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신현림, 박서원 등의 시
고백 시는 시인 자신의 삶과 개인적인 경험을 중요한 소재로 삼는다. 특히 고통스럽고 내면적인 기억,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감정과 생각까지도 시의 언어로 옮긴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갈등과 소외, 실패와 상실, 우울과 불안 같은 심리적 위기가 자주 등장하며, 이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성찰한다. 이러한 점에서 고백 시는 실존적 주관성과 일상적 자아 탐색을 핵심으로 하는 시적 형식이며, 문학 치료와도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
고백 시는 1950년대 이후 미국 시단의 두드러진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앤 섹스턴(Anne Sexton) 등은 자신의 정신적 고통과 가족사, 사랑과 상실, 우울과 죽음까지도 시 속에 담아냈다. 이전의 시가 개인의 감정을 절제하거나 보편적인 정서를 지향했다면, 고백 시는 가장 사적인 경험을 시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일상적인 언어와 직접적인 어조를 통해 독자와 시인 사이의 거리를 좁혔고, 때로는 충격적일 만큼 적나라한 방식으로 내면의 상처와 불안을 드러냈다.
이러한 고백 시의 시적 태도는 1980-1990년대 한국 시단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특히 최승자, 신현림, 박서원 등의 시에서는 여성적 경험과 몸의 감각, 상처와 결핍, 사랑과 고독의 문제가 강렬한 자기 고백의 형식으로 형상화된다. 이들의 시는 단순한 감정의 토로에 머물지 않고, 상처 입은 자아가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학 치료적 의미를 지닌다.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최승자, 「일찌기 나는」 전문
최승자의 시 「일찌기 나는」은 고백 시의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하며 깊은 절망의 심연으로 내려간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라는 반복되는 진술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극단적인 회의와 상실감을 드러낸다. 특히 “마른 빵에 핀 곰팡이”, “오줌 자국”,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와 같은 이미지는 인간 존재를 가장 낮고 혐오스러운 사물의 차원까지 끌어내린다. 이는 슬롯적 가면과 체면을 모두 벗겨 낸 뒤 남은 상처 입은 자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또한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라는 구절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다는 근원적인 고독과 버려짐의 감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어지는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는 외침은 타인과의 관계 자체를 거부하려는 절망적인 몸짓처럼 읽힌다. 특히 이 대목에서는 띄어쓰기의 변화가 화자의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화자는 거듭 “나는너를모른다”라고 절규처럼 말을 쏟아 낸다. 이때 ‘나’와 ‘너’를 구분하는 최소한의 언어적 간격조차 사라지면서 소통의 가능성은 붕괴된다. 이러한 붕괴는 이어지는 “너당신그대, 행복”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너’, ‘당신’, ‘그대’는 친밀함의 정도가 서로 다른 호칭이다. 이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붙어 버리면서 타인의 개별적인 얼굴과 관계의 층위가 모두 지워진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 행에서 “너, 당신, 그대, 사랑”이라고 띄어쓰기와 쉼표가 다시 회복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행복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경계를 존중하면서 맺는 관계 속에서 시작되고, 사랑은 타인과의 거리를 넘어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움직임으로 발전된다. 그런데 최승자의 시에서 행복은 경계가 사라지고, 사랑은 오히려 강조된다. 그가 말하는 행복과 사랑은 처음부터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개념이 된다. 이러한 역설은 마지막 구절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루머’는 타인들 사이에 떠도는 말이다. 화자는 자신의 존재조차 ‘너’, ‘당신’, ‘그대’라는 타자들의 언어 속에서만 희미하게 떠도는 소문처럼 느낀다. 앞에서 띄어쓰기와 쉼표가 보여주었던 관계의 혼란과 단절은 결국 존재 자체의 불확실성으로 귀결된다.
최승자의 「일찌기 나는」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 타인과의 관계가 끝내 성립될 수 없다는 절망, 행복과 사랑이 실현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 버린 비극적 인식이 응축되어 있다.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자신의 내부에서 확인되지 못하고 타인의 말 속에서만 떠돈다. 그 속에서 상처 입은 자아가 자신의 고통과 고독을 극단적인 언어로 밀어붙이며 존재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 치열한 자기 고백은 독자가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진 결핍과 고독을 돌아보고, 말하지 못했던 상처를 언어화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학 치료적 의미를 깊이 환기한다.
