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를 먹은 것보다 중요한 이야기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 죄가 모든 인류에게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를 원죄라고 부릅니다.
아직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갓난아이조차 죄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았고,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태어나는 순간부터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 교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그 죄가 모든 후손에게 대물림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저는 선악과 사건이 원죄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는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짓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채 엉뚱한 질문에 매달려 온 것은 아닐까요?
선악과는 사과였을까요? 뱀이 정말 말을 했을까요? 아담과 하와는 실존 인물이었을까요?
그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속삭이는 뱀은 누구일까요?
창세기 2장 16~17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십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하나님은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간단합니다.
다 먹어도 된다. 하지만 선악과는 먹지 마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이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뱀이 하와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은 선악과만 금지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마치 하나님이 모든 열매를 금지하신 것처럼 질문합니다.
처음부터 말을 교묘하게 바꾼 것입니다.
하와는 뱀의 말에 대답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세기 3:2~3)
여기서 또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지 않으신 말씀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는데, 하와의 말에서는 '죽을까 하노라'로 표현이 달라집니다.
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와가 어떤 마음으로 말을 바꾸었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장면을 인간이 죄를 짓는 과정에 대한 비유로 읽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불만에 따라 다른 사람의 말을 조금씩 바꾸곤 합니다.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보다 왜 하지 못하게 하는지를 먼저 따집니다. 그러다가 금지된 것을 얻고 싶어지면 그 금지의 의미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바꾸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변화입니다.
말 한마디를 덧붙이거나 빼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변화가 잘못을 정당화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이상한 질문이 생깁니다.
뱀은 왜 하와를 유혹했을까요?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무슨 이익이 생기기에 인간을 유혹했을까요?
뱀은 어떻게 사람의 언어로 말을 했을까요?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는 그 뱀을 사탄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러나 창세기 3장 자체는 뱀이 사탄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실제 동물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진 대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뱀의 정체를 알아내려 하기보다 뱀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강제로 먹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5)
이 말은 단순히 선악과를 먹어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좋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심어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선악과를 금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과 같아지는 것을 막으려고 금지하셨다는 것입니다.
금지의 이유를 교묘하게 바꾸었습니다.
이제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창세기 3장 6절은 하와가 그 열매를 보니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고 기록합니다.
결국 하와는 열매를 먹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뱀이 아닙니다.
하와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말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뱀이 바로 그런 유혹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뱀이 정말 말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우리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뱀이 실제로 말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해서 우리가 더 정직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덜 미워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뱀은 무엇일까요?
온라인 게임에서 다른 사람의 공로를 가로채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에 걸립니다. 그런데 곧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어차피 내가 없었으면 그 일도 성공하지 못했어.'
조금 더 지나면 이렇게 바뀝니다.
'내가 한 일이 더 많았잖아.'
마침내 다른 사람의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도 죄바카라감이 없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거짓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을 감추려면 또 다른 거짓말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저 사람이 상처받을 거야.'
이제 거짓말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가 됩니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시작한 거짓말이 어느새 남을 위한 선행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뱀의 유혹입니다.
뱀은 처음부터 큰 죄를 지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작은 잘못을 괜찮은 일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자신의 욕망에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게 만듭니다.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늘 하나를 훔친 사람이 반드시 소까지 훔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작은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정당화하다 보면 더 큰 잘못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죄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를 조금 바꾸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선악과 사건에서 열매를 먹은 행위 못지않게 중요한 장면이 그 이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참으로 교묘한 대답입니다.
아담은 자신이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카라임은 하와에게 돌립니다.
그것도 단순히 하와가 주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라고 말합니다.
잘못은 자신이 저질렀는데, 그 바카라임에 하나님까지 끌어들입니다.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으시자 뱀이 자신을 꾀었다고 대답합니다.
아담은 하와를 탓하고, 하와는 뱀을 탓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바카라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이 장면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먼저 시작했어요.'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요.'
'다들 그렇게 하잖아요.'
'저도 피해자예요.'
물론 어떤 잘못에는 실제로 외부의 압력이나 부당한 환경이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까지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한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바카라임을 떠넘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기보다 변명부터 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인간의 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죄를 지은 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더 큰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회개할 기회마저 스스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원죄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벌이 왜 저에게까지 적용되어야 할까요?
