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병에 담긴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플뢰리, 끌로 데 가랑 모노폴 2023

by자크슈타인


너무나 애정하는 故 김광석의 이 노래가 와인 레이블에 앉기까지 28년의 세월이 흘렀다. 와인의 빈티지가 2023, 김광석의 노래가 1995년에 나왔으니 말이다.


선배의 소개로 이 병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나는 와인보다도 먼저 레이블에 얹어있는 악보에 눈이 갔다. 하얀 종이 레이블 위에 손으로 그린 듯한 오선지가 흐르고 있었다. 인쇄된 활자가 아니라, 펜 끝이 종이를 눌렀다 떼어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자필 악보.

그 곁에는 기타를 안은 한 사내의 초상이 연필 선으로 앉아 있었고, ‘김목경‘이라는 서명 옆에는 ‘London’이라는 글자가 작게 적혀 있었다. 나는 그 글자 앞에서 잠시 멈췄다. 런던. 1988년 10월 - 그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 1984년, 영국 블루스 록 밴드 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하다 귀국한 것이 1991년이니, 1984년에 본 노부부의 모습에서 떠올린 영감을 악보에 옮겨 적은 것이 1988년의 일이었나 보다.


창문 하나. 그리고 그 창밖을 지나가던, 어느 노부부의 뒷모습. 이 병에 담긴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창밖의 노부부

1984년, 블루스 기타리스트 김목경은 영국에 있었다. 57년생인 그는 아시아 최초로 세계 3대 음악 페스티벌 중 하나인 Beale Street Music Festival 에 블루스 뮤지션 자격으로 초청되어서 3일 연속으로 라이브 무대를 섰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대중음악의 국내 문화예술상은 물론 일렉트릭 기타로 유명한 미국의 악기 제조사 및 브랜드인 ‘펜더(FMIC, Fender Musical Instruments Corporation)’ 사에서 음악성을 인정받아 헌정 기타를 받기도 한 분이다. 대중적으로는 2002년에 발표한 ‘부르지마‘ 가 어느 드라마에 삽입되어 제법 알려진 곡이겠다. (내 노래방 애창곡이기도 하다)


1984년 영국 유학 시절 낯선 이역만리 도시의 방에서, 그는 우연히 창밖으로 한 노부부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나란히, 천천히, 서로의 속도에 맞춰 걷는 두 사람. 그러나 어떤 풍경은 특별하지 않아서 오래 남는지도 모른다.


그 짧았던 목격의 순간이 한 곡의 노래가 되었다.

훗날 그의 1집 「Old Fashioned Man」에 실린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노래는 함께 늙어와 사별을 앞둔 어느 60대 노부부가 지나온 생을 회상하며 하나씩 되짚는 서정적인 내용이다. 젊음도, 아이들도, 셀 수 없는 아침과 저녁도 다 지나가고, 이제 한 사람이 먼저 떠나야 하는 시간. 김목경은 이 곡이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노래에는 잘 알려진 뒷이야기가 하나 있다.

김광석이 이 곡을 부르게 된 사연이다. 김목경은 훗날 방송에서, 이 곡을 두고 “김광석에게 빌린 돈 대신 갚는 셈 치고 준 곡”이라고 웃으며 털어놓은 적이 있다. 빚 대신 건네진 노래.

김광석은 그 노래를 특유의, 물기 어린 서정의 목소리로 다시 불렀고, 곡은 원곡 이상으로 세상에 번져나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곡을 원래 김광석의 노래로 기억한다. 이후 서유석이 부르고, 이정선이 부르고, 임영웅이 불렀다. 부르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노래는 조금씩 다른 결을 입었지만, 창밖의 그 노부부의 이야기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먼저 만든 사람과, 그것을 세상에 번지게 하는 사람. 나는 이 구도가 어쩐지 와인과도 닮았다고 생각한다. 테루아(Terroir)를 생각하며 포도를 재배하는 사람, 그 포도를 파쇄하고 시간을 들여 발효, 숙성시켜 여과하고 병입 하는 단계까지 하나하나 공을 들인다. 그 술은 이윽고 한병 한병 먼 곳까지 실어 나르게 될 것이다. 하나의 아름다움이 완성되기까지는 언제나 여러 개의 손이 필요하다.


이렇듯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가, 세월을 두고 익어가는 와인 레이블에 앉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 느껴진다.


플뢰리, 꽃이라는 이름의 언덕

이 병의 고향은 프랑스 보졸레의 플뢰리(Fleurie)다. 보졸레라는 이름 앞에서 ‘가볍고 값싼 누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에 세상에 풀려 연말이면 잊히는 술. 현란한 마케팅과 부담 없는 가격, 뉴스 보도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를 안다.