그러나 나는 아이를 갖고 싶거든
그러나 나는 은어처럼 예쁜 아이를 낳아
바하의 토카타와 푸가를 들려주고 싶거든
공허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포도원의 언어를 가르쳐주고 싶거든.
아가야 깍꿍. 왠지 모를 이 불안을 기뻐하지 않을래?
아가야 깍꿍. 바깥은 쓰레기폭탄창고란다
바깥은 분노한 흑인이 폭동 중이고
핵무기 실험장이란다
눈뜨고 두 번 볼 수 없는 영화,
아주 아름답고 쓰라린 풍경이지
그런 바깥은 남자들의 구역이 많아서란다
너의 외출에 목숨 걸 날이 많을 거란다
아가야 울지마라 울지마
별 볼일 없는 에미지만
네 공포의 바리케이트는 될 수 있단다
평생 보초설 수 있어 물론 밤을 설치겠지
바카라 읽고 시 쓸 시간은 숙청되겠지 빨래는 더 늘고
너로 인해 신경의 아카시아나무는 하늘로 뻗치겠지
너로 인해 돈에 목매달고 주유소가 된다
24시 체인점이 된다 되고 만다
너는 나의 사랑스런 약탈자
에미의 죽음 에미의 찬란한 거울
우리 사랑은 죽음에서 시작했으니
죽음에서 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겠니?
그래서 너와 함께 오래 살고 싶은 거란다
그래서 너와 함께 새롭게 출발하는 거란다
그래서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거란다
공허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신현림, 「아이란 여자의 죽음」 전문
신현림의 「아이란 여자의 죽음」은 모성의 기쁨과 불안, 사랑과 희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고백 시다.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아이란 여자의 죽음’에서 ‘죽음’은 여성이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경험을 함축한다. 여자로 살아오던 삶과 엄마로 살아가는 삶 사이에는 단절과 연속이 동시에 존재한다. 아이의 탄생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인 동시에 한 여성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오는 사건인 셈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모성은 기쁨과 행복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화자는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도 “왠지 모를 이 불안”을 함께 말한다. “아가야 깍꿍”이라는 천진한 말과 ‘불안’이라는 무거운 감정이 한자리에 놓이면서,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에 기쁨과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출산은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는 일이지만, 그 생명이 살아가야 할 세계를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은 불안해진다. 이러한 양가적인 감정은 대상을 이상화하지 않고 그 실제 모습을 드러내는 고백의 방식과 맞닿아 있다.
화자의 불안은 아이가 살아갈 ‘바깥’의 세계로 확대된다. 바깥은 “쓰레기폭탄창고”이고 핵무기 실험장이며, 분노와 폭동이 일어나는 위험한 공간이다. 특히 “그런 바깥은 남자들의 구역이 많아서란다”라는 구절은 이 불안을 여성의 현실과 연결한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위험하지만, 그 위험을 감당해야 하는 방식은 성별과 슬롯적 위치에 따라 다르다. 화자는 아이가 앞으로 만나게 될 세계에서 약자로 살아가야 할 가능성을 예감하며, “너의 외출에 목숨 걸 날이 많을 거란다”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의 화자와 아이 사이에는 보호와 피보호의 관계를 넘어선 연대가 형성된다. 화자는 아이에게 닥칠 공포를 미리 알고 있으므로 자신을 ‘공포의 바리케이트’로 세우고 “평생 보초설 수 있어”라고 말한다. 바리케이드와 보초라는 전쟁의 언어는 약한 존재를 지키려는 엄마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사실 화자 자신도 슬롯의 중심에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별 볼일 없는 에미”라는 자기 인식에는 그 취약함을 인정하는 태도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화자는 강자가 되어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역시 약자의 위치에서 아이와 함께 세상의 위험을 견디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때 모성은 서로의 취약함을 알아보고 함께 생존하려는 연대의 의미가 있다.
