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은 한 편의 따뜻한 영상시다. 이 글에서는 ‘영화로 읽는 시작법 1’로, 영화 <패터슨>에 나타난 ‘관찰하기와 상상하기’를 통해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인의 시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를 쓰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이다. 그는 패터슨이라는 소도시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패터슨은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이며,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다. 하나 더 있다. 주인공이 좋아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1883-1963)가 쓴 장시의 제목도 『패터슨』이다. 자무쉬 감독은 윌리엄스의 이 작품을 읽고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영화 <패터슨>에서도 주인공의 바카라장에 이 시집이 놓여있다. 이렇게 영화 <패터슨>은 제목부터 영화 안과 밖에서 반복되고 변주된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시를 "관념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로(No ideas but in things)" 표현해야 한다는 말로 자신의 시학을 압축했다. 앞에서 살펴본 맥클리시가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윌리엄스 역시 추상적인 관념보다 구체적인 사물에서 시는 시작된다고 믿었다. 영화 <패터슨>은 이러한 시학을 가장 아름답게 영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반복과 변주는 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 유용한 키워드다. 영화에서 주인공 패터슨의 일상은 월요일부터 그다음 주 월요일 아침까지 반복된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면, 반복은 다양한 변주를 내포한다. 그날이 그날 같아 보이지만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당연한 사실이 패터슨의 동선을 따라 잔잔하게 그려진다. 소소한 일상은 시를 쓰는 패터슨의 영감의 원천이 되며, 영화는 반복을 기본 틀로 다채로운 변주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다. 시에서 반복은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이미지와 어조는 새로운 울림을 만들어 낸다. 영화 <패터슨> 역시 그렇다. 패터슨의 반복되는 하루는 시의 리듬이 되고,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들은 시의 변주가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상을 살아가는 한 시인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영화 그 자체가 풍요로운 상상력을 내포한 한 편의 시가 된다.
지루한 일상에 신선한 변주는 쌍둥이들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월요일 아침, 아마도 그전 주와 다를 것 없이 새벽에 잠을 깨는 패터슨에게 아내 로라는 '쌍둥이'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로라: 멋진 꿈을 꿨어. 우리에게 아이가 둘이 있는데 쌍둥이야. 만약 아이가 있다면 쌍둥이도 좋아?
패터슨: 그래. 쌍둥이, 그거 좋지. 한 사람한테 한 명씩.
- 영화 <패터슨>
패터슨은 큰 표정의 변화 없이 덤덤하게 대답하지만, 그날 출근길부터 쌍둥이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타난다. 어린 꼬마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게 차려입고 등장하는 쌍둥이들은 패터슨의 회색빛 일상을 일깨우는 포인트가 된다. 아이를 원하는 로라가 꿈속에서 쌍둥이를 봤다면, 패터슨은 일상에서 쌍둥이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쌍둥이는 무려 열 쌍에 가깝다. 시골 소도시에 그렇게 많은 쌍둥이가 존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정말로 그들이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던 주민이라면, 로라의 꿈을 계기로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쌍둥이들을 패터슨이 새롭게 인식한 것이 된다. 쌍둥이는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그들은 그저 많이 닮았을 뿐이다. 닮은 두 사람은 각각의 고유성을 갖고 있다. 패터슨이 인식하는 일상도 그럴 것이다.
만약 그들이 실재하지 않는 환영이라면, 쌍둥이들은 패터슨의 내면의 세계가 투사된 상상으로 볼 수도 있다. 쌍둥이는 일반적으로 원래는 하나였다가 둘로 나뉜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하나였던 아이를 둘로 나눠 하나씩 갖는다는 것은 패터슨과 로라도 원래는 하나였다가 나뉜 인격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을 환원하면 패터슨과 로라는 한 사람에게 깃든 상반된 모습이 된다. 인간이 가진 양면성은 문학의 보편적인 주제다. 결국 패터슨과 로라는 분열된 자의식이 각각 다르게 인격화된 모습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영화는 쌍둥이를 단순히 상징으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쌍둥이는 반복과 변주라는 영화의 형식을 보여 주는 하나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닮았지만 결코 같지 않은 쌍둥이처럼, 패터슨의 하루도 반복되지만 같은 하루는 아니다. 시인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듯, 영화는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삶의 표정을 보여 준다.
