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잠시' 살았습니다》
시차 적응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일단 현지 정착이 시급했기에 도착 다음 날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 없으면 발이 완전히 묶이는 동네인 만큼, 한국에서부터 미리 중고차를 예약해 두었다. 판매자는 노스캐롤라이나(NC)에 연수를 오셨다가 귀국하는 분이었다. 내 입국일은 19일, 그분의 귀국일은 21일. 이틀 상간이라 차를 넘겨받을 수 있는 날은 사실상 20일, 단 하루뿐이었다.
"미국에선 무조건 큰 차를 사야 해."
선배들의 조언에, 여름쯤 언니네가 오면 함께 여행을 다니겠다는 야심 찬 계획까지 더해져 8인승 미니밴을 덜컥 구입했다. 넓고 큰 차 자체는 마음에 쏙 들었다. 문제는 정작 그 차를 몰아야 할 나였다. 10년 무사고 운전 경력을 자랑했지만, 중형 세단보다 큰 차는 단 한 번도 몰아본 적 없는 '대형차 쫄보'였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험마저 발목을 잡았다. 남들은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척척 가입해 온다는 자동차보험이 어찌 된 일인지 나만 계속 오류가 났다. 답답한 마음에 미국 땅을 밟자마자 서툰 영어로 고객센터 전화통화까지 시도했지만, 결국 마지막 결제 단계에서 번번이 튕겨 나갔다.
즉, 차는 샀는데 운전이 무섭고, 보험마저 가입되지 않아 차를 몰 수 없는 구매자가 탄생한 것이다.
다행히 사정을 이해해 주신 판매자분께서 직접 차를 몰고 내 숙소로 나를 픽업하러 와주셨다. 함께 BOA(Bank of America)로 이동해 차량 개인 간 거래 '공증(Notary)'을 받고, 차량 대금을 송금했다. 이제 차는 법적으로 내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운전을 못 하는 나를 위해 판매자분께서 내 숙소까지 직접 차를 데려다주고, 정작 본인은 우버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주 요상하고도 송구한 거래가 이뤄졌다. (혹시 한국에서 다시 마주친다면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판이다.)
사실 개인 간 거래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함께 DMV에 가서 차량 등록 절차를 밟는 게 가장 간단하다. 하지만 당시 미국 면허증이 없었던 나는 공증이라는 번거로운 절차를 한 번 더 거쳐야 했다.
내가 얼른 자동차보험을 들고 차량 등록까지 마무리해야 판매자분도 마음 편히 귀국길에 오르실 터였다. 그날 오후부터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폭풍 보험 조회를 시작했다.
국제면허를 받아주는 곳은 프로그래시브(Progressive)나 가이코(Geico) 같은 대형 보험사뿐이었는데, 생각보다 보험료가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나중에 미국 면허 따고 네고하자' 싶어 울며 겨자 먹기로 결제하려는데, 이번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내가 구매한 차가 '기아(KIA)' 차량이다 보니, 당시 미국을 뒤흔든 도난 이슈 때문에 도난 방지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는 추가 증빙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내가 국제부에서 일하면서 Kia Boyz 기사를 얼마나 많이 썼는데... 그게 나와 관련된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차량 유리에 붙은 스티커 사진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보험사는 계기판의 로고 화면이나, 기아 서비스센터에서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를 완료했다는 공식 서류를 요구했다. 늦은 밤, 깜깜한 주차장으로 나가 아무리 시동을 켜봐도 계기판에 로고 따위는 뜨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내 차종은 원래 안 뜨는 모델이었다.)
결국 귀국을 하루도 채 남기지 않은 판매자분께 한밤중에 서류를 부탁하는 읍소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인터넷상으로 업그레이드 확인 문구 한 줄은 뜨는데, 서류는 짐 깊숙이 있어서 내일 아침에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차는 샀지만 몰지도 못하고, 등록도 안 되고, 본의 아니게 은인 같은 판매자분께는 계속 민폐를 끼치는 상황. 아무것도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채 낯선 미국의 밤은 깊어만 갔다.
자 여기까지 읽으신 계획형 인간 동지들이여,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지 상상이 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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