아이를 지키는 일에는 엄마 자신의 삶을 내어놓아야 하는 희생이 따른다. “바카라 읽고 시 쓸 시간은 숙청되겠지 빨래는 더 늘고//(...)/너로 인해 돈에 목매달고 주유소가 된다 / 24시 체인점이 된다 되고 만다”라는 구절에는 아이를 낳은 뒤 달라질 여성의 삶이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아이를 갖기 이전의 삶에서 화자는 바카라을 읽고 시를 썼지만, 엄마가 된 뒤에는 육아와 생계를 위한 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내어주어야 한다. ‘숙청’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는 자신의 창조적 시간과 자유가 사라지는 경험을 강하게 표현한다. 주유소와 24시 체인점으로 변해 버리는 듯한 화자의 모습에서는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제공해야 하는 여성의 현실이 드러난다.
이러한 양가적인 감정은 “너는 나의 사랑스런 약탈자”라는 표현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아이는 사랑스러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엄마의 시간과 노동, 자유를 빼앗아 가는 ‘약탈자’다. 화자는 아이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많은 것을 가져갈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아이를 ‘사랑스런’ 존재라고 부른다. 사랑과 희생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한 감정 안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이 표현에는 아이에 대한 원망과 애정이 동시에 담겨 있으며, 모성의 복합적인 심정이 함축되어 있다.
이어지는 “에미의 죽음 에미의 찬란한 거울”이라는 표현은 제목의 ‘죽음’과 다시 연결된다. 아이의 탄생으로 그 이전 여자로서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그리고 그런 에미로서의 삶까지 죽음에 이를 때 아이는 화자의 ‘찬란한 거울’이 된다. 아이로 인해 상실되었던 여자와 엄마로서의 삶이 아이의 삶으로 찬란하게 복제되는 것이다. 죽음과 거울이 한 표현 안에 결합하면서 자아의 상실과 새로운 자기 발견이 동시에 드러난다.
시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우리 사랑은 죽음에서 시작했으니/죽음에서 완성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죽음은 아이의 탄생과 성장을 통해 이전의 삶이 끝나고 새로운 관계와 삶이 시작되는 과정을 포괄한다. 화자는 죽음을 말한 직후 “그래서 너와 함께 오래 살고 싶은 거란다”라고 말한다. 죽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이란 여자의 죽음」은 모성을 아름답고 숭고한 감정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아이를 갖고 싶은 욕망과 아이가 살아갈 세계에 대한 불안, 아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삶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렇게 복합적인 감정이 하나의 목소리 안에서 동시에 드러난다. 특히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아이에게 자신의 삶을 빼앗긴다고 느끼는 화자의 이중적인 시선은 모성의 복잡한 실체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자기 고백은 문학 치료의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고백은 감추고 싶은 감정을 밖으로 꺼내는 데서 시작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신현림은 아이를 향한 복합적인 감정을 어느 한쪽으로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독자는 그 복잡한 감정을 경험하며 자신의 삶에서 말하지 못했던 욕망과 두려움, 관계 속에서 경험한 상실과 희생을 돌아볼 수 있다. 이처럼 고백 시는 마음속에 뒤엉켜 있던 감정에 언어를 부여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과 다시 마주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식구들은 내가 계절마다 선물한 건 벌써 잊어 버렸죠
젖은 땅을 헤치고 나온 땅강아지 이야기 따윈 안중에도 없었죠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내가 매단 수은등이나 전등갓 따위가 낡아갈수록 식구들은 건강해져서 외려 나의 헤픈 자살기도를 들추어 내고
그만 무색해져 버린 나는 작아질 대로 작아져서 정말 입김에도 날아가 버리는 검불이 될까 수없이 걱정했었죠
문득 날이 가는 소리에 놀라 깨면
온몸이 아파서 불에 구운 오징어처럼 오그라들고
4월의 밤하늘에 휘날리던 목련꽃의 병원,
스트레쵸카에 실려 각혈하던 아버지가
마침내 붉은 목련을 피워내고 있구나, 기억이 떠올랐죠
나는 그때 많은 사람들과 분리되어 가고
내가 다스릴 수 없는 내 생애는 시작되어
나도 아버지처럼 자주 입원을 했었죠
그럴수록 식구들의 식욕은 왕성해져서
내가 없는 집안은 환하게 불타오르고
나의 살갗 밑으로는 애정 대신 소독약이 흘렸죠
쇠창살의 병실에서
어릴적에 집어먹던 고소한 에비오제처럼
