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by김작가씨작업소

나는 교회를 떠났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니다. 예수를 부인한 것도 아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가 가르친 삶을 살아가고 싶다.

오히려 그 믿음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 흔히 묻는다.

왜 믿음을 버렸느냐고. 교회에 다시 나와야 한다고,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믿음을 버린 적이 없는데 말이다.

내가 떠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다.

그렇다면 교회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하나님 나라를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들어가는 어떤 장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탐욕을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삶.

예수가 보여준 바로 그 삶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교회에 다녀야 할까?

아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회개할 수 있다. 예배당에 가지 않아도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사의 설교를 듣지 않아도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경쟁을 요구한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라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남보다 앞서라고 부추긴다.

정직하게 살다가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불의에 맞서다가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어렵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더 어렵다.

혼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지치면 위로하고, 잘못된 길로 가면 바로잡아준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함께 짐을 나누고, 세상의 유혹 앞에서는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준다.

나는 그것이 교회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만든 공동체.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기관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삶을 지속하도록 서로 돕는 연합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라는 이름의 사업체

오늘날 많은 교회는 사업체를 닮았다.

물론 규모는 다양하다. 영세상인 수준의 작은 교회도 있고, 제법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는 자영업자 같은 교회도 있다. 수많은 직원을 거느린 중견기업 같은 교회도 있다.

규모만 다를 뿐 운영 방식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교인을 늘려야 한다. 헌금을 확보해야 한다. 건물을 유지해야 한다. 조직을 관리해야 한다.

가능하면 더 큰 예배당을 짓고, 더 많은 교인을 모아야 한다.

교인의 증가는 성장이고, 헌금의 증가는 축복이며, 예배당의 확장은 부흥의 증거가 된다.

일반 기업에서 매출과 시장점유율을 이야기한다면, 교회에서는 헌금과 교인 수를 이야기한다.

물론 교회에도 돈은 필요하다.

함께 모일 공간이 필요하고,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는 정당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 돈을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돈과 조직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순간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데, 어느 순간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사람들이 존재하게 된다.

교회의 성공이 교인의 삶보다 중요해지는 것이다.

교회가 커질수록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과연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알 수 있을까?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고, 삶의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을까?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조직을 나눈다. 교구를 만들고, 구역을 만들고, 셀과 목장을 만든다.

그 아래에 바카라임자를 세우고, 그 위에 또 바카라임자를 세운다.

마치 다단계 조직처럼 관리체계가 형성된다.

소모임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작은 모임은 오히려 서로의 삶을 가까이에서 돌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 모임이 서로를 돌보기보다 출석을 관리하고, 전도를 독려하고, 교회 행사에 사람을 동원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욱 기막힌 것은 그 조직을 유지하는 노동의 상당 부분이 무보수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교회학교 교사, 찬양팀, 소그룹 지도자, 각종 행사 담당자들이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 일한다.

물론 자발적인 봉사는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거절하기 어려운 바카라임을 떠맡기면서 그것을 헌신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다른 문제다.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요구하고, 정당한 대가를 이야기하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처럼 취급한다.

전도사쯤 되어야 겨우 생활비에 못 미치는 사례비를 받는 경우도 있다.

기업이라면 노동의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이유로 그 대가를 요구하기조차 어려워진다.

예수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조직이 정작 사람의 노동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습이 등장한다.

목사가 자신의 자녀에게 교회를 물려준다.

교회 건물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세워졌다. 교회 운영은 교인들의 봉사와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일구어 온 공동체다.

그런데 그 공동체의 지도자 자리가 특정 가문의 것이 된다.

가업인 셈이다.

물론 목사의 자녀가 목사가 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공동체의 지도권과 영향력이 가족의 소유물처럼 승계되는 것이다.

예수는 큰 사람이 되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내세운 교회에서는 권력이 집중되고, 그 권력이 자녀에게 이어진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그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교회 안의 사람도 돌보지 못하면서

교회는 세상을 향해 사랑을 외친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자기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넉넉하게 베풀지 못한다면 어떨까?

교회에서 오랫동안 봉사한 사람이 생활고에 시달린다. 전도사는 생계를 걱정한다.

누군가는 가족을 돌볼 시간까지 희생하며 교회 일을 한다.

그런데 교회는 더 큰 예배당을 짓기 위해 헌금을 모으고, 더 많은 교인을 확보하기 위해 행사를 기획한다.

세상을 향해서는 무엇을 하는가?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준다. 교회 이름이 인쇄된 휴대용 물티슈를 건넨다. 그러면서 전도했다고 말한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교회도 있고,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전도지와 물티슈를 나눠주는 일이 세상을 향한 사랑의 대표적인 실천이 되어버린 교회라면, 그 목적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교인을 모집하는 것일까?

사도행전 4장에는 초기 신앙 공동체를 두고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 공동체가 완벽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요였다.

교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알고 싶다면 설교를 듣기보다 장부를 들여다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는가가 아니라, 그 돈을 어디에 사용했는가.

건물과 조직을 위해 사용했는가, 사람을 위해 사용했는가.

그곳에 교회의 진짜 목적이 드러날 것이다.


예수는 성공하라고 가르쳤을까?

교회의 운영만 세상을 닮은 것이 아니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성공하라고 한다. 꿈을 이루라고 한다.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열심히 기도하면 축복받고, 믿음이 좋으면 형통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업이 잘되고, 좋은 온라인 게임에 취직하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이야기한다.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굳이 교회에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

자기계발서에도 있고, 기업 강연에도 있고, 학교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예수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가진 것을 나누라고 했으며,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했고,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도 했다.

이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삶이다.

정직하기 때문에 이익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돕느라 자신의 몫이 줄어들 수도 있다.

