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을 읽고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생긴 건지 아시느냐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누가 대성당이라고 말하면 그 사람들이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지 개념이 잡히느냐는 거죠. 말하자면 대성당이 침례교회 건물과 어떻게 다른지 아시느냐는 거죠."
그는 입 밖으로 연기를 조금씩 내뿜었다.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 년이나 백 년 동안 일해야 대성당 하나를 짓는다는 건 알겠어." 그가 말했다. "물론 저 남자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거야. 한 집안이 대대로 대성당 하나에 매달린다는 것도 알겠어. 이것도 방금 저 사람에게 들은 거고. 대성당을 짓는 데 한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그 작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더군. 그런 식이라면 이보게,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_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사람은 한 번은 수평선으로 살고, 한 번은 사선으로 산다. 수평선의 세계에선 삶에 대한 염원으로 살고, 사선의 세계에선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산다. 열심히 사는 이들이 저마다 뒤틀림을 품은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랑이 평평한 염원처럼 올바르게 자리 잡길 원하고, 그로 인해 타인을 상처 입힌다. 말 그대로 삶이 말해 온 방식으로 사랑을 전개하는 것이다. 평평한 지반 위에 서있지 못했기에 비틀어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인지, 평평한 지반 위에서 비틀어진 시선으로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대개 사랑에 대한 선입견으로 고군분투하고 그녀와 겨루기를 반복한다. 아마도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러할 것이다.
스코프로 누군가를 겨냥하면 반드시 유리에 자신의 눈이 반사된다. 누군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안에 내재된 자신을 마주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신체라는 표피에 둘러싸인 우리는 동일한 몸짓을 통해 일종의 테두리를 공유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을 쉽게 타자화시키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자신과 공유하는 것이 별로 없다고 믿는다. 이런 방식으로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우리네 모습이 내내 소설 속에 펼쳐진다. "그런 식이라면 이보게,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맹인은 우리에게 넌지시 질문한다. 명확하게 답할 수 없는 물음은 질문에 모든 의미가 들어있을 터,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 년이나 백 년 동안 일해야 하나의 대성당을 짓는 일'이나 '대성당을 짓는 데 한평생을 바친 이들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까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들의 노고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일까.
성경에서 바벨탑은 여러 가지 의미로 상징된다. '도전'이기도 하면서 '한계'이기도 하고, '합일성'이기도 하면서 '분열'이기도 하다. '공용어'이기도 하면서 '단절'이기도 하고, '쌓아 올림'이기도 하면서 '쓰러짐'이기도 하다. 우리는 명명백백히 바벨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신에게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간악한 인간들의 오만함에 신은 '소통 불능'이라는 영원한 처벌을 내렸고,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진 인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말씀이 증명하듯 같은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다분한 것이 인간의 모습이지 않는가.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질투하고, 비겁하게 굴고, 무례하고, 술에 취하며, 타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대성당>에 이르기 전까지 그들은 대체로 구리다. 아마도 저자가 보여주고자 한 평범한 인간의 모습일 테다.
나는 TV 화면의 대성당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바로 그 일에 내 목숨이 걸려 있다면 어 떨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말하는 미친 사람에게 내 목숨이 달렸다면.
나는 화면이 전원 풍경으로 바뀔 때까지 대성당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맹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먼저 대성당들은 아주 높습니다." 나는 도움이라도 얻을까 해서 방안을 둘러봤다. '위로 치솟았어요. 높이. 아주 높이. 하늘을 향해서.
...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의 상반신 전체가 앞뒤로 움직이는 것 같 있다.
"설명이 잘 안 되네요. 그렇죠?" 내가 말했다.
그는 끄덕이다 말고 소파의 한쪽 끝에 몸을 기댔다. 내 말을 들으며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내 설명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내가 말을 하기만을 기다렸다. 나를 격려하려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또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궁리했다. "대성당들은 정말 큽니다." 내가 말했다. "어마어마해요. 돌로 만들었죠. 때로는 대리석으로도요. 그 옛날에 는 대성당들을 지으면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거죠. 그 옛날에는 모두의 삶에서 하느님이 중요한 일부분이었습니다. 대성당을 지어놓은 걸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말했다. "이 정도로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설명이 없겠습니다. 이런 일은 잘 못하겠습니다."
_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단편에서 주인공이 대성당을 설명하기 위해 읊는 특징들은 마치 바벨탑을 설명하기 위한 특징으로 들리기도 한다. 인간들이 목숨을 걸고 지었고, 아주 높이 위로 치솟았으며,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어 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졌다. 하지만 두 건축물은 엄연히 다르다. 바벨탑은 인간이 하늘에 닿기 위해 쌓던 건물이지만, 대성당은 인간이 하늘을 향해 기도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다. 바벨탑은 언어가 무너지면서 공동체가 해체되지만, 대성당에서는 언어가 아니라 행위(기도)를 통해 마음이 연결된다. 엄연히 다른 두 건축물의 공통점만 콕 집어 이야기하는 주인공의 말하기 방식은 그가 타인과 관계하는 방식이 오해로 인한 소통불능으로 차 있는 상태임을 암시하는 대목일 것이다.
단편 <대성당>은 단편집 <대성당>의 마지막에 배치되었다. '대성당'은 앞선 '바벨'들에 대한 응답인 셈, 바벨탑에서는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쓰고도 흩어지지만, <대성당>에서는 처음부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화자는 맹인을 편견으로 바라보고, 맹인은 세상을 시각적인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애초에 둘은 서로 다른 언어,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들은 언어가 아닌 함께 그리는 행위를 통해 대성당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인간은 평생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만 끝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함께 살아내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아주 잠깐 서로의 세계를 만난다.
맹인이 암시한 것처럼 인간들이 한평생을 바쳐 건설에 몰두하지만 완성을 끝내 확인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짓는 것이 대성당이 아니라 바벨탑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 세기가 넘도록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반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가지기 위해 주고받은 테이프는 무언가를 쌓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하다. 마음은 곧 설계도다. 올바르게 잡혀있지 않는 한 대성당은 영원히 완공되지 않는 것이다.
단편집 <대성당>의 모든 단편들이 아름답게 끝나지는 않는다. 진심으로 기도하며 '대성당' 안에 모인 이들조차도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연결을 실패하기 부지기수다. 그야말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바벨로써 무너진다. 그러나 무너져보기 전에 쌓아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해와 연결의 가능성은 결국 서툰 말솜씨와 오해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시지프스가 돌을 정상까지 밀어 올리면서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상상하노라면 마뜩찬히 떠오르는 표정이 없다. 그 답을 구하기란 아마 우리네 삶의 이유처럼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일 것이다. 그러나 행복한 시지프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하노라면 그 표정이 필시 웃는 모양일 것이라 믿는다. 언제나 구원을 믿고 벽돌을 쌓아 올리지만 완성하고 나면 쓰러지는 아이러니, 누군가를 믿고 마음을 열기로 다짐하면 이내 너무 가까워진 거리 탓에 상처받아 고꾸라지는 우리 마음속 시지프스. 그러나 웃고 긍정하라, 다시 돌을 굴려 올려라. 저자가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다시금 서로의 투박함을 넘어 벽돌을 쌓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서로의 사선이 교차할 때야 수평의 가능성이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나기 마련이다. 인간이 그런 존재인 것을 어떡하나. 삶을 위해 사랑을 지어 올리는 존재, 사랑은 나의 마음에 너를 짓는 일이 아니라, 너의 마음에 나를 짓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