작고 귀여운 알약들을 자꾸 집어 먹었죠
-박서원, 「발작·2」 전문
박서원의 「발작·2」는 병과 가족의 기억을 통해 상처 입은 자아의 고독과 소외를 드러내는 고백 시다. 제목의 ‘발작’은 신체적인 증상을 가리키지만, 시에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까지 의미가 확장된다. “내가 다스릴 수 없는 내 생애는 시작되어”라는 구절은 이러한 감각을 집약한다. 화자에게 병은 몸의 고통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낯선 방향으로 끌고 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시의 첫 부분에서 반복되는 “식구들은”이라는 말은 화자와 가족 사이의 거리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화자는 계절마다 식구들에게 선물을 하고, “젖은 땅을 헤치고 나온 땅강아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식구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히려 식구들은 화자의 “헤픈 자살기도”를 들추어낸다. 화자가 가족에게 건넨 애정과 관심은 잊히고, 실패와 상처만 기억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비는 가족 안에서조차 자신의 존재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화자의 소외감을 드러낸다.
그 소외감은 “그만 무색해져 버린 나는/작아질 대로 작아져서”라는 표현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자신의 선물과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자살기도 같은 상처만 주목받는 상황에서 화자는 점점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정말 입김에도 날아가 버리는 검불이 될까”라는 이미지에는 존재가 더 이상 견고한 실체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담겨 있다. 앞서 최승자의 시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라는 자기부정이 극단적인 언어로 나타났다면, 박서원의 시에서는 자신이 점점 작아지고 가벼워지는 신체적 이미지로 존재의 불안이 형상화된다.
이러한 자기 축소의 감각은 문득 떠오른 아버지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4월의 밤하늘에 휘날리던 목련꽃의 병원”이라는 표현 뒤에 “스트레쵸카에 실려 각혈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한다. 4월의 목련을 떠올리던 시적 상상은 아버지의 각혈 장면을 거쳐 다시 ‘붉은 목련’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병으로 고통받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 병원에 누워 있던 아버지를 떠올리고, 그 기억을 탐미적 이미지로 되살려내는 것이다. 화자는 곧 “나도 아버지처럼 자주 입원을 했었죠”라고 말하며 아버지와 자신의 삶을 겹쳐 놓는다. 여기에는 병을 매개로 한 아버지와의 동일시가 드러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현재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병은 화자의 몸을 아프게 할 뿐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그를 분리한다. “그럴수록 식구들의 식욕은 왕성해져서/내가 없는 집안은 환하게 불타오르고”라는 구절에는 강한 역설이 나타난다. 화자가 없는 집안은 오히려 활기차고 환하게 빛난다. 화자는 자신의 부재가 가족에게 불편함을 덜어 주는 것처럼 느끼며, 그 과정에서 더욱 깊은 소외를 경험한다.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확신을 얻지 못한 채 병원에 홀로 남겨진 화자의 고독이 “내가 없는 집안”이라는 짧은 표현에 압축되어 있다.
특히 “나의 살갗 밑으로는 애정 대신 소독약이 흘렸죠”라는 구절은 이 시의 상처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표현 가운데 하나로, 신체적인 치료와 정서적인 돌봄 사이에 놓인 거리가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된 것이다. 소독약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것이지만 차갑고 자극적인 물질이기도 하다. 화자는 치료받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원하는 애정에서는 멀어져 있다. 병을 치료하는 의료적 돌봄과 마음의 상처를 보듬는 정서적 돌봄이 서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지막의 알약 이미지는 병이 화자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를 보여준다. 화자는 병실의 쇠창살 안에서 약을 먹으면서 그것을 어린 시절 먹던 ‘고소한 에비오제’와 연결한다. “작고 귀여운 알약”이라는 표현은 무거운 치료의 대상인 약을 친근하고 귀여운 사물로 바꾸어 놓는다. 어린 시절 먹던 고소한 영양제의 감각이 현재의 알약으로 전이됨으로써 병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화자의 삶에 오래도록 자리 잡은 일상의 경험이 된다.
