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앞에 놓아둔 행운목의 잎 끝이 갈색으로 타들어갔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사무실에 구태어 생화를 들여놓은 이유에는 생명력을 느끼고 싶다는 치기 어린 마음과, 관리해주지 않으면 죽는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바카라임이 자리했다. 조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방부처리되어 영원할 그 푸른색색의 조화지만, 생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미흡한 불완전성-타들어갈 생명-의 늙어감이라고 줄곧 주장해 왔다. 내가 사랑한 불완전성, 그것은 자신의 모습일까 혹은 타인의 모습일까. 쿨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이 되려 뻔뻔하게 느껴지는 경계에는 인간의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걸지 모른다. 마음의 주인을 찾아 나서면 종국에는 자신의 마음에 닿는 것이 이치라지만 과정을 건너뛴 도착은 자가당착이랑 또 무엇이 다르겠는가. 쿨함은 진실로 쿨함과 거리가 멀다.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엔 분노가 담겨 있다는 글을 읽었다. 분노의 이면에는 더 화를 잘 내기 위한 배움 중독이 있고, 분노의 저편에는 약자를 보면 도와주려는 도움 중독이 있다. 더 잘 싸우려고 애쓰는데 정작 싸울 상대는 없는 아이러니.
어쩌면 우리는 분노가 사랑의 프로토타입인 민족이 아닐까. 미워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느끼고, 꾸짖는 형태로 사랑을 말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마음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지독한 사랑을 재배하는 민족. 더 이상 약해질 수 없는 자보다 약해질 수는 없으므로, 그제야 안전의 손길을 내미는 손 끝에 있는 건 그 자신의 심장일지도 모르겠다.
욕실에 박혀 반신욕을 하면 바카라상 위 녹차처럼 분노가 우려져나올까. 우릴수록 옅어지는 것이 맛과 향이라지만 감정은 물들일 뿐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감정은 옷을 적시고 얼굴을 적신다. 한 개의 티백이 무한하게 감정을 우려낸다. 인간은 해칠 수 있는 가장 나약한 대상을 골라 해치는 존재이므로 별안간 온몸에 가려움증이 올라온다. 피를 보는 까닭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알아도, 어중간하게 따가울 바에 확실히 쓰라린 게 낫다. 심리학적 고찰이 담긴 명제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배고픈 이에게 요리하는 법 바카라자는 아무런 포만감도 주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저 그런 글들의 나열, 사랑의 나열, 분노의 나열...
사람은 물질로부터 사람의 생을 덧대볼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본질에 앞서면서도 본질을 쫒는다. 타들어가는 생화와 녹차 티백은 당당히 말한다. 혼자서는 우려 질 수도 없거니와 혼자서는 죽어갈 수조차 없다. 우려 지지 않는 것도, 영원히 타들어가지 않는 것도 생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불완전성이었다. 모난 존재이니만큼 서로를 파헤칠 것, 당신 눈물이 색을 머금고 타인을 따라 울려 퍼질 것이며, 당신 마음이 풍부함을 잃고 타인으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분명 인간의 불완전성을 사랑했다. 그럼에도 불완전성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는 인내는 없었다. 옷가지를 풀어헤치듯 텍스트로 나열하니 흥분은 배가되고 감정은 가라앉았다. 분노는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법이므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자존심의 벽을 굳건하게 쌓아왔었던 자신을 발견한 뒤에는 당위성에 대한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졌고, 그 대답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질문이 모든 답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듯이 대답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질문을 두려워해야 한다. 내가 두려웠던 건 자신의 미흡함이지 그의 날카로움이 아니었다.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저서에서 인디언 부족과 나눈 이야기를 심리학적으로 접근해 설명했다. 우리에게 부메랑의 돌아오는 도구라는 인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부메랑은 애초에 사냥감을 명중시키기 위한 도구였다. 본질로 설명해 보자면 명중시키지 못한 부메랑만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즉 실패한 경우에만 부메랑의 끝은 자신을 향한다.
인간의 생애는 타인과의 끊임없는 줄다리기다. 당겨지면 반드시 당기는 때가 있는 법이지만, 우리는 자주 당겨지는 때의 고단함에 대해서만 눈시울을 적신다. 그 시선이 향하는 것은 '상대의 눈에 비친 자신'이다. 자신을 연민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마음이 해야 할 일은 실패의 굴레에 빠지는 것만 같다. 타인이 내게 상처 입히는 만큼 그에게 상처 입히는 자신의 모습도 쌍으로 자리할 터인데, 자기를 바라보느라 상대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간은 전적으로 제작되는 존재라고 믿는다. 각종 후원사로부터 위로와 조언을 제공받아 훌륭한 환경 아래 좋은 품질로써 세상에 맞서는 존재다. 운명론적 의견을 펼치려는 건 아니다. 어느 공장이나 불량품은 있기 마련인 것처럼, 궂은 환경과 모진 바람 아래서도 희망에 능동적인 인간은 태어난다. 그들의 공통점이란 인간은 제작되는 존재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전제를 부정한 것이렸다.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란 점을 누구보다 빠르게 깨달은 사람이기에, 타인의 손을 뿌리치고 핸들을 자기 손으로 붙잡은 것일 터이다.
아무리 바카라을 읽고 지식을 습득해도 가난한 마음 안에 심어진 나무는 꽃을 피우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새끼 때 목줄 매여진 코끼리가 성체가 되고서도 그 주변을 떠날 수 없게 되는 평범한 우리네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이럴 때는 수많은 철학자의 말보다도 눈앞의 생화 한 가닥이 더 도움 되는 것만 같다. 타들어가는 잎 위로 새로운 잎이 돋아나고 있는 모습, 못 본 사이 밝은 연두색으로 높게 솟아난 새 잎은 살아있다고 말한다.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네 인생의 주인은 너라고 말한다.
부메랑은 목표를 명중시키기 위한 도구인 것처럼 우리의 연민도 상대방을 명중시켜야 하는 듯하다. 감정에는 중력이 있어 연민을 빨아먹는다. 자신만 보게 되는 이기적인 태도의 이면에는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중력이 있다. 그 중력에 자신을 빼앗긴 자를 우리는 괴물이라 부르며, 꽤 자주 그 괴물이 되는 게 자신이기도 하다. 괴물을 풀어헤치는 일은 언제나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늘 효용이 있는 바람에 하기 싫어도 결국 해야만 하는 일이 된다. 머지않아 또 타들어갈 것이지만, 타들어가는 잎 위로 또 다른 새 잎이 돋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