 크게 반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 걸까?
윤리와 사상 시간에 심심찮게 등장했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심리적 이기주의(Psychological Egoism)를 주장했다. 겉보기에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결국 자신의 이익이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도구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즉, 사람들이 하는 선행이나 충고라고 믿었던 행동들이 사실은 본인의 불안, 뿌듯함, 죄바카라감 등을 얻거나 피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남들에게 간섭을 아끼지 않는 나 자신을 반성하며…)
딸이 세상에 나온 이후에 아이들과 얘기할 기회가 부쩍 늘었다. 아이들을 놀리면 어쩔 줄 몰라 하는 반응이 재밌기도 하거니와, 어른들이 어른과 아이가 아닌 다른 인격체로 대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서슴지 않고 어린 친구들에게 말을 건다. 그런데, 내가 곤란한 질문을 하면 아이가 고민할 틈도 없이 부모가 대답해 주는 경우를 왕왕 경험하게 되었다. 추정컨대 그들은 자녀들이 다른 어른들의 구미에 맞는 대답을 못 할 것 같다는 걱정과 본인의 아이가 곤란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복합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반응이었을 테다.
가령 대화가 이런 식이 된다.
나: “오늘 점심으로 뭐 먹었어?”
아이: “음…”
아이의 부모: “개똥이는 오늘 햄버거 먹었지??”
나: “아…”
이렇게 되면, 나는 오로지 그 가족의 점심 메뉴만 파악하게 되고 그 아이와 대화는 전혀 하지 못하게 된다. 내가 정녕 궁금한 건 그들의 식사 내용이 아니라 그 친구였는데 말이다. 물론 그들의 자유이긴 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굳이 한 마디 건네고 싶다고 한다면 이렇게 얘기하는 게 어떨까?
“아저씨가 뭐 물어보시네~”
아이를 위해서 대신 대답해 주는 것은 부모의 불안함을 빠르게 종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자녀의 성장과 슬롯의 일원으로서의 적응을 원한다면 본인의 불편함 정도는 인내심을 갖고 견디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내가 내 자식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내가 <포켓몬스터 레츠고! 피카츄>를 혼자서 할 때는 몰랐는데, 딸이 하는 게임을 지켜보면서 처음으로 2인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존에도 존재했던 기능인지는 알 수 없으나, 딸이 플레이하면서 즐겨 사용하게 된 기능이었다.
닌텐도 스위치는 분리가 가능한 조그마한 조이스틱(조이콘, Joy-Con)을 두 개를 제공한다. 조이콘을 본체의 좌우에 연결해 두면 보다 넓게 잡고 쓸 수 있고, 양쪽 끝의 조이콘을 분리하면 두 명이 게임을 즐길 수 있다. 하루는 딸이 조이콘을 분리해서 혼자서 게임을 즐기고 있었는데, 함께 빼뒀던 다른 조이콘을 우연히 흔들었더니 갑자기 보조 트레이너 1명이 하늘에서 뜬금없이 뚝 떨어졌다. 느닷없이 게임 속 친구가 생긴 딸은 신이 나서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두 번째 조이콘을 잡고 게임에 참여하길 요구했다.
게임은 딸이 조종하는 기존 트레이너 중심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보조 트레이너의 역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보조 트레이너가 화면에서 벗어나더라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포커스는 주인공 중심이었고 화면에서 사라져 버린 보조 트레이너가 너무 멀리 떨어졌다 싶으면 전지전능한 신이 나타나서 나를 주인공의 옆에 데려다 줄 정도로 비중이 작았다. 심지어 내 캐릭터는 그 어떠한 의사결정도 할 수 없었으며, 말 그대로 주인공을 보조할 뿐이었다.
내가 게임에 참여할 방법은 단 두 가지였다. 포켓몬을 잡을 때와 다른 트레이너와 대결할 때. 내가 졸졸 따라다니지 않아도 딸이 화면에서 움직이다가 야생 포켓몬이나 다른 트레이너와 만나면 나는 자연스럽게 거기에 빨려 들어갔다. 포켓몬을 잡을 때는 함께 포켓볼을 던져줘서 포획 확률을 높이고, 다른 트레이너와 대결할 때는 내가 두 번째 포켓몬을 조종해서 상대 포켓몬에게 기술을 구사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들이지만, 나는 환영받으며 딸과 함께 게임할 수 있어서 좋았고, 딸은 주도권을 내주지 않으면서 아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딸이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고, 잠깐 물러나 있으라고 하면 조이콘을 살짝 흔들어서 게임상에서 사라지는 것도 가능했다.
삶의 주도권은 자녀 본인이 가지고 가는 것이며, 든든한 지원군이 근처에 있다는 안도감 정도만 들게 해주면 되는 것이다. 당연히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지만, 결코 부모 자신의 욕구를 줄이기 위한 행동들은 지양되어야 한다. 조이콘을 흔들면 나타나는 보조 트레이너가 되면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