저는 선악과를 먹지 않았습니다.
아담에게 먹으라고 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건에 어떤 방식으로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과연 정당한 주장일까요?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와에게 출산의 고통을 말씀하시고, 아담에게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이것을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고통과 노동의 운명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금수저입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땀 흘려 일하지 않아도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아담에게 내려진 형벌에서 면제된 것일까요?
반대로 평생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 형벌을 더 무겁게 받는 것일까요?
물론 부유한 사람도 고통을 겪습니다.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는다'는 구체적인 형벌을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으로 확대하는 해석입니다.
그렇게 의미를 넓히면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형벌을 받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벌은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그들에게 내리신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벌을 모든 후손에게 동일하게 선고하셨다는 명시적인 말씀은 창세기 3장에 없습니다.
더욱이 에스겔 18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아버지의 죄를 아들에게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세대를 거슬러 올라간 아담의 죄를 오늘날 태어난 아기에게 묻는 것이 어떻게 공의로울 수 있을까요?
원죄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을 죄가 전염병처럼 후손에게 퍼졌다는 뜻으로 읽지 않습니다.
아담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최초의 죄가 시작되었다는 것과 그 죄가 유전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물론 바울은 같은 장 18~19절에서 아담 한 사람의 범죄와 많은 사람의 정죄를 연결합니다.
그 표현이 후대 원죄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울의 해석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바카라입니다.
저자들은 각자의 시대와 지식, 경험과 신앙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금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광에는 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흙과 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금을 찾아야 합니다.
바울이 무엇을 주장했는지 살피는 일과 그 주장이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하는지 판단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자체를 보면 죽음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셨습니다.
처음에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사건 이후 하나님은 인간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하는 것을 막으십니다.
창세기 3장 22~24절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죽게 된 이유를 반드시 죄의 유전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되었고, 후손들은 그 길에 접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었다고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행동이 후손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후손이 아담의 죄바카라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자식이 가난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부모의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결과를 물려받는 것과 죄를 물려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창세기 이후의 성경을 살펴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도 그 뜻을 거역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탐욕을 부리고, 약자를 억압합니다.
그러다가 고난을 겪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다시 평안을 얻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합니다.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왕국 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담의 죄가 유전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다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바카라임을 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조상의 원죄를 제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돌이키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이 외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지 말라. 정의를 행하라. 억울한 사람을 돌보라.
이사야 1장 17절은 선행을 배우고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사람을 도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삶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그 결과를 겪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그 역사를 굳이 원죄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기독교가 원죄라는 교리에 지나치게 매달리면서 정작 선악과 사건이 전하려는 중요한 가르침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선악과가 어떤 과일이었는지, 뱀이 어떻게 말을 했는지를 따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내 안의 뱀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말을 교묘하게 바꾸고 있을까요?
나에게 불리한 사실을 감추고 있지는 않을까요?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까지 왜곡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남에게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 질문은 교회 밖의 사람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목사에게도, 장로에게도, 집사에게도 해당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경의 일부만 인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고, 그 해석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한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은 선악과 사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그 이야기 속 뱀의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을 읽는 이유는 수천 년 전 아담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아담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원죄라는 교리를 믿는다고 해서 내 안의 탐욕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내가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저는 원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이 저지른 죄의 바카라임을 짊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그들이 저지른 죄입니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죄를 보여주는 이야기이지만, 모든 인간에게 죄바카라이 유전되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선악과 사건은 오늘날에도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짓는지 보여줍니다.
작은 불만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의 욕망에 맞춰 말을 조금 바꿉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바카라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깁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회개를 요구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잘못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죄를 대신 회개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에서 돌아서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창세기의 에덴동산을 읽을 때 선악과가 무엇이었는지부터 궁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뱀이 실제로 말을 했는지 따지는 데 그치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를 유혹하는 뱀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욕망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작은 거짓말을 진실인 것처럼 믿고 있는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선악과 사건을 제대로 읽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담이 먹은 선악과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먹으려는 선악과입니다.
아담을 유혹한 뱀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게 속삭이는 뱀입니다.
아담이 저지른 죄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저지르고 있는 죄입니다.
성경은 아담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만 기록된 바카라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읽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게 하는 바카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아담의 죄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요?
원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짓는 사람은 아담이 아니라 지금의 나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