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물 한 컵에 기울어 버린 저울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어릴 적 손등 위에 모래를 소복이 얹고 토닥이며 부르던 그 노래를, 나는 서른 즈음 현실에서 불러 보게 됐다.
분당 정자동, 낡고 좁은 17평 전세 아파트에 살던 시절이었다. 아침마다 수도꼭지를 틀면 연한 녹물이 먼저 쏟아졌다. 한참을 틀어 놓고 기다려야 그제야 맑은 물이 뒤따라 나왔다. 갓난아기를 키우던 때라, 그 누런 물줄기가 유난히 신경 쓰였다. 아기 젖병을 씻을 때마다, 목욕물을 받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지내시죠? 저희가 이 집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혹시 사실 생각 있으세요?”
전화를 끊고 시세를 알아보니, 뜻밖에도 전세가와 매매가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여기, 그냥 우리가 사 버릴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차이가 크지 않으니까, 조금만 보태면 되긴 하겠네.” 남편도 고개를 갸웃하며 관심을 가졌다.
낡긴 했어도 이미 익숙한 동네였다. 아이를 업고 걷던 산바카라길도, 자주 가던 마트도 다 손에 익었다. 이 집을 그대로 사는 것도 충분히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딱 그 무렵, 귀가 솔깃해지는 소식이 들렸다.
‘경기도 광주 2200세대대단지 브랜드 34평형 아파트 곧 입주!
초역세권, 강남역까지 17분.'
“34평이면… 지금 집의 두 배네?”
“그렇지. 방도 두 개나 더 있고, 무엇보다 신축이니까 녹물 걱정은 없겠지.”
녹물. 그 한 단어에 마음이 와르르 기울었다. 매일 아침 수도꼭지 앞에서 받던 그 작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속 저울은 이미 새 아파트 쪽으로 쏠려 있었다. 정자동 집을 사겠다던 생각은 그렇게 슬그머니 뒤로 밀려났다.
문제는 그 아파트의 분양이 이미 끝났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아주 늦은 것도 아니었다. 먼저 분양받은 사람에게 웃돈, 그러니까 ‘프리미엄’을 얹어 주고 입주할 권리를 사 오는 방법이 남아 있었다. 말로만 듣던 분양권 거래였다.
그날부터 우리는 아이를 안고 그 단지 앞 부동산 사무실을 하나하나 돌았다. 중개사님들마다 어느 동, 몇 층이 좋은지는 말이 조금씩 달랐지만, 앞으로 이곳이 좋아질 거라는 데에는 다들 입을 모았다.
“지금 나온 것 중에 프리미엄이 제일 적은 게 이거예요. 층도 괜찮고요.” 한 중개사님이 확신있는 말투로 짚어 주셨다.
“프리미엄이 얼마나 붙었어요?”
“3천만원이요. 이 정도면 많이 안 붙은 거예요. 하시려면 지금 하시는 게 좋아요. 앞으로 계속 오를 거라서.”
‘지금 안 하면 놓친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몇 군데를 더 돌아본 끝에, 우리는 조건이 제일 괜찮아 보이는 분양권 하나를 골라 프리미엄을 얹어 계약했다. 그렇게 정자동의 헌 집을 내려놓고, 새집의 열쇠를 약속받았다. 두꺼비에게 빌던 그 노래가 정말로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입주하던 날, 이삿짐 트럭이 새 아파트 앞에 멈춰 섰을 때 나는 정말 뿌듯했다. 현관문을 열자 새집 특유의 냄새가 훅 풍겼다. 수도꼭지를 틀자마자 맑은 물이 콸콸 쏟아졌다. 그 물줄기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래, 새집이 낫지. 이렇게 쾌적할 수가!”
넓은 거실에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며, 나는 몇 번이고 나 자신에게 그렇게 확인시켰다.
그 집에서의 시간이 나빴던 건 아니다. 아이는 넓어진 거실을 마음껏 뒹굴고 다녔고, 나는 더 이상 수도꼭지 앞에서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그 편안함은 분명 진짜였다.
후회는 몇 년이 지나서야, 아주 조용히 찾아왔다.
아이들을 재우고 무심코 부동산 앱을 켰다가, 옛집이 생각나 정자동 그 단지를 검색해 봤다. 화면에 뜬 숫자를 보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때 살 수도 있었던 좁고 낡은 그 집이, 우리가 고른 새 아파트보다 훨씬 많이 올라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에서 그 단지 이름을 다시 들었다. 리모델링 단지로 선정됐다는 소식이었다. 가격은 그때부터 더 가파르게 올랐다.
“여보, 이것 좀 봐.”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더니, 남편도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때 그냥 그 집을 살 걸 그랬나.’
그 생각이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사실 아쉬운 건 오른 숫자만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왜 그 집을 떠나는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려놓는지 스스로에게 제대로 묻지 않았다. 녹물이 싫었고, 새집이 좋아 보였다. 그 마음 하나로 저울을 기울였다.
돌아보면 낡음은 고칠 수 있는 것이었다. 녹물은 배관을 손보면 되고, 오래된 아파트는 리모델링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집이 서 있던 자리,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쌓아 온 동네의 시간은 내가 고칠 수도, 새로 만들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바뀔 수 있는 것 때문에, 바뀌지 않는 것을 내려놓은 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고른 새집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헌 집이 되어 가고 있다. 반면 그때 놓친 헌 집은 오히려 새집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두꺼비는 내 노래를 들어주긴 했다. 다만 새집이 영원히 새집은 아니라는 것까지는, 노래 가사에 없었을 뿐이다.
그 뒤로 나는 집을 볼 때마다 습관처럼 묻는다. 지금 나를 끌어당기는 게 당장의 편안함인지, 오래 남을 가치인지. 그 질문 하나를 배우는 데, 나는 꽤 비싼 수업료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