이처럼 「발작·2」의 고백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설명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직접 호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화자는 가족에게 선물했던 것들, 땅강아지, 목련꽃, 병원, 소독약, 알약 같은 구체적인 사물과 장면을 불러오면서 자신의 삶을 보여준다. 기억은 현재의 병실에서 과거의 가족과 아버지에게로 이동하고, 다시 자신의 병과 어린 시절의 감각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기억의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독자는 화자가 겪은 고독과 소외를 스스로 감지하게 된다. 상처를 직접 설명하기보다 상처가 남아 있는 장면과 사물을 보여주는 방식이 이 시의 고백을 더욱 절제되고 깊게 만든다.
앞의 최승자와 신현림의 시가 각각 존재의 고독과 모성의 양가적인 감정을 강렬한 언어로 드러냈다면, 박서원의 「발작·2」는 기억과 사물의 이미지 속에 상처를 담아낸다. 그러나 세 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삶에서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경험을 시의 언어로 끌어내면서, 그 경험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고백은 상처를 그대로 반복하는 행위에 머물지 않고, 기억을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문학 치료에서 이러한 과정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도 사물과 장면, 이미지로 표현하는 순간 조금 다른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서원의 시처럼 자신의 상처를 직접 해명하지 않고 기억의 파편 속에 담아내는 방식 역시 하나의 고백이 될 수 있다. 글쓰기는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새로운 언어를 부여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고백 시는 상처 입은 자아가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고, 말할 수 없었던 경험을 언어의 세계로 옮겨 놓는 문학 치료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문학 치료 현장에서는 환자들이 직접 쓴 시도 중요한 치유의 텍스트가 된다. 『B병동 시화전―시치료의 이론과 실제』(김종주 편, 하나의학사, 1989)는 정신과 병동에서 진행된 시 치료 프로그램의 성과를 엮은 바카라으로, 환자들이 창작한 시와 함께 시 치료의 이론과 실제를 수록하고 있다. 국내 시 치료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시 쓰기가 자기표현을 넘어 상처를 마주하고 삶을 회복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하에서 소개하는 「상처받는 가슴」, 「의심」, 「곰」은 모두 이 바카라에 실린 작품들이다.
세 편의 시는 모두 정신과 병동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쓰였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특별한 것만은 아니다.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 타인에 대한 불신,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이다. 시 쓰기는 이러한 감정을 억누르거나 숨기는 대신 언어로 드러내고, 자신의 경험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는 문학 작품인 동시에 치유의 과정이 된다. 문학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뛰어난 작품을 쓰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새로운 언어로 다시 경험하는 일이며, 세 편의 시는 그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엄마 아빠 싸울 때
아빠 말씀은
하나하나 가시 되어
엄마 가슴 찌르고
아빠 엄마 싸울 때
엄마 말씀은
하나 바늘 되어
아빠 가슴 찌르고,
그러나 아무도 모를 거야,
아빠 가시, 엄마 바늘
우리 가슴 찌르는 것을
-강진영, 「상처받는 가슴」 전문
강진영의 「상처받는 가슴」은 아이의 시선으로 부모의 다툼을 바라본 작품이다. 시는 “엄마 아빠 싸울 때” “아빠 엄마 싸울 때”를 반복한다. 이때 아빠의 말은 ‘가시’가 되고 엄마의 말은 ‘바늘’이 된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가시는 말 자체에 박혀 있는 날카로움을, 바늘은 상대를 향해 찌르는 공격성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의 말은 하나하나 가시가 되어 쌓이고, 엄마의 말은 하나의 바늘이 되어 아버지의 가슴을 찌른다. 그러나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 “아빠 가시, 엄마 바늘”은 결국 모두 아이의 가슴을 찌르는 상처가 된다. 부모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말을 던지지만, 정작 가장 깊이 다치는 사람은 그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아이이다. 부모 사이의 갈등이 아이에게는 하나의 고통으로 경험된다는 사실이 이 단순한 비유 속에 담겨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갈등을 말없이 견디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자신의 분노와 상처에 몰두한 나머지 아이의 마음까지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에게 부모의 말은 자신을 향하지 않았더라도 그대로 가슴에 꽂힌다. 어린 시절 부모의 불화를 경험한 사람은 성장한 뒤에도 그때의 갈등과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어쩌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최초의 내면 아이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시 쓰기는 어린 시절에는 상처라고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기억을 소환한다.
