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에는 애정하는 엘피바 영도다방에서 명절 전야제의 느낌으로 술을 마셨다. 영도의 박대표 님과 소설과 시를 쓰시는 문학계 형님과 함께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두 분과는 영도다방 주인과 손님으로 안면을 익힌 이후 서로 호감이 생겨 친교로 발전하였다.
형님은 좋아하시는 소주를 드셨고, 박대표 님과는 준비해 간 화이트 와인으로 시동을 걸었다. 어두운 조명, 귀여운 잔 속 샤도네이의 빛은 마치 오래되어 살짝 빛바랜 편지지 같은 색이었다.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의 대표적인 플래그십 와인인 샤도네이. 나파밸리의 가장 서늘한 남단, 시원한 해양성 바람과 아침 안개가 포도의 숙성을 천천히 진행시켜 복합적인 풍미를 형성하고 자연스러운 산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서두르지 않고 익었다는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1923년 크로아티아의 한 포도 재배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양조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왔고, 1976년 역사적인 '파리의 심판' 사건에서 유수의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샤또 몬텔레나 샤도네이(Chateau Montelena Chardonnay)를 만들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와인메이커로 등극했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크로아티아 이민자 그르기치의 몸값은 천문학적으로 올랐지만, 그는 유명세를 뒤로하고 가족 경영 와이너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장인정신을 바탕 삼은 자신의 양조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1977년, 대형 커피 사업체를 운영하는 오스틴 힐스(Austin Hills)와 파트너십을 맺고 그르기치 힐스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오스틴 힐스는 나파 밸리의 심장인 러더포드(Rutherford)에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와이너리에 투자할 수 있는 상당한 재력이 있었고, 마이크 그르기치는 뛰어난 양조기술과 경험이 있었기에 그르기치 힐스의 와인들은 초기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르기치가 예술작품을 만들듯 공을 들인 샤도네이는 백악관 만찬 및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만찬 등에 사용되며 '샤도네이의 제왕(King of Chardonnay)'이라는 애칭을 얻었고,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 와인은 젖산발효를 하지 않는다. 캘리포니아의 샤도네이들이 흔히 걸치는 버터리한 외투를 입지 않고 포도가 처음부터 품고 있던 신맛을 그대로 남겨 둔다. 부드러워지기를 거부하고 그래서 오래 남는 맛.
추억도 그렇지 않을까. 둥글게 다듬어진 기억은 쉽게 삼켜지고 쉽게 잊힌다. 끝내 사람을 붙잡는 건 강렬한 신맛을 간직한 채 남아 있는 것들이다.
평소에는 박대표 님이 선곡을 하거나 신청곡을 받으면서 디제잉을 해주셨으나, 그날 밤은 형님께서 전담을 해주셨고 엘피바의 이곳저곳에 있는 오래된 턴테이블에서도 아름다운 선율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여정에 여러 장의 세월을 담은 LP들과 눈에 띈 한 개의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혜은이의 《고운 노래 모음집 Vol. 8》, 1면 첫 곡이 바로 〈새벽비〉이다. 레이블은 노랑과 주황의 동심원으로 맨 아래에는 발표일이 작은 숫자로 새겨져 있다. 제작일 79. 8. 15.
8/15. 1979년의 광복절에 나온 음반이다.
레이블 위로 가느다란 금 하나가 사선으로 지나간다. 누군가의 손톱이었을까, 어느 이삿짐 상자의 모서리에 긁혔을까. 손금처럼 혹은 열강이 그어버린 지도 위의 국경선처럼, 그 금은 '새벽비'라는 글자를 가로질러 판의 끝까지 간다. 언제 생긴 상처일지 모르지만 최대치로 치자면 무려 47년의 세월을 건너온 상처다.
재킷 속의 젊디 젊은 혜은이는 풀밭에 앉아 웃고 있다. 복숭앗빛 셔츠를 입고 손가락 사이에 긴 풀잎 하나를 쥐었다. 손목에는 가느다란 시계가 있다. 1979년 여름의 시간을 재던 그 시계는 사진 속에서 아직도 멈추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음반이 제대로 플레이될지 조마조마하며 형님이 바늘을 내린다. 타닥, 탁, 작은 불씨 같은 잡음이 인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다시 열심히 판을 닦는 한없이 부드러운 형님의 손길이 정성스럽다.