많은 사람들은 "매일이 똑같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차이를 발견한다. 문학 치료에서 글쓰기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같은 하루는 단 하루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반복되는 일상은 더 이상 권태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이 된다. 영화 <패터슨>은 바로 그러한 시인의 시선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패터슨의 아내 로라는 아마추어 화가다. 실험적인 요리를 즐기고, 컨트리 가수를 꿈꾸기도 한다. 두 사람은 예술가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여러모로 대조된다. 패터슨이 지하실에서 시를 퇴고하는 것에 반해, 로라는 거실에서 드러내놓고 작업한다. 패터슨은 자신의 시를 비밀 노트 안에 감춰두지만, 로라는 자신의 그림을 거실 벽에 자랑스럽게 걸어놓는다. 드러내놓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낸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거실에도, 주방 싱크대에도 흑백의 패턴을 그린다. 매일 아침 먹는 시리얼도, 바자회에 내놓을 컵케이크도, 그리고 새로 산 기타까지 흑백의 패턴 문양이며 입고 있는 옷도 그렇다. 의식주가 온통 흑백의 패턴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녀는 일상과 예술을 굳이 경계 짓지 않으며, 언제나 패터슨의 공감과 인정을 바란다.
예술가로서의 재능에 대한 태도도 대조된다. 패터슨이 자신이 쓴 시에 대해 '이것도 시가 될 수 있을까' 의심하지만, 로라는 그런 패터슨을 격려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보잘것없는 예술적 재능을 확신하며, 유명해지고 싶고 또 부자가 되고 싶은 세속적인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다. 요행이 그 여자가 만든 흑백 패턴 무늬의 컵케이크는 바자회에서 매진된다. 그걸로 로라가 바라는 만큼의 부자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녀의 작품이 다소나마 환금성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패터슨이 생계와 예술을 분리해서 돈과는 무관하게 시를 쓰는 것과 비교된다.
영화는 두 사람을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배치한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상을 살아가지만,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하게 다르다. 로라가 자신의 욕망과 감각을 바깥으로 확장해 나간다면, 패터슨은 조용히 자신 안으로 침잠하며 언어를 다듬는다. 이러한 대비는 패터슨의 시인으로서의 개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로라가 강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흑백 패턴은 그들의 반복되는 일상을 상징한다. 로라가 일상의 반복 그 자체를 작품화시켰다면, 패터슨은 반복되는 일상을 내면화하고 성찰한다.
앞에서 살펴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시는 "관념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로" 표현한다 라는 말로 자신의 시학을 설명했다. 패터슨 역시 거창한 관념에서 시를 찾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일상의 사물이다. 시는 멀리 있는 특별한 대상이 아니라, 늘 곁에 있었지만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사물에서 시작된다.
패터슨의 시는 일상에서 시작해서 로라에 대한 사랑으로 수렴된다. 그가 쓴 「사랑 시」가 그렇다. 이른 아침 혼자 시리얼을 먹다가 발견한 오하이오 블루 팁이라는 성냥의 상표는 로라가 그린 흑백의 패턴 문양과도 닮아있다. 그는 아침을 먹던 것을 멈추고 물끄러미 그 성냥갑을 바라본다. 그 안에 담긴 새로울 것이 없는 평범한 성냥은 패터슨의 상상력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향해 타오르는 불꽃으로 발전한다. 그는 운행 직전의 버스에서나 점심을 먹는 벤치에서 틈틈이 시작 노트를 꺼내 한 구절씩 이어 붙이고 고쳐 시 한 편을 완성한다.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언제나 손이 닿는 곳에 있다.
요즘 우리가 좋아하는 제품은 오하이오 블루 팁이다.
하지만 전에 좋아했던 제품은 다이아몬드.
그건 우리가 오하이오 블루 팁을 발견하기 전이었다.
성냥들은 확성기 모양의 글씨가 쓰인
흰색 상표와 진한 청색의 튼튼하고 작은 성냥갑에 잘 포장되어 있다.
마치 세상에 대해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이야.
3.8센티 길이의 오돌토돌한 암자색 머리에 덮인 연한 소나무 성냥개비.
열정적으로 진지하고 집요하게 첫사랑 여인의 담배에
처음으로 불을 붙이는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가 됐다. 그 후엔 전혀 같지 않겠지.
당신이 내게 줬던 모든 걸 당신에게 준다.
난 담배가 되고 당신은 성냥. 아니면
난 성냥, 당신은 담배
입맞춤으로 이글거리며
하늘을 향해 타오른다.
― 패터슨, 「사랑 시」 전문, 영화 <패터슨>
이 시에서 성냥은 시인의 시선을 만나면서 세상에 하나뿐인 새로운 사물로 탄생한다. 앞에서 시작법으로 살펴본 ‘관찰하기와 상상하기’의 공식이 이 시에도 사용되었다. 대략 1, 2연까지가 관찰이라면, 그다음 연부터는 상상이 된다. 시인은 사물을 오래 바라보고,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관계를 발견한다. 평범한 성냥갑이 사랑의 이미지로 변신하는 순간, 일상은 시가 된다.
