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에 빠진 날
무주 금강 벼룻길을 걷는다.
금강 물줄기를 따라 난 아름다운 오솔길을 산토, 꾸미, 단비, 우산, 루미, 탱크가 걷는다. 우리는 걸으며 자주 눈을 깜빡인다. 연둣빛이 눈부셔서이다. 이 시기에는 어디를 보나 연두다. 연두 풀밭 속을 걸어 연둣빛 가로수 길로 들어서자 산토가 김영랑 시인의 시를 읊는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뒤 따르던 꾸미가 말했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길이야. 나는 이런 길이 정말 좋아. 하루 종일 걸었으면 좋겠네.”
꾸미도 흥이 올랐는지 우리 가곡 김동환 작곡, 이기철 작사, 최현수의 <그리운 마음>을 불렀다.
바람은 불어 불어 청산을 가고 냇물은 흘러 흘러 천리를 가네
냇물 따라가고 싶은 나의 마음은 추억의 꽃잎을 따며 가는 내 마음~~~
꾸미 노래가 끝나자 이번에는 단비가 두 손을 쭉 뻗어 머리 위로 올리며 공지영 소설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로 널리 알려진 초기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경구를 읊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조용히 듣고 있던 탱크 형님이 빙그레 웃으며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읊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기다렸다는 듯 우산이 팔랑팔랑 날아 사뿐 풍년초 꽃 속에 앉는 나비를 가리키며 손동연 시인의 <나비>를 읊었다.
봄이 찍어 낸 우표랍니다. 꽃에게만 붙이는 우표랍니다.
우와, 우리는 손뼉을 치며 감탄했고 모두 따라 외웠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시가 술술 흘러나오다니 정말 멋진 걸음 동무들이다. 모두 연두에 취해 저마다 몸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자기만의 문장들을 끄집어내었다.
흙냄새, 꽃냄새, 쏟아지는 햇살에 반짝이는 가로수의 연두 냄새까지 자연의 모든 냄새가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학창 시절,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르 웃음이 터지는 우리를 보고 선생님들은 말했다.
“지금이 좋을 때다. 소똥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우습지? 금방 지나간다.”
그럴 때면 우리는 더 크게 깔깔거리며 웃곤 했다.
“선생님, 소똥이 굴러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웃기는데요.”
청춘이 지나고 이순이 넘은 나이에 돌아보니 우리가 가장 아름다웠던 연두였을 때 우리는 몰랐고 즐기지도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의 연두를 귀히 여기고 더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강물 소리에 맞춰 꿩, 뻐꾸기, 검은등 뻐꾸기, 되지빠귀, 물까치, 꾀꼬리가 노래 부르고 까마귀와 까치, 참새가 화음을 넣는다.
한나절을 연두와 자연의 화음에 빠져 걷다 보니 강가에 있는 한적한 정자에 도착했다. 숲 속 오솔길을 걸어 정자까지 걸어오는 동안 햇볕 바라기를 위해 잠시 나온 어린 뱀 한 마리를 봤을 뿐이다.
아무도 없는 정자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오늘은 용근 형님이 라면을 맛있게 끓여주겠노라 했다. 흘러가는 금강 줄기의 정자에 앉아서도 우리의 연두 타령은 계속되었다.
“음, 여기도 연두, 저기도 연두, 나는 연두가 좋아. 초록보다 연두가 좋아.”
용근 형님이 우리를 바라보며 웃었다.
“연두 많이 보세요. 금방 초록됩니다. 라면 맛있게 끓여줄게요.”
라면이 끓는 동안 나는 휴대폰을 열어 내가 좋아하는 박성우 시인의 “아직은 연두” 시를 모두에게 읽어주었다.
아직은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우물물에 설렁설렁 씻어 아삭 씹는
풋풋한 오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옷깃에 쓱쓱 닦아 아사삭 깨물어 먹는
시큼한 풋사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 연두
풋자두와 풋살구의 시큼시큼 풋풋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아직은 풋내가 나는 연두
연초록 그늘을 쫙쫙 펴는 느티나무의 연두
기지개를 쭉쭉 켜는 느티나무의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누가 뭐래도 푸릇푸릇 초록으로 가는 연두
빈집 감나무의 떫은 연두
강변 미루나무의 시시껄렁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늘 내 곁에 두고 싶은 연두
연두색 형광펜 연두색 가방 연두색 팬티
연두색 티셔츠 연두색 커튼 연두색 베갯잇
난 연두가 좋아 연두색 타월로 박박 밀면
내 막막한 꿈도 연둣빛이 될 것 같은 연두
시시콜콜, 마냥 즐거워하는 철부지 같은 연두
몸 안에 날개가 들어있다는 것도 까마득 모른 채
배추 잎을 신나게 갉아먹는 연두 애벌레 같은, 연두
아직 많은 것이 지나간 어른이 아니어서 좋은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난 빨강/창비> 박성우 시집 중에서
이른 봄, 검고 딱딱한 나무에서 긴 겨울을 이기고 세상에 나온 풋풋한 연두다. 연둣빛 새싹을 보면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떠오른다. 나뭇잎도 사람도 누구나 연두일 때가 있고 나도 싱그럽고 상큼한 연두일 때가 있었다. 완전한 초록이 되기 전 연두는, 많은 꿈을 품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연두를 지나 초록을 지나 노랑과 빨강으로 물들었다가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중이다. 갈색 잎은 언젠가는 나무에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흙은 또 다른 생명에게 양분이 되어 줄 것이고 또 어린 새싹들은 태어날 것이다. 자연의 순리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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