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3일, 거창군 북상면 남덕유산을 오른다. 덕유산은 전라북도 무주군과 장수군, 경상남도 거창군과 함양군에 걸쳐있다. 내계폭포를 걷고 있을 때였다. 청아한 새소리 사이로 우아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났다.
고개를 들어 기웃기웃 숲 속을 더듬으니, 가까이에 하얀 산목련이 보였다. 하얗고 뽀얀 크림색 꽃봉오리는 나무에 아이스크림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꽃망울 하나를 톡 따서 먹고 싶어질 정도로.
꽃잎을 터뜨리기 전 봉오리와 활짝 피어난 꽃잎 향기에 취해 있는데, 숲 해설사로 활동 중인 경아 언니가 다가왔다.
“루미가 뭘 보고 함박웃음을 웃고 있나 했더니 함박꽃나무였구나. 함박꽃처럼 크게 활짝 웃는 모습을 ‘함박웃음’이라고 해. 북한에서는 목란이라고 부르지.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국화야. 우리는 산목련이라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나무에 피는 고귀한 난이라고 해서 이 나무를 목란이라 한대.”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인 줄 알았는데 함박꽃이었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오해하고 있어. 함박꽃은 원래 중국, 일본,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요즘엔 귀해져서 우리나라의 깊은 산 중턱에서나 볼 수 있대.”
5~6월에 꽃이 핀다는 함박꽃은 꽃송이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크고 뽀얀 꽃과 신비로운 향기로 집 안에 관상수로도 많이 심는다고 한다. 씨앗, 꺾꽂이, 묘목으로 모두 심을 수 있고 잘 자란단다. 내년 봄에는 우리 농장에도 한 그루 심어야겠다고 찜을 해두었다.
고원길을 걸으면 산과 들에서 다양한 꽃을 만난다. 이미 알고 있던 꽃도, 처음 알게 된 꽃도 있다. 꽃은 제 자리에서 묵묵히 시기를 조절하며 자기가 피어야 할 때를 알고 피었다 진다.
1월 말, 마이산 탑사에서 은수사로 가는 길 양지바른 눈 속에 제일 먼저 피어난 노란 복수초를 만났다. 변산 바람꽃도 피었다는데 아쉽게 나는 보지 못했다. 남도 보길도에서는 먼나무를 처음 알게 되었다. 한겨울인데도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있는 나무를 보고 식물 박사 경숙 샘에게 물었다.
“저건 무슨 나무예요?”
“먼나무요.”
“아니, 저 나무 이름이 뭐냐고요?”
“이름이 먼나무라고요”
옥신각신 몇 번의 물음 끝에 먼나무에 대해 알게 되었고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먼나무 꽃은 5~6월쯤 연두색으로 피는데,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그 빨간 열매는 하얀 겨울 눈 속에서도 꽃처럼 예쁘게 피어있었다.
2월, 눈 속에 피어난 길마가지 나무꽃을 처음 보았다. 경숙샘은 조심스럽게 가지를 잡고 무슨 향이 나는지 맡아보라 했다. 은은한 레몬향이 상큼했다.
3월, 장수군 서상 저수지에서는 잎보다 먼저 나온 노란 생강나무 꽃을 보았다. 잎은 꽃이 진 다음에 나온다며 익성 샘이 문제를 냈다.
“산을 가장 사랑하는 나무는 누구일까요?”
“모든 나무가 다 산을 사랑하는 것 아니에요? 그런 나무가 따로 있어요? ”
“바로 생강나무랍니다.”
그때는 생강나무가 노란 꽃만 있고 아직 잎이 나오지 않을 때였다. 익성 샘은 다음에 잎이 나오면 알려주겠다며 우리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5월이 되자 김 샘은 생강나무 잎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생강나무 잎은 뫼 산 모양의 잎과 하트모양 잎의 두 종류가 있었다. 그래서 생강나무가 산을 가장 사랑하는 나무라고 했다. 잎을 보여주며 설명하니 귀에 쏙쏙 들어왔다.
3~4월, 양악호 둘레길에서는 산을 분홍으로 물들인 진달래꽃을 보고 진달래주를 마셨다. 보랏빛 꽃잎이 뒤집힌 얼레지 꽃과 청보라색 현호색도 보았다. 걷는 길에는 보랏빛 제비꽃과 흰 제비꽃도 보았다. 노란 민들레도 피기 시작했다.