문학 치료에서도 이러한 시선은 매우 중요하다. 특별한 경험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 사용하는 컵, 창가에 놓인 화분, 식탁 위의 성냥갑처럼 가장 평범한 사물을 오래 바라보는 일에서 글쓰기는 시작된다.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사물과 함께 자기 자신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월요일 아침에 시작하여 화요일 아침에 완성된 아름다운 이 시는, 그러나 로라에게 읽어주지도 못한 채 찢긴 시작 노트와 함께 사라지고 만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마빈'이라고 불리는 잉글리시 불도그이다. 마빈은 패터슨과 로라의 반려견이다. 마빈은 로라를 잘 따르는 반면, 패터슨과는 썩 좋은 관계가 아니다. 으르렁거리며 적의를 드러내기도 하고, 가끔 패터슨의 의자를 차지하기도 해 로라에게 야단맞기도 한다. 로라는 이런 마빈을 모델로 두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정작 남편인 패터슨의 초상화는 없다. 마빈이 패터슨의 연적처럼 보이는 이유다.
로라는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마빈과 보내며, 마빈이 패터슨과 유일하게 함께하는 것은 저녁 산바카라이다. 마빈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신을 산바카라시켜야 할 때에 패터슨이 로라와 저녁 외출을 나가자 마빈은 패터슨의 시작 노트를 물어뜯어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카피본을 만들기로 한 바로 전날 벌어진 일이다.
마빈은 패터슨에게 억압된 본능, 혹은 일탈의 욕망을 상징한다. 이런 마빈이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로라와 가까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패터슨에게도 일탈을 향한 욕망은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패터슨은 자신만의 세계에 충실하며, 내적 가치관에 따라 행동한다. 물론 이것이 답답하거나 느리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는 지극히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마빈과 산바카라을 할 때면 그의 속도와 방향이 비로소 흔들린다. 마빈은 보다 빠르게 내키는 곳으로 나가고자 한다. 그래서 패터슨은 매번 마빈에게 끌려가듯 산바카라을 한다. 또한 패터슨은 늘 같은 길을 고집하지만, 마빈은 다른 길을 가고자 하며, 패터슨은 줄다리기하듯 목줄을 당기다 결국엔 따라간다.
시를 쓰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지만, 때로는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낯선 풍경을 만나야 한다. 반복되는 삶을 지키는 일만큼이나, 그 반복을 흔드는 우연 역시 새로운 시를 탄생시키는 힘이 된다. 마빈은 바로 그러한 일탈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패터슨과 마빈이 밤 산바카라에서 머무는 곳은 동네의 오래된 재즈 바다. 운전기사이기 때문에 낮에는 술을 마실 수 없는 그는 매일 저녁 그곳에서 맥주 한 잔을 시켜 놓고 천천히 마시곤 한다. 재즈 바 벽에는 그 도시 출신의 유명한 음악가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패터슨은 말없이 그 인물들을 바라본다. 사실 그에게도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재즈 바에는 연인에게 버림받고 괴로워하는 남자도 있고, 아내 아닌 젊은 여자와 노닥거리는 주인장의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 재즈바 주인은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빈털터리였다. 그는 급기야 아내의 푼돈을 훔치다 대판 부부 싸움까지 한다. 로라와 어떤 갈등도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며, 아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고가의 기타까지 사주는 패터슨의 모습과 대조된다. 그러나 실상 패터슨도 비싼 기타를 사느라 돈에 쪼들리고 있었을 것이며, 과분하게 아름다운 아내가 떠날까 봐 내내 불안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심야 바에서의 에피소드는 패터슨의 무의식을 상징한다.
마빈은 매일 밤 이 술집 밖에서 얌전히 패터슨을 기다린다. 집 안에서 공공연하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마빈과의 외출은 패터슨에게 억압된 욕망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마빈이 시작 노트를 찢어버렸을 때 패터슨의 표정에는 분노보다 허탈함이 먼저 스친다. 하지만 영화는 이 상실을 비극으로 그리지 않는다. 로라에게 쫓겨난 마빈을 다시 집안으로 데려오고 주말인 그날, 패터슨은 혼자서 폭포 앞까지 산바카라을 나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일본인 시인을 만난다.
그는 패터슨과 같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좋아하며 시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패터슨의 또 다른 쌍둥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에게 새 노트를 선물한다.
시인: 저는 시로 숨을 쉽니다. 제 노트입니다. 일본어로만 쓴 시죠. 번역은 안 돼 있어요. 번역을 한 시는 우비를 입고 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 때론 빈 노트가 많은 가능성을 주지요.
― 영화 <패터슨>에서
“때론 빈 노트가 많은 가능성을 준다.”는 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이다. 노트는 비어 있기 때문에 어떤 시도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 된다. 문학 치료에서도 글쓰기는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의 용기에서 출발한다. 빈 노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패터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주일을 시작한다. 이제 로라는 어떤 꿈 이야기를 할까. 그날도 쌍둥이들은 나타날까. 아니, 이 모든 것이 시를 쓰는 외로운 청년의 마음속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환상일까.
영화 <패터슨>은 지극히 사실적이기에 오히려 몽환적인 영화다. 한 편의 시처럼 삶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패터슨이 빈 노트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그에게 일상은 따뜻한 한 편의 시가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