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그은 선을 넘다
대구에 내려와 살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새로운 일터에 적응을 해갔고, 우리는 구축 아파트 전세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지냈다. 하지만 몸은 대구에 있어도, 머릿속 지도는 아직 서울과 경기도에 훨씬 익숙했다.
밤마다 경기도 쪽 부동산을 뒤지다가 눈에 들어온 곳이 있었다. 용인에 있는 신축 아파트 분양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상급지는 아니었지만 예전에 친구가 살던 동네라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공원이며 호수며 녹지가 참 예뻤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미분양으로 남은 물량이라 분양가가 꽤 착했다. 사실 그때 우리 형편으로는, 동네보다 가격표를 먼저 볼 수밖에 없었다. 그 가격표 안에 그 예쁜 동네가 들어와 있었던 거다.
(분양이란 건설사가 새로 짓는 아파트를 처음 주인에게 파는 것을 말한다. 대개 다 짓기 전에 미리 계약하고, 몇 년 뒤 완공되면 입주한다. 그 뒤로 주인이 바뀌는 건 매매다.)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계약금은 10퍼센트만 내면 됐고, 중도금은 무이자라 잔금 때까지 따로 들어갈 돈이 없었다. 잔금 때는 단체로 담보대출 전환도 해 준다고 했고, 아니면 전세를 놓아 투자금을 회수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문제는 계약금이었다. 4천만 원 남짓. 그 당시 우리한텐 빠듯한 돈이었다.
“계약금이 좀 걸리긴 하는데… 그래도 이 분양가면 놓치기 아깝지 않아? 우리 이거 한 번 해 볼까?”
내가 운을 떼자 남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수중에 돈이 없는데, 무슨 수로 아파트를 사?”
“그렇지… 당장은 없지. 그래도 어디 방법이 아주 없을까. 조금만 생각해 보자.”
“말이야 방구야. 생각한다고 없는 돈이 생겨?”
나는 더 대꾸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다. 돈이 없으면 못 사는 거다. 그때까지 나는 늘 그렇게, 내 형편 앞에서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그 아파트를 쉽게 마음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아이들을 재우고 통장 내역을 한 줄 한 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대구 전세로 들어올 때 전세자금대출을 받으면서, 한도를 다 채우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받아 두었던 게 있었다.
“우리 그때 대출 한도 다 안 썼잖아. 남은 만큼 더 받으면 되지 않을까?”
“그럼 이자도 더 늘어날텐데?.”
“이자는 내가 장보기부터 줄여서 맞춰 볼게. 완공되면 전세 놓아서 대출은 갚으면 되고. 이 가격에서 더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 정도 조건이면 해 볼 만하지 않아?”
남편은 여전히 떨떠름한 듯했지만, 애써 말리지는 않았다.
다음 날, 막상 은행에 전화하려니 손이 쉽게 가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몇 번을 망설였다. ‘괜히 물어봤다가 안 된다는 소리만 듣는 거 아닐까.’ ‘돈도 없으면서 집을 사겠다고 하면, 상담원이 속으로 웃지 않을까.’ 안 된다는 대답보다, 묻는 일 자체가 더 어색하고 겁이 났다.
그래도 물어보지도 않고 접기에는, 뭔가 놓치기 아까웠다.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은행 대출 상담 번호를 눌렀다.
“제가 전세자금대출 받은 게 있는데요, 한도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서류를 안내받고, 얼마 뒤 남은 한도만큼 더 받을 수 있다는 답을 들었다. 그렇게 계약금이 마련됐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집 가계부에 매달 갚아야 할 숫자가 한 줄 더 늘어난 셈이었다.
몇 번의 분양상담 끝에, 드디어 계약하러 가던 날이었다. 차 안에서 남편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줍줍 찬스라지만, 미분양엔 다 이유가 있는 거 아니야? 싼 게 비지떡일 수도 있고.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누가 일부러 바람 잡는 거 아니냐는 말도 있던데.”
