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누구에게 죗값을 치렀을까?

by김작가씨작업소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가 우리 대신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설명을 들을 때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는 도대체 누구에게 죗값을 치렀을까요?

하나님께 치렀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다는 뜻입니까?

죄를 지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대신 처벌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요?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재판관이 살인자 대신 죄 없는 사람을 처형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죗값을 치렀으니 살인자를 용서하겠다.”

우리는 그런 재판관을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용서도 아니고 정의도 아닙니다. 또 다른 불의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고 믿어야 할까요?

그렇다면 사탄에게 죗값을 치렀을까요?

그것도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사탄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사탄은 도대체 어떤 존재라는 말입니까?

물론 기독교에는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는 여러 속죄론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예수가 인간 대신 형벌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가능하게 했다는 설명입니다.

저는 그 설명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누구에게도 죗값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예수를 죽였습니다.


예수는 왜 죽었을까?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려면 먼저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했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이들에게 자신부터 돌아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종교적 규칙을 앞세워 사람을 억압하는 이들을 비판했고, 인간이 만든 관습보다 하나님의 뜻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의 종교적 질서와 충돌했습니다.

특히 자신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려던 일부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는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고발과 로마 통치 권력의 처형을 통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죽인 것은 누구일까요?

직접적으로는 예수의 처형을 결정하고 집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죽음의 원인이 그들 개인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지키려는 욕망, 다른 사람을 향한 시기와 질투, 자신의 생각만 옳다는 오만, 불의를 알면서도 외면하는 비겁함.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질서가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삶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고 있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인간은 자신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준 사람마저 죽인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가 우리의 죄를 짊어졌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우리 대신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가 만들어 낸 결과를 죄 없는 예수가 온몸으로 감당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가 죽은 것입니다.

예수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이 두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죽음을 피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랑하고, 용서하고, 정의롭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나 종교적 권위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했습니다.

그것이 예수가 보여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에게 죽음의 위협이 찾아왔습니다.

마가복음 14장 61~64절을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묻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는 대답합니다.

“내가 그니라.”

그 대답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찢으며 신성모독이라고 선언했고, 사람들은 예수를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대답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저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자신의 정체성과 가르침을 부정하며 목숨을 구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호칭 하나를 포기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지금까지 가르치고 실천한 하나님 나라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가르쳤는데, 정작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그 가르침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동안 예수가 살아온 삶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죽음 앞에서 포기해도 되는 것이었습니까?

물론 예수에게도 죽음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닥칠 고난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했습니다.

예수는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아서 죽은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온 하나님 나라를 죽음 앞에서도 부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예수의 죽음이 특별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죽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살아온 하나님 나라를 끝까지 지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예수를 부활시키셨을까?

예수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키셨습니다.

저는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이 예수의 삶을 인정하신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 뜻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수를 기뻐하셨고, 그를 부활시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인간에게 중요한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 삶을 지킴으로써 그 가르침이 진실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예수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첫 열매가 있다는 것은 뒤이어 맺힐 열매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에게도 부활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뒤에야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랬습니다.

예수는 부활이라는 보상을 얻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옳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그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은 그 이후의 사건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신앙의 목적도 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이유가 죽은 뒤에 부활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가 보여준 것은 그런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옳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셨을까?

이제 다시 인간의 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죄 없는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죗값을 물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통해 인간에게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예수를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한 복수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인간은 예수가 걸어간 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길을 죽음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실까요?

인간이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 그치기를 바라실까요?

예수가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렀다고 믿으며 안심하기를 바라실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걸어간 길을 인간도 걸어가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탐욕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예수처럼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이 늘어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이 마침내 자신에게 돌아오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예수를 죽인 인간에게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돌아올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가 더욱 중요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죗값을 치렀으니 더 이상 바카라임질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가 보여준 길이 있으니 이제 그 길로 돌아오라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요?

여기서 기독교의 또 다른 교리를 살펴봐야겠습니다.

이신칭의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특히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선한 행위가 따른다고 설명합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선한 행위는 그 믿음의 결과이자 증거라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설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믿음과 행위를 구별하는 것일까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까?

예수가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렀다고 믿는 것입니까?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만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보여준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면 나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탐욕을 버리라고 가르쳤다면 탐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가 용서하라고 가르쳤다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사랑하라고 가르쳤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행위 아닙니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도 행위입니다.

잘못된 삶에서 돌아서는 것도 행위입니다.

이전과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것도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대로 살아가는 것 역시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행위를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요?

믿었기 때문에 행동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이 바뀌었다는 사실 자체가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행동이 바뀌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믿음입니다.

믿음이 먼저 존재하고, 그 결과로 행위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 자체가 믿음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도 이상해집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처럼 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지만 아직 선한 행위가 부족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예수를 믿는 삶을 선택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예수처럼 산다는 말은 따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선행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흔히 믿음과 선한 행위를 구분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특별한 선행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어색합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이 선행입니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선행입니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 선행입니까?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이 선행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삶입니다.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사는 것이 무슨 특별한 공로가 되겠습니까?