불의에 맞서다가 온라인 게임을 잃거나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가르친 사람이 예수다.

물론 성공 자체가 죄는 아니다. 정직하게 일해 성공할 수도 있고, 그 성공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성공은 하나님 나라의 목적이 아니다.

교회가 가르쳐야 할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이 아니라, 성공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런데 교회가 성공을 축복이라고 가르치면 목회자 역시 교회의 성장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교인이 늘어나면 성공한 목회자다. 예배당이 커지면 하나님이 함께하신 증거다.

교인들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도하고, 목회자는 교회의 성공을 추구한다.

모두가 성공을 외친다.

그런데 정작 아무도 묻지 않는다.

우리는 더 정직해졌는가?

더 많이 나누고 있는가?

탐욕을 버렸는가?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는가?

이것을 묻지 않는다면 그 설교가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설교라고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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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

예수는 말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이 말씀은 놀라울 만큼 분명하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무엇을 강조하는가?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 주님이라고 고백하라고 한다. 기도하라고 한다. 예배에 참석하라고 한다.

기도의 내용도 이상하다.

돈을 벌게 해달라고 한다. 좋은 온라인 게임을 달라고 한다.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한다.

자녀가 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한다.

물론 어려운 처지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기도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예수가 가르친 기도와 얼마나 가까울까?

예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뜻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한다.

회개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잘못을 저지른다.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죄를 고백한다. 하나님이 용서하셨다고 믿는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면 다시 세상으로 나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다음 일요일에는 또 죄를 고백한다.

이것이 회개일까?

회개는 죄를 고백하는 의식이 아니다. 잘못된 삶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물론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도 다시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잘못을 고치려는 노력 없이 용서받았다는 안도감만 반복한다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구조가 죄를 반복하도록 안심시킬 수도 있다는 점이다.

죄를 짓고도 교회에 가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이유가 희미해진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어도 괜찮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려는 사람들에게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죄인이 변화하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교회가 죄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죄를 반복하면서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 된다면 그곳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그런 교회가 오히려 악의 소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뒤엎었던 상

예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제사에 필요한 짐승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있었다.

멀리서 온 순례자들에게 짐승을 사고 돈을 바꾸는 일은 실제로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필요와 상업적 이해관계가 결합한 그곳에서 예수는 상인들의 상을 뒤엎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마가복음 11:17)

나는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오늘날의 교회를 생각한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돈이 모인다. 예수의 이름으로 조직이 커진다.

종교적 권위가 형성되고, 그 권위는 때로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가족에게 승계하는 데 사용된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가 비판했던 종교의 모습이 오늘날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는 교회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예수는 성전의 상을 뒤엎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는 그 상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 사업가는 돈을 벌기 위해 사업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돈을 모으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직을 키우면서 부흥이라고 말하고,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면서 헌신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은 앞에 내세우지만, 실제 운영은 세상의 원리를 따른다.

하나님과 예수가 사업의 얼굴 마담이 되어버린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회개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운영 기술을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중심에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성공을 추구한다.

예수를 따른다고 말하면서 권력과 재산에 집착한다.

회개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운영하니 교회 역시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는 고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에서 돌아서고, 예수가 가르친 대로 살아가는 것. 나는 그 삶 자체가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믿음이 공동체의 중심에 없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도, 아무리 화려한 예배를 드려도, 아무리 큰 십자가를 세워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

교회는 그들을 걱정한다.

믿음이 식었다고 하고, 세상에 빠졌다고 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질문을 하고 싶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을 떠난 것일까?

교회를 떠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떠난 이유는 오히려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세상에도 기업이 있다. 권력자가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조직에 충성을 요구하고, 자녀에게 사업을 물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본다면 굳이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려고 교회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오히려 세상의 탐욕과 경쟁, 권위주의를 경험한다면 말이다.

교회를 떠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사람들과 멀어져야 할 수도 있다.

익숙한 생활을 포기해야 하고, 때로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의 선택이 신앙의 포기가 아니라 신앙적 결단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회를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더 의롭거나 믿음이 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떠난 뒤에도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에 남아 있다는 이유로 믿음이 좋다고 평가하거나, 교회를 떠났다는 이유로 믿음을 잃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 다니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선택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교회를 꿈꾼다

나는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 예수의 가르침을 버리지도 않았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싶다.

그렇다고 내가 그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나 역시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잘못을 반복한다. 회개해야 할 일이 많다.

그래서 더욱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혼자서는 어렵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으면 좋겠다.

서로의 믿음을 심사하거나 교리에 대한 동의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곳에는 거대한 예배당이 없어도 좋겠다.

담임목사가 없어도 좋고, 복잡한 직바카라이나 위계질서가 없어도 좋겠다.

누구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고, 누구의 가업도 되지 않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가진 사람은 나누고, 어려운 사람은 도움을 받고, 잘못한 사람은 변명보다 회개를 선택하는 곳.

서로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행동을 하면 바로잡아줄 수 있는 곳.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높이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을 응원하는 곳.

교인을 늘리는 데 관심을 두기보다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관심을 두는 곳.

그런 사람들이 모인다면 그것이 교회라고 생각한다.

두세 사람이든 열 사람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몇 명이 모였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모였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커진다면, 커진 조직을 지키는 데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필요하다면 나뉘어도 좋다. 새로운 사람들이 또 다른 공동체를 이루어도 좋다.

교회가 존속하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를 떠났지만 다시 교회를 꿈꾼다.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떠난 교회와 내가 꿈꾸는 교회는 다르다.

내가 떠난 것은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도 세상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종교 조직이다.

내가 꿈꾸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합이다.

그리고 나처럼 교회를 떠났지만 믿음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모두 같은 이유로 떠난 것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모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 우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함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우리를 굳이 다른 이름으로 부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교회이니까.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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