문학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말하기 어려운 경험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다. 가시와 바늘이라는 익숙한 이미지는 아이가 느낀 고통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각으로 바꾸어 놓는다. 말하지 못했던 상처가 시가 되는 순간, 고통은 더 이상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라 함께 이해받을 수 있는 경험으로 변한다. 이처럼 시 쓰기는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타인의 마음과 연결되는 언어를 만들어 낸다.
병원,
뜰에 내리는 비는
어느 사나이의 슬픔일까?
졸리운 눈으로 창문을 열고
꺼지지 않을 가로등을 본다.
나 하나의 울음으로는 돌아가는,
지구가 흔들리지 않지만
가로등은 비가 와도 꺼지지 않는데
어느 누구의 울음인지 창문이 흔들린다.
낮엔 창문에 이마를 마주대고
아이들을 불러보았는데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듯
도망갔다.
그때
내 손바닥에 흐르는 강물에 비친
내 얼굴을 서럽게 보곤
나는 사람인가? 의심하였다.
비 내리는 병원 뜰
내 얼굴을
내가 보곤 도망칠 것인가?
-ㅇㅈㅅ, 「의심」 전문
시 「의심」은 병원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타인의 시선과 자기 의심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보여준다. 비 내리는 병원 뜰과 창문, 가로등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 속에서 고독과 소외감이 천천히 드러난다.
‘병원’이라는 첫 단어는 화자가 이미 일상적인 세계에서 떨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화자는 병실의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지만, 그 창문은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인 동시에 화자를 바깥과 분리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비와 가로등의 이미지에도 화자의 고독이 스며 있다. 화자는 비를 “어느 사나이의 슬픔”으로 바라보고, 비가 와도 꺼지지 않는 가로등을 바라본다. “나 하나의 울음으로는 돌아가는/지구가 흔들리지 않지만”이라는 표현에서는 자신의 슬픔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어지는 “어느 누구의 울음인지 창문이 흔들린다”에서는 자신의 울음과 타인의 울음이 대비된다. 화자는 자신의 고통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타인의 울음에 창문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세상 어딘가에는 자신의 고통에 응답할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쓸쓸한 기대를 드러낸다.
이러한 고립감은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낮에는 창문에 이마를 대고 아이들을 불러보지만, 아이들은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듯/도망갔다.” 여기에서 타인의 시선은 화자 자신의 존재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아이들이 자신을 거부했다는 경험은 곧 자신이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라는 느낌으로 이어진다. 화자는 타인의 반응을 자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으로 받아들이며, 결국 의심은 자기 자신을 향한다.
특히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자기 의심이 어떻게 내면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화자를 보고 도망갔지만, 마지막에는 “내 얼굴을/내가 보곤 도망칠 것인가?”라고 묻는다. 타인의 거부를 바라보던 시선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향한 시선으로 바뀐 것이다. ‘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타인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경험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 깊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의 얼굴을 자신이 보고도 낯설어하고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타인의 시선이 자기 인식 속에서 내재화된 상태를 드러낸다.
문학 치료는 이러한 감정을 곧바로 없애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를 쓰는 과정은 막연한 불안과 자기혐오를 구체적인 언어로 바꾸도록 돕는다. 이름 붙일 수 없던 감정이 한 편의 시가 되는 순간, 화자는 자신의 고통을 밖으로 꺼내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특히 「의심」처럼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경험까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감정을 자기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볼 가능성을 만든다. 그것은 치유의 완성이 아니라 치유의 시작이다.
앞의 두 작품이 상처와 고통을 드러내고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을 보여준다면, 박성우의 「한 마리 곰이 되어」는 치유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 시의 화자는 곰이 되어 겨울잠을 자고 싶다고 말한다. 알람도, 잔소리도 없는 깊은 동굴에서 아무 생각 없이 오래 잠들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한 번쯤 품어 보았을 법한 소망이다. 지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곰의 겨울잠’이라는 친근한 상상으로 표현된다.