회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는 선행이 아닙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래 가야 할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예수도 내 대신 회개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돌아서야 합니다.

내가 이전과 다른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시키시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는 내 선택이고, 내 행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행위가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회개하여 예수가 보여준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돌아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고,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선행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의롭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실제로 살아가기 때문에 의로운 것입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말씀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는 자신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행위를 분리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교묘하게 바꾼 결과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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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의 뱀은 어디로 갔을까?

지난 글에서 저는 원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죄가 후손에게 유전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선악과 사건은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짓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도록 허락하시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금지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마치 하나님이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질문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없던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뱀은 하나님의 경고를 부정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좋은 것을 감추고 있다는 의심을 심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열매를 먹었습니다.

아담 역시 열매를 먹었습니다.

잘못을 추궁받자 아담은 하와에게 바카라임을 돌렸고, 하와는 뱀에게 바카라임을 돌렸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중요한 것은 선악과라는 열매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바꿉니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합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붙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이 원하신 것과 전혀 다른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게 됩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를 유혹하는 뱀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이제 그 질문을 기독교에 던지고 싶습니다.


오늘날의 뱀은 기독교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상당히 불편하게 들릴 것입니다.

기독교가 뱀이라니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가 어떻게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뱀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그 점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에덴동산의 뱀은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했습니다.

그 말씀을 조금 바꾸고, 하나님의 의도를 다르게 설명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는 회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가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렀으니 그 사실을 믿으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행위는 그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죽은 뒤에 들어가는 천국으로만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물론 기독교의 모든 교회와 신학이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와 실천, 현재의 하나님 나라를 강조해 온 전통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저는 기독교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삶을 따르려던 신앙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교리와 제도를 중심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예수처럼 사는 일에서 예수에 관한 특정한 교리를 받아들이는 일로 바뀌었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요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가려진다면 어떨까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해야 할 사람이 이미 구원받았다고 안심한다면 어떨까요?

그 교리는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에덴동산의 뱀이 했던 일과 무엇이 다를까요?


예수를 죽인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키며 종교적 질서를 수호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거역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행동한다고 믿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키려 했던 종교적 질서가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독교에도 무서운 경고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죽인 종교 지도자들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자신이 그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을까요?

예수가 오늘날 교회에 나타나 자신들이 가르쳐 온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가 회개하라고, 예수처럼 살라고, 믿음의 고백보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는 그 말씀을 받아들일까요?

아니면 자신들이 지켜온 교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를 이단이라고 규정할까요?

저는 이 질문을 가볍게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서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예수는 말씀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런데 바로 이어서 예수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함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은 반드시 하나님을 부정하는 길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길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처럼 살지 않는 길일 수 있습니다.

교리를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회개하지 않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 길이 넓은 이유는 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가 내 죗값을 대신 치렀다고 믿고,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면 예수가 보여준 길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탐욕을 인정해야 합니다.

잘못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예수처럼 세상의 잘못된 질서에 맞서야 합니다.

예수는 그 길을 끝까지 걸었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길을 걷는 대신, 예수가 대신 걸어주었으니 이제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기독교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유혹입니다.


예수를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믿자는 것입니다.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교리를 암기하는 것으로 믿음을 대신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죗값을 치렀다고 믿는 것으로 회개를 대신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으로 예수가 보여준 삶을 실천하는 일을 대신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이 예수와 똑같이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잘못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에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거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한 번 하고 끝나는 종교적 절차가 아닙니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뒤에 받는 보상만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 삶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길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예수가 대신 죗값을 치렀으니 안심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보여준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지금 나를 유혹하는 뱀은 무엇일까?

지난 글에서 저는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읽을 때 지금 나를 유혹하는 뱀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그 질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고 싶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교리가 혹시 나를 유혹하는 뱀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피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았다고 안심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요?

예수처럼 살지 않으면서도 예수를 믿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교리부터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그 교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신학자가 지지했는지, 얼마나 많은 교회가 가르치는지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 교리가 정말 예수가 보여준 삶과 일치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는 이유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발견하고,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교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교리가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면, 아무리 정교한 논리로 만들어졌더라도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의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인간을 유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인간을 유혹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유혹은 자신이 유혹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만드는 유혹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다시 예수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예수가 살아낸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가 대신 죗값을 치렀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간 인간의 죄를 돌아보는 회개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가 부활했으니 나도 부활할 것이라는 기대에 머무르지 말고, 예수가 지금 여기에서 보여준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먼저 살았습니다.

인간은 그런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음 앞에서도 그 삶을 부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 우리 앞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 대신 하나님 나라를 살아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길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기독교가 그 길에 들어서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면 어떨까요?

그때 기독교는 더 이상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길을 가로막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뱀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저는 기독교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교리를 믿고 있습니까?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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