그러나 보졸레의 북쪽 언덕들에는 열 개의 크뤼(Cru)가 있다. 등급체계는 기본 '보졸레(Beaujolais)', 중급 '보졸레 빌라주(Beaujolais-Villages)', 그리고 가장 뛰어난 품질을 내는 10개의 마을 단위 등급인 '크뤼 보졸레(Cru Beaujolais)'로 나뉘는데, 이 크뤼(Cru)들이 바로 마을의 이름을 병에 새길 자격을 얻은 밭들이고, ‘플뢰리(Fleurie)’는 그중에서도 ‘보졸레의 여왕’이라 불리며 가장 섬세하다고 여겨지는 유명한 산지다.


플뢰리 포도원의 규모는 약 800헥타르. 이름부터가 ‘꽃’을 품고 있는 이 마을의 와인은 그 이름처럼 신선하고 꽃향기가 가득하며, 보졸레 크뤼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인기 있고 가장 비싼 축에 든다. 향수 같은 향과 실크 같은 타닌은 플뢰리를 말할 때 흔히 따라붙는 표현이지만, 이 즉각적인 매혹 너머에 농축된 깊이와 긴 숙성의 잠재력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덜 알려져 있다.


포도 품종은 가메(Gamay)이다. 보졸레 지역은 부르고뉴 마꼬네 남쪽, 리옹 북쪽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부르고뉴 지방에서 ‘피노 누아‘로만 만들듯이, 보졸레에서는 ‘가메‘ 품종으로만 레드와인을 만든다.

부르고뉴의 남쪽 끝, 화강암이 부서져 만들어진 모래 토양에서 가메는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잘 자란다. 피노 누아의 그늘에 가려 오래 저평가되어 온 품종이지만, 좋은 화강암 언덕 위의 가메는 가볍지 않다. 다만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깊을 뿐이다.


클로 데 가랑, 최고의 테루아

생산자인 도멘 뒤 클로 데 가랑(Domaine du Clos des Garands)은 플뢰리 마을의 ‘레 가랑(Les Garands)’ 언덕에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플뢰리 최고의 테루아 중 하나로 인정받아 온 6.18헥타르의 단일 구획이다. 밭이 흩어져 있지 않고 한 덩어리로 이어져 있다는 것은, 하나의 언덕이 받는 햇빛과 바람을 와인이 고스란히 번역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도멘은 ‘뤼트 레조네(Lutte Raisonnée)’로 필요한 순간에만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저농약 합리적 방제 농법을 따른다. 일 년 내내 포도나무를 관찰하다가,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만큼만 손을 대는 것. 수확은 전부 손으로 하고, 양조는 전통 방식을 지킨다. 서두르지 않는 농사다.


그리고 2021년 9월, 이 도멘의 역사에 한 줄이 더해진다. 소유주가 바뀐 것이다. 도멘의 공식 기록은 새 주인의 포부를 담담하게 적고 있다. 환경을 생각하는 합리적 농법으로, 품질 있는 와인을 계속 만들어가겠다는 것.


그 새 주인이, 내가 아는 형님이다.

프랑스에서는 자비에르(Xavier)로 불리는 사람. 도멘 홈페이지의 연락처 첫 줄에 적힌 이름이 바로 그 자비에르다. 프랑스 보졸레의 언덕 하나를 품은 한국인. 그는 밭을 사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국에 수입사까지 세워, 자신의 언덕에서 난 술을 직접 고국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만든 사람과 번지게 하는 사람이, 이번에는 한 사람이다.


모노폴, 그리고 천 개의 번호

내가 마신 퀴베의 이름은 ’클로 데 가랑 모노폴(Clos des Garands Monopole)’이다.

‘모노폴’은 단 하나의 소유주가 온전히 갖고 있는 밭이라는 뜻의 단어로, 부르고뉴에서는 ‘로마네 콩티’ 같은 이름들 곁에 붙는 말이다.

이 퀴베는 담장 안의 클로(담장 안 밭) 중에서도 다시 세 개의 구획만을 골라 만드는데, 밭 안에서 밭을 고르는 일은 하나의 장소, 하나의 테루아를 더 또렷하게 발음하기 위한 선별이다. 2021년이 첫 빈티지인 젊은 퀴베로, 첫 시음 때부터 잘 짜인 구조와 부드럽게 녹아드는 타닌, 꽃의 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받은 이 와인은 2023년 빈티지. 레이블 오른쪽 위에 ‘N° 0969/1000’이라는 넘버링이 찍혀 있다. 세상에 천 병. 그중 969번째가 내 몫으로 온 것이다. 병마다 번호를 매긴다는 것은, 한정 생산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알코올 도수는 레이블 기준 15.5%이다. 플뢰리 가메는 통상 13~14% 내외라 15.5%는 이례적으로 높은 도수인데 그만큼 힘이 좋고 밀도가 높은 스타일임을 말해준다.