의심 반, 걱정 반으로 남편이 구시렁거리는 사이, 나는 조수석에서 분양팀장님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팀장님~ 좋은 동 호수 남은 거 뭐 있어요?”
“네, 사모님~ 지금으로선 ○○동 15층이 제일 높은 층이에요. 실시간으로 동이랑 층이 계속 빠지고 있어서요.”
은근히 조급함을 심어 주는 멘트였다. 밑져야 본전, 나도 한번 슬쩍 부탁이나 해 보기로 했다.
“팀장님, 저 그냥 찔러보는 거 아니고 진짜 지금 계약하러 가고 있어요~! 조금 더 좋은 층 있으면 좀 챙겨 주세요~.”
“허허, 고객님 그러시구나~ 그럼 저만 알고 몰래 말씀드리는 건데, 사실 19층에도 하나 있어요.”
슬쩍, 층수가 올라갔다. 운전하던 남편이 힐끔 나를 쳐다봤다.
“팀장님 감사해요~! 저희 든든한 투자 파트너가 되어 주시네요~ 근데 이럴 때 보통 회사에서 좋은 층은 좀 빼놓고 그러던데, 20층 이상은 정말 없을까요?”
“허허, 고객님 보통이 아니시네요~ 실은 방금 막 계약이 하나 취소됐는데… 22층이 있긴 해요.”
‘뭐야, 말할수록 계속 올라가잖아?’
옆자리를 보니, 아까까지 구시렁대던 남편의 입꼬리가 흥미롭다는 듯 슬그머니 올라가 있었다.
용인에 가까워질 때까지 통화는 이어졌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졸라 보았다.
“팀장님 감사해요! 한 층만 더 높은 거 있으면, 가서 바로 계약금 걸게요!”
“아이고, 고객님 이러시면 곤란한데… 잠시만요.” 잠깐의 정적 후, 팀장님이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옆 상담사님 물건 중에 23층이 있는데, 제가 사정해서 뺏다시피 가져왔어요. 저 옆 사람한테 혼났어요.”
“네, 감사해요~! 거의 다 왔어요. 들어갈게요!”
그렇게 우리는 모델하우스에 들어가 ○○동 23층을 계약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데,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 도장 하나에 우리 집 몇 년 치 가계부가 걸려 있었다.
15층에서 시작한 통화가 23층에서 끝난 거다. 지금 생각해도 조금만 더 졸랐으면 어디까지 올라갔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32층 중에 23층이면, 나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정해진 대로만 사는 줄 알았던 분양에도, 이렇게 ‘흥정’의 틈이 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끝까지 체면을 지키고 싶었는지, 짐짓 못 미더운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 이 아파트 값이 진짜 분양가보다 많이 오르면, 그건 순전히 당신 덕분인 걸로 인정할게. 나는 아직도 반대지만, 분양가가 워낙 싸니까 속는 셈 치고 따라가 본다, 내가.”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분양가는, 다시 보기 어려운 가격이 되었다. 기분 탓일까, 남편은 그 뒤로 내가 부동산 이야기를 꺼내면, 예전보다 조금 더 오래 귀를 기울여 주는 것 같다. 물론 ‘순전히 당신 덕분’이라는 그 말은, 아직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지만.
돌이켜 보면 운이 많이 따랐다. 대출이 잘 나오고 분양 조건도 좋던 시절이었다. 빌린 돈으로 시작한 만큼, 그 뒤 한동안은 매달 이자를 맞추느라 허리띠를 훨씬 더 졸라매야 했다.
생각해 보면 그날 전까지 나는 늘 답을 먼저 정해 놓고 살았다. 돈이 없으니 안 된다고, 정해진 거니 어쩔 수 없다고. 누가 그어 준 선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어 놓은 선이었다.
그날 나는 그 선을 처음으로 한 발짝 넘어 보았다. 넘어 본다고 늘 원하는 답이 기다리는 건 아니다. 그래도 넘어 보지 않으면, 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끝내 알 수 없다.
15층에서 23층까지. 그날 높아진 건 층수만이 아니었다. 돈 앞에서 늘 움츠러들던 내 어깨도,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