이윽고 어딘가 저 먼 세월의 강을 건너온 멜로디가 들려온다. 그리고 들리는 혜은이의 목소리. 맑으면서도 힘이 있는 목소리다. 절로 박수가 나온다. 깨어 있는 사람만 알 수 있기에 새벽비는 소리가 없다. 우린 이 날 영도다방이기에 새벽비를 들을 수 있었다.
재킷 오른쪽 위의 한글 제목 아래에는 한자가 작게 적혀 있다.
吉屋潤 作品集. (길옥윤 작품집)
그의 본명은 최치정이다. 1952년 일본에서 주일미군 캠프촌을 순회하는 악단을 조직, 본격적인 재즈맨이 되었으며 이때 일본 문인들의 이름을 본떠서 ‘요시야 쥰(吉屋潤)’으로 예명을 정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재즈 색소폰을 불던 한 한국 청년이 쓰던 이 이름을 우리말 소리로 읽으면 ‘길옥윤’이 된다. 우리가 아는 작곡가 길옥윤은 바다 건너에서 지어진 일본어 이름이 다시 바다를 건너와 우리말로 읽힌 이름이 되었다.
1960년 도쿄의 악단을 이끌고 돌아온 그는 「서울의 찬가」를 썼고, 1970년대 중반에 바로 「당신은 모르실거야」란 곡으로 신인인 혜은이를 발굴하고 키워냈다. 그리고 1979년 광복절의 날짜가 찍힌 이 작품집의 표지에 일본에서 쓰던 그 이름으로 혜은이의 8집 앨범이 탄생한 것이다.
광복절에, 일본에서 쓰던 이름으로.
'고이비토요(恋人よ)'라는 노래에 대해 얘기하면서, 일본 노래를 사랑하는 한국인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다. 이 재킷 앞에서 나는 그 얽혀 있는 자리를 희미하게나마 다시 확인했다.
말년의 그는 다시 도쿄로 갔다. 1992년, 불어난 빚을 안고 신사동의 가게를 아카사카로 옮겼다. 1994년 6월에는 텔레비전에서 그의 마지막 콘서트가 방송되었다. 그해 10월, 부산의 병원에 누운 채로도 곡을 썼고 1995년 2월에는 세례를 받았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는 3백여 곡을 오선지에 옮겨 적었다고 한다.
1995년 3월 21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의 영결식이 열렸고, 운구가 나갈 때는 전처였던 패티김이 「서울의 찬가」를 울면서 불렀다.
그리고 나흘 뒤였다.
1995년 3월 25일, 일본에서 한 편의 영화가 개봉한다. 이와이 슌지의 첫 장편영화 「러브레터」.
나는 이 두 날짜를 확인하고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이름을 얻었던 한 음악가가 세상을 떠났다. (그 하루 전의 일본에서는 옴진리교에 의한 그 유명한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사건이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나흘 뒤, 일본에서 태어난 한 편의 영화가 머지않아 불법의 방식으로 한국으로 건너와 한 세대의 잊지 못할 첫사랑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 누구도 이 두 개의 일을 이어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길옥윤의 부고와 러브레터의 개봉 소식은 서로 다른 날짜에 서로 다른 나라의 신문, 서로 다른 면에 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혜은이를 통해 세상에 선보인 길옥윤의 작품과 러브레터의 VHS 비디오테이프는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내 테이블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비약일진 모르겠지만 세상의 만남과 헤어짐, 인연이라는 것들은 대개 이렇게 서로를 모른 채 교차할 것이다.
「러브레터」는 이름에 관한 영화다.
동명이인의 에피소드를 통해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사랑과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회상과 추억의 형식으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히로코의 연인 후지이 이츠키는 산에서 조난당해 죽었다. 두 해가 지난 추모식 날, 히로코는 그의 중학교 졸업앨범에서 옛 주소를 찾아 편지를 부친다. 그 주소는 이미 사라진 주소다. 옛집이 있던 자리로는 국도가 났다. 닿을 리 없는 편지였다.
