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를 씹다가’ 생각났다

by루미상지


무주 둘레길 4차를 걷는 길, 오늘따라 몹시 힘들다.

걷는 코스도 힘든데 날씨까지 덥다. 우리 모임 정대장에게서 온 안내 문자에는 난이도가 중상이라 쓰여 있었다. 지난주에는 중상이었는데 무난하게 잘 걸었다. 이번 주도 그럴 줄 알고 신청한 게 잘못이었나 보다. 산속 그늘 흙길이 아닌 땡볕 시멘트 포장 임도를 길게 걸으니 더 힘든 것 같았다. 가다가 멈춰 벌써 물 한 병을 다 마셨지만 땀은 계속 흐르고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우리만 힘든 게 아니었는지 중간에 쉬며 다들 지치고 힘들다고 했다. 해병대 출신으로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며 군 조교처럼 쌩쌩하던 성철 형님도 오늘은 너무 지친다며 자꾸 쉬었다. 평소에는 앞쪽에서 날아다니며 가볍게 걷던 진숙 언니도 힘들다고 했다.

“이놈의 산이 왜 이래? 누워있던 산이 우리가 올라갈수록 점점 일어서네.”

다들 지치고 힘들다고 아우성칠 무렵 우리를 뒤따라오던 고원길 트럭에서 간식으로 오이를 한 개씩 나눠주었다. 오이는 무척 시원하고 달콤했다. 오이를 단숨에 꽁다리까지 씹어 먹었다. 그런데 꽁다리가 아주 쓰다. 내가 인상을 쓰며 단비에게 말했다.

“무슨 오이 꽁다리가 이렇게 써?”

“꽁다리니까 쓰지. 원래 끝부분은 다 쓴 거야. 오이의 쓴맛은 오이 꽁다리에 다 들어있어. 몰랐구나!”

“끝부분이니까 쓰다고?”

그때 갑자기 박성우 시인의 오이 꽁다리처럼 쓴 첫사랑 시가 스쳐지나갔다.


오이사진.png


점심시간이 되자 무주 둘레길 주최 측에서 나눠준 도시락을 먹었다. 산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숲 속에서 먹는 도시락은 꿀맛이었다. 맛있는 도시락을 먹고 쉬며 에너지를 충전했다.

오후에는 소나무 숲길에 난 오솔길을 걸었다. 소나무들이 내뿜는 초록 향기에 우리는 눈을 감고 코를 킁킁거리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나는 단비에게 아까 생각났던 박성우 시인의 <오이를 씹다가> 시를 찾아 낭송해 주었다.



오이를 씹다가


퇴근길에 오이를 샀네

댕강댕강 끊어 씹으며 골목을 오르네

선자, 고년이 우리집에 첨으로 놀러온 건

초등학교 오학년 가을이었네

밭 가상에 열린 조선오이나 따줄까 해서

까치재 고추밭으로 갔었네

애들이 놀려도 고년은 잘도 따라왔었네

밭을 내려와 도랑에서 가재를 잡는디

고년이 오이를 씹으며 말했었네

나. 는. 니. 가. 좋. 은. 디.

실한 고추만치로 붉어진 채 서둘러 재를 내려왔었네

하루에 버스 두 대 들어오는 골짜기에서

고년은 풍금을 잘 쳤었네

시오릿길 교회에서 받은 공바카라도 내게 줬었네

한번은 까치재 밤나무 아래서 밤을 까는디

수열이가 오줌싸러 간 사이에

고년이 내 볼태기에다 거시기를 해버렸네

질겅질겅 추억도 씹으며 집으로 가네

아무리 염병 떨어도

경찰한테 시집간 고년을 넘볼 순 없는 것인디

고년은 뱉어도 뱉어도 뱉어지지 않네

먼놈의 오이꼭다리가 요렇코롬 쓰다냐.

<거미/창비> 박성우 시집 중에서


오전에 쌓였던 피로가 소나무 숲속, 오이 향 나는 시 한 수에 모두 사라졌다.

“아이고 어쩌자고 하필이면 해볼 수도 없는 경찰한테 시집을 가부렀대?”

단비가 안타깝다며 웃었다.

시인들은 언어의 마술사다. 짧은 시 속에 자신만의 철학과 생각을 듬뿍 담고 있다.

박성우 시인은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과 가까운 정읍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사투리가 더 정겹게 다가왔다.

시인은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거미>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 <거미> 시집을 시작으로 많은 작품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2008년 동시집 <불량 꽃게>, 2010년 <난 빨강> 청소년 시집이 있다. 딸을 키우며 아이의 커가는 모습에 맞춰 많은 동시집도 냈다.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 걷기는 힘들고 지쳤지만 박성우 시인의 시 덕분에 오이 향 폴폴 나는 향긋한 날이었다.


산사짖.png





5월 16일 덕유산 둘레길 걸은 길

관광안내소(무주읍 당산리 1182. 카풀이동)~반디랜드~하엽~숲길~임도~버덕숯재~내유속~외유속~무주대교~관광안내소 13.8km





*무주 *걷는길 *오이 *시 *고원길 *트럭 *박성우시인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