이 정도면 보르도나 론 지역의 묵직한 레드와인 못지않은데, 뜨거웠던 2023년 그 해의 햇빛이 포도 속에 얼마나 눌러 담겼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랄까. 다음에 형님을 뵈면 이 도수가 나온 사연도 여쭤봐야겠다.


2025년에는 파리에서 열린 국제 대회(Paris International Trophy, 프랑스 와인·미식 아카데미 주관)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인증서 발급 기관은 Académie des Vins et de la Gastronomie Française(파리 쉬렌 소재, a-vgf.com)인데, 인증서에는 이 퀴베의 로트 번호 LMONO2023이 또박또박 적혀 있다.

다만 이 대회는 Decanter나 IWC 같은 최상위 국제대회보다는 규모가 작은 상업적 콩쿠르 계열이라, 마케팅 포인트로는 좋지만 평가 지표로 과신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하지만 콩쿠르의 메달이 와인의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해도, 언덕 하나를 새로 맡은 지 몇 해 만에 받아 든 금빛 원형의 금메달 수상 인증서가, 그 사이의 계절들을 증언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난 뭐랄까, 지인 할인의 개념으로 구매했었기에 이 와인이 시중에서 얼마의 가격으로 팔리는지 알지 못한다. 대략 한 병에 7~9만 원 정도 하지 않을까 하는 짐작뿐. 따로 형님께 물어보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빈티지는 1,000병 한정 생산으로 보이는 까닭에 시중에 많이 풀려 판매되지도 않을 것이다.

어쨌든 플뢰리 크뤼의 모노폴, 천 병 한정의 넘버링을 생각하면 합리적이고 가성비 좋은 가격이다. 좋은 술의 가성비란 단지 숫자가 아니라 이야기의 밀도로 계산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 하필 그 노래였을까.

프랑스 언덕의 와인 레이블에 왜 한국 노래의 악보가 앉아 있는 걸까. 물론 형님도 김목경이나 김광석, 그리고 이 노래를 좋아하실 것이다. 어쩌면 가장 좋아하는 노래일지도.

하지만 병을 돌려가며 계속 들여다보다가,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시간에 관한 노래다. 두 명의 부부가 함께 쌓아온 시간과, 그 시간의 끝에서 마주하는 이별에 관한 노래.

와인도 시간에 관한 술이다. 한 해의 볕과 비가 병 속에 봉인되고, 병 속에서 숙성되며 다시 천천히 늙어간다. 담장 안의 세 구획에서 난 2023년의 가메는, 앞으로 몇 해를 병 속에서 함께 걸어갈 것이다. 나란히, 천천히, 런던에서 보았던 그 노부부처럼.


김목경이 런던의 창가에서 노부부를 바라보던 그 시선과, 자비에르 형님이 보졸레의 언덕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쩌면 같은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낯선 땅에서, 오래 익어가는 것들을 향한 시선. 한 사람은 그것을 노래로 옮겼고, 한 사람은 그것을 술로 옮겼다. 그리고 그 노래와 그 술이 한 장의 레이블 위에서 만났다.


잔을 따르면 꽃향기가 먼저 온다. 체리의 붉은 내음이 지나가고, 실크처럼 매끄러운 타닌이 혀에 오래 머문다. 가볍다고 무시당해 온 품종이, 가장 깊은 이야기를 하는 순간이다.

병이 비어갈수록 번호가 선명해진다. 969번. 천 개의 병이 천 개의 식탁으로 흩어져, 천 번의 저녁을 밝힐 것이다. 그 식탁들 중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이 악보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부모를, 혹은 곁에서 늙어갈 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한 줄의 가사가 떠오른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좋은 와인은 향이 오래 남는 와인이 아니라,

이야기가 오래 남는 와인이 아닐까.

같이 마셨던 누군가, 혹은 와인을 마시며 떠올렸던 누군가..


노래가 그랬듯이.

와인도 그렇게, 누군가의 창밖 풍경이 될 것이다.




* 와인 : Fleurie Clos des Garands Monopole

* 빈티지 : 2023

* 생산지 : AOP Fleurie (Beaujolais)

* 품종 : 100% Gamay

* 알코올 : 15.5%

* 병번호 : No.0969/1000 (1,000병 한정 생산)

* Paris International Trophy 2025 Gold Medal 수상

* 레이블 : 김목경 작사·작곡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악보와 사인이 인쇄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