그런데 답장이 온다. 보낸 사람의 이름도 후지이 이츠키다. 죽은 연인과 이름이 같은 같은 반의 여자아이가 보낸 답장. 하나의 이름을 두 사람이 나누어 가졌고, 그 이름 사이로 편지가 오간다. 한 사람은 그 이름을 못내 잊지 못해 편지를 쓰고, 한 사람은 그 이름을 기억해 내기 위해 답장을 쓴다.
테이프 앞면에 한 줄의 문구가 보인다.
‘가슴속에 묻어둔 소중한 사랑이 찾아옵니다.’
뒷면에 줄거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나의 연인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눈 덮인 산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외치던 장면이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장면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お元気ですか。私は元気です。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 이름을 부르는 일.
이 영화가 우리나라 극장에 정식으로 걸린 건 1998년 한일 문화 개방 이후인 1999년 겨울 문턱이었지만, 그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알고 있었다. 나 역시 학과실에서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불법 비디오테이프로 보았다.
정식 개봉하기 전에 이미 30만 개의 불법 비디오가 유통되었을 정도였고, 정식 개봉 이후에는 당시 기준 공식적으로 115만의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성적을 기록해 일본 문화 개방 이후 한국에서 최초로 흥행한 일본의 실사 영화가 되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영화를 보고 먹먹한 마음에 밖으로 나왔는데 거짓말처럼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던 90년대 중반의 그날, 그 겨울의 하늘과 그 생생한 느낌을. 그리고 영화의 처음에 나왔던 펑펑 눈 내리는 날의 장례식장 눈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와타나베 히로코의 모습을.
「러브레터」는 1994년 10월부터 홋카이도 오타루에서 촬영되었다. 10월의 오타루에는 아직 눈이 없다. 감독은 겨울이 어서 오기를, 빨리 눈을 내리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같은 해 10월, 길옥윤은 부산의 병원 침대에서 마지막 곡들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1994년의 겨울, 조금 있으면 군복을 입게 될 젊은 시절의 나는 수많은 고민과 번민을 안고 삐삐의 숫자와 편지에 담겨 있을 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타루의 이와이 슌지 감독도, 부산의 길옥윤 작곡가도, 한 명의 범부필부인 나도, 모두 무언가에 간절했다.
한 사람은 애타게 눈을 기다렸을 것이고, 한 사람은 생의 끝을 예감하며 음표를 적어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편지를 매개로 기다림을 기다렸다. 1994년의 겨울은 그렇게 흘러갔다.
「러브레터」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소년 후지이 이츠키는 아무도 빌리지 않는 바카라들만 골라 대출 카드에 '후지이 이츠키'라고 적어 넣었다. 다들 자기 이름을 적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학교에서 만났던 여학생들로부터 한 장의 대출 카드를 건네받는다.
대출 카드에는 ‘후지이 이츠키’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뒷면을 돌려보자 그녀의 시선은 멈춰진 채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는 그녀 자신의 초상화를 망연히 바라본다. 소년 후지이 이츠키의 마음이 담긴 소녀 후지이 이츠키의 초상화. 그녀 자신도 몰랐던 편지를 그제서야 건네받은 것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소년이 보낸, 너무나 늦게 도착한 러브레터였다.
밤은 깊어갔고 이내 와인과 술들이 여러 병 비었다. 모처럼 흉금을 터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고, 간간이 정겹지만 애잔한 노래들을 함께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 좋은 시간을 만들어 준 좋은 분들과 함께 하면서 또한 내 마음의 한 갈래는 더 아래로 아래로 침잠해 들어가고 있었다.
최치정은 요시야 준이 되었다가 길옥윤이 되었다.
그르기치의 설립자 밀렌코는 마이크가 되었다.
후지이 이츠키는 하나의 이름이자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1994년의 나는 Dear 1004였다.
대단한 위인이 아니더라도 ‘이름’이란 것은 한 사람의 생보다는 더 멀리 가는가 보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그 이름은 앨범의 재킷 위에, 와인 병의 레이블 위에, 졸업앨범과 도서관 대출 카드의 뒷면에, 상자 안의 편지지 위에 남는다. 누군가 다시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듯이.
그래서 명절을 앞두고 모두 잠든 오늘 밤, 잔을 들고 조용히 그 이름들을 불러 본다. 대답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눈 덮인 산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외쳤던 히로코처럼.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