5월, 철쭉이 피었다. 고창 운곡습지로 가는 길에는 하얀 찔레꽃과 연보랏빛 오동나무 꽃이 피었고 향기가 숲 속에 퍼졌다. 둥굴레꽃과 은방울꽃, 붓꽃, 습지에서는 노란 꽃창포가 피었다. 5월 말이면 인동초 꽃의 향기가 숲에 퍼지며 7월까지 핀다. 인동덩굴은 생명력이 아주 강하다. 박쥐나무 꽃을 처음 알았다. 잎 모양이 날개를 편 박쥐와 닮았다고 해서 박쥐나무 꽃이라 한다했는데 은은한 향기도 있었다.
6월, 길가에서는 가시 돋친 엉겅퀴와 꿀풀을 보았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따먹던 꿀풀을 오랜만에 보니 무척 반가웠다. 하나 따서 꿀을 빨아보았지만, 달콤한 꿀맛이 나지 않았다. 아마 어제 내린 비 때문인 것 같다. 보라색 싸리나무 꽃, 하얀 노루오줌 꽃도 층층이 피고, 청보라색과 분홍색 산수국도 피었다. 자귀나무는 이제 막 하늘하늘 분홍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자귀나무 꽃에서는 엄마 냄새가 났다. 길을 걷다 엄마 화장품이나 향수 냄새가 나 둘러보면 꼭 그 옆에 자귀나무 꽃이 보였다. 지금도 언제 어디서든 자귀나무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 6월 말이 되자 무궁화꽃이 활짝 피었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는 예쁜 무궁화 잎으로 창호지 문고리 옆에 무늬를 넣어 한지를 발랐다.
7월, 내 친구 미혜가 가장 좋아하는 주황색 원추리와 하얀색, 보라색 비비추가 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롱나무꽃이 피기 시작하고 7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작은 꽃송이들은 만발할 것이다. 잎이 무성하게 자란 칡넝쿨 사이로는 보랏빛 칡꽃이 알알이 피어날 것이고, 칡꽃 향기는 숲 속 멀리 퍼지며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고원길을 걸으며 처음 칡꽃을 보았고 숲 속 가득 퍼진 강한 향기도 알게 되었다. 7월의 칡꽃은 또 얼마나 예쁠까?
8월, 숲 그늘에는 보라색 맥문동이, 진분홍의 물봉선이 핀다. 물봉선을 볼 때면 아들이 생각난다. 어렸을 때 물봉선 뒷주머니 꿀을 따 먹으려다 벌에 쏘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줄기에 노란색 꽃이 조롱조롱 피어나는 짚신나물 꽃도 핀다.
9월, 코스모스가 활짝 핀 들길을 걸을 수 있다. 구절초, 벌개미취, 쑥부쟁이도 하얗게 무리 지어 핀다. 내가 좋아하는 꽃들이지만 잠깐 사진을 찍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는 꽃이다. 2022년 가을, 처음 고원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의 일인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10월, 산국과 감국이 노랗게 핀다. 경숙 샘은 산국과 감국의 차이점을 알려주었다. 산국은 크기가 작고 여러 개가 모여 피며 말려서 방향제로 쓰거나 베갯속에 넣으면 편두통이 사라진단다. 감국은 맛이 좋아 차로 만들어 마신다고 한다.
11~12월, 남쪽 섬 신안 압해도에서 동백꽃을 보았다. 추운 겨울 진초록 잎과 새빨간 동백꽃의 조화가 무척 아름다웠다.
산과 들에는 자연의 시절 따라 다달이 피어나는 꽃들이 있다. 꽃은 색깔도 모양도 피는 시기도 모두 다르지만 스스로 때맞춰 피어 자기만의 향기를 내뿜는다. 자연 속 꽃들은 걸을 때마다 나를 유혹하고, 나는 늘 새로운 길을 걷는 것처럼 황홀하다.
기꺼이 그 유혹에 빠져들기 위해 오늘도 나는 걷는다.
사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름입니다.
*생강나무꽃 *생강나무잎 *진달래 *산수유 *광대나물 *노란민들레 *흰민들레 *배꽃 *사과꽃 *으름꽃
*제비꽃 *큰구슬붕이 *길마가지나무 *애기똥풀 *봄까치꽃 *호두 *밤꽃 *꿀풀 *노루오줌 *비비추 *인동초
*박쥐나무 *청미래덩굴 *산딸기 *아까시꽃 *금낭화 *산철쭉 *산괴불주머니 *해당화 *동백꽃
*먼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