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가면 앞을 보고 앉습니다.
찬양을 합니다. 기도를 합니다. 헌금을 합니다.
그리고 예배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순서가 시작됩니다.
설교입니다.
한 사람이 강단에 올라갑니다.
성경을 읽고, 설명하고, 해석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듣습니다.
때로는 받아 적고,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설교가 끝나면 찬송을 하고 축도를 합니다.
예배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정말 예배를 드린 걸까요?
아니면 교회에 가서 한 시간짜리 수업을 받고 돌아온 걸까요?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번 주에 어떻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아이가 아픈지, 부부가 심하게 다퉜는지, 사업이 어려운지, 빚 때문에 잠을 못 자는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든 한 주를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묻지 않습니다.
모두 앞을 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인사를 합니다.
“은혜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도대체 무엇을 나눈 것일까요.
원래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음식을 먹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었습니다.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것을 내놓았습니다.
함께 기도했습니다.
물론 사도들의 가르침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가르침이 공동체의 삶 속에 있었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기도하고, 서로 필요한 것을 살피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 가운데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순서가 뒤집혔습니다.
함께 먹는 것은 친교가 되었습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소그룹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구제가 되었습니다.
지역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은 봉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예배 바깥으로 밀어낸 뒤, 한 사람이 성경을 설명하는 시간이 예배의 중심을 차지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초기 공동체에도 가르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공동체에 들어왔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무엇을 가르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알려줘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예수의 가르침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신약에도 사도, 장로, 감독, 교사, 목자 같은 여러 역할이 등장합니다.
문제는 가르치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침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에는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신학이라는 학문도 발전했습니다.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어떤 시대에 쓰였는지 알아야 합니다.
당시의 언어와 문화를 알면 본문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해석을 검증하는 데도 신학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이 성경을 모르는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가르치는 기능이 권력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말하고 나머지는 듣습니다.
한 사람은 해석하고 나머지는 받아들입니다.
한 사람은 가르치고 나머지는 배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을 ‘말씀 선포’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불편합니다.
목사가 하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자신의 이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공부한 사람이라도 해석하는 사람은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편이 정직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말씀 선포’가 되는 순간 질문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도 따졌는데, 교인은 목사의 설교에는 따질 수 없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물론 예수도 가르쳤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쳤고, 산에서도 가르쳤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긴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펼쳐 읽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러나 그 장면의 핵심은 성경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는 이사야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선언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삽니다.
예수는 말씀을 읽고 또 말씀을 설명하는 것으로 평생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병든 사람을 만났습니다.
배척받는 사람과 밥을 먹었습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들었습니다.
누군가 억울해하면 그의 편에 섰습니다.
사람들이 배고프면 먹였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묻기도 했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몰라서 물었을까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에 관해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게 예수가 보여준 예배 아닐까요.
요한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우리는 여기서 ‘안다’를 공부하는 것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알려면 공부해야 한다.
제대로 알려면 신학을 배워야 한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아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조직신학을 공부합니다.
교리를 공부합니다.
성경의 역사와 배경을 공부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까지 공부합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일부입니다.
입문과정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를 안다는 것은 그들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았다면 그가 옳은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옳다고 믿었다면 그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그 말을 믿었다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알았다면 믿으십시오.
믿었다면 돌아서십시오.
돌아섰다면 그렇게 사십시오.
그게 회개입니다.
예수가 처음부터 선포한 메시지는 놀랄 만큼 단순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는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왜 돌아서야 합니까.
지금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과 너무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보냈습니다.
돌아오라고.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인간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가 삶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살라고.
높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낮은 곳으로 갑니다.
모으기보다 나눕니다.
밀려난 사람과 함께합니다.
원수에게 다시 원수의 방식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다른 생명을 먼저 바라봅니다.
용서합니다.
섬깁니다.
함께 먹습니다.
회개한 삶이 무엇인지 예수 자신이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다시 바카라상 위로 가져왔습니다.
예수의 삶을 신학으로 만들었습니다.
교리로 만들었습니다.
학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공부합니다.
예수는 걸어갔는데 우리는 그 길에 관한 바카라을 읽고 있는 겁니다.
수영에 관한 바카라을 백 권 읽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유형의 원리를 압니다.
호흡법도 압니다.
물의 저항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선수들의 영법도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물에 들어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수영을 할 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공부했습니다.
나눔을 공부했습니다.
용서를 공부했습니다.
섬김을 공부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공부했습니다.
회개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누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습니다.
낮아지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삶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 지식은 무용지물입니다.
예수에 관해 많이 아는 것과 예수를 아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길을 아무리 공부해도 걷지 않으면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합니다.
부자 청년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그를 쉽게 욕심 많은 부자로 생각하지만 성경 속 그는 상당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계명을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찾아올 정도로 영적인 갈망도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가 그를 보고 사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이 옵니다.
예수가 그의 삶을 건드립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는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왜입니까.
몰라서가 아닙니다.
알았습니다.
계명을 배우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지켰습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직접 만났습니다.
그런데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회개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도 부자 청년처럼 될 수 있습니다.
매주 예배에 참석합니다.
성경공부를 합니다.
제자훈련을 받습니다.
설교를 수천 편 듣습니다.
성경을 여러 번 통독합니다.
심지어 신학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내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하는 순간에는 돌아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배운 것입니까.
저는 예배에서 이 질문을 듣고 싶습니다.
“이번 주에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누군가는 말할 것입니다.
회사에서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누군가는 말할 것입니다.
아이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누군가는 고백할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할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가진 것을 조금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듣는 겁니다.
같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르겠으면 성경을 펼치는 겁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함께 생각하는 겁니다.
누군가 힘들면 같이 방법을 찾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가진 사람이 나눕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돌봅니다.
억울한 사람이 있으면 함께합니다.
그리고 같이 밥을 먹습니다.
그것이 예배 아닐까요.
설교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르침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르침은 삶을 위한 것입니다.
삶이 가르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배우고,
삶으로 돌아가 살아보고,
다시 모여 그 삶을 나누고,
실패했다면 함께 고민하고,
모르겠으면 다시 말씀을 펼치고,
그리고 다시 살아가는 것.
말씀에서 삶으로.
삶에서 나눔으로.
나눔에서 다시 말씀으로.
예배는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저는 이 말이 더 어려운 신학을 공부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급반을 끝냈으니 중급반으로 올라가고, 조직신학을 끝냈으니 더 어려운 교리를 공부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길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회개입니다.
배웠다면 이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배웠습니까.
좋습니다.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배웠습니까.
좋습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나누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낮아져야 한다는 것도 알고, 약한 사람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면 이제 수업은 충분합니다.
바카라을 덮고 물에 들어가십시오.
사랑하십시오.
나누십시오.
낮아지십시오.
용서하십시오.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다음 주에 다시 모이십시오.
그때는 얼마나 훌륭한 설교를 들었는지 이야기하지 말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나누십시오.
실패했다면 실패를 가져오십시오.
아픔이 있다면 아픔을 가져오십시오.
억울함이 있다면 억울함을 가져오십시오.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그 이야기를 가져오십시오.
가진 것을 나누었다면 그 경험을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서로의 삶을 펼쳐놓고 다시 예수에게 물으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교회에 가서 한 사람의 설교를 듣고 돌아온 것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여러분은 교회에서 수업을 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말입니다.
진짜 예배는 그다음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알았다면 믿으십시오.
믿었다면 회개하십시오.
회개했다면 삶의 방향을 바꾸십시오.
그리고 그 바뀐 삶을 하나님께 보여드리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진짜 예배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가 아니라,
배운 말씀 때문에 얼마나 다르게 살게 되었는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