한 마리 곰이 되어 겨울잠에 들고 싶어 으음 나흘만 더 잘게요, 잠꼬대도 해대면서 코를 드르렁 드르렁 지치도록 자고 싶어 음냐음냐, 달콤한 꿈을 꾸는 동안 함박눈은 펑펑 내려 동굴 입구까지 쌓이겠지 정말이지 한 마리 곰이 되어 겨울잠에 들고 싶어 알람시계 따위는 동굴에 가져가지 않을 거야 아침 잔소리도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할 거야 알람 소리도 잔소리도 없는 깊은 동굴에 들어 잠만 잘 거야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깊은 산속 동굴에 들어 곰곰 생각하지 않는 미련한 곰이 되어 실컷 잠만 잘 거야 자다가 자다가 지치면 기지개를 켤 거야 내가 쭈욱 쭉 기지개를 켜며 울면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리겠지 푸릇푸릇한 봄이 성큼 와 있겠지
-박성우, 「한 마리 곰이 되어」 전문
「한 마리 곰이 되어」는 상처 입은 마음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자는 곰이 되어 겨울잠을 자고 싶다고 말한다. 알람도, 잔소리도 없는 깊은 동굴에서 아무 생각 없이 오래 잠들고 싶다는 소망은 현실에서 받은 피로와 긴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산속 동굴은 세상의 소음과 요구에서 잠시 물러나 자신을 보호하는 안전한 공간이 된다.
시에서 반복되는 ‘잠’은 단순한 수면을 넘어 쉼과 회복을 상징한다. 화자는 “곰곰 생각하지 않는 미련한 곰이 되어” 실컷 잠만 자겠다고 말한다. ‘곰곰’과 ‘곰’이 이어지는 말놀이는 재미를 주면서도, 지나치게 많은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은 화자의 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미련한 곰’은 부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잠들 수 있는 상태를 부러워하는 화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생각과 걱정으로 지친 사람에게는 잠시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야말로 자신을 회복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깊은 동굴이라는 공간도 중요하다. 화자는 알람시계와 잔소리를 동굴 밖에 두고,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깊은 산속 동굴”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동굴은 외부의 요구와 간섭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는 안전한 공간이다. 현실에서 계속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사람이 잠시 모든 관계와 의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 공간에 담겨 있다. 치유를 위해서는 때로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깊은 잠의 끝에는 새로운 계절이 기다리고 있다. 화자가 기지개를 켜며 울면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리고, “푸릇푸릇한 봄이 성큼 와 있겠지”라는 상상이 이어진다. 겨울잠은 멈춤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봄을 준비하는 시간이 된다. 특히 기지개를 켜는 몸의 움직임은 잠들어 있던 생명력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잠듦과 깨어남, 겨울과 봄이 이어지면서 쉼은 회복을 거쳐 다시 살아갈 힘으로 전환된다.
충분히 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자신의 속도로 회복할 시간을 갖는 것 역시 중요한 치유의 과정이다. 「한 마리 곰이 되어」는 겨울잠이라는 상상을 통해 지친 마음이 자신을 보호하고 회복할 시간을 갖는 모습을 따뜻하게 보여준다. 상상 속에서 잠시 곰이 되어 보는 일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다시 현실로 돌아갈 힘을 준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문학 치료 현장의 시’로서 살펴본 세 편의 시는 각각 다른 모습으로 상처와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상처받는 가슴」에서는 부모의 말이 아이에게 남긴 상처가 ‘가시’와 ‘바늘’이라는 언어로 표현되고, 「의심」에서는 타인의 시선이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으로 깊어지는 과정이 드러난다. 「한 마리 곰이 되어」에서는 지친 마음이 잠시 세상에서 물러나 자신을 보호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준비한다. 세 작품은 모두 문학 치료 현장에서 쓰인 시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그 시들이 보여주는 상처와 치유의 모습은 서로 다르다. 바로 그 다양성 속에서 시 쓰기가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언어로 바라보고, 타인과 공감하며, 다시 삶으로 돌아갈 힘을 찾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