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기대어

한 발 더 가까이 가고 싶은 곳은?

by수키


3월, 새 학기의 시작을 앞두고 꼬박꼬박 온라인 OT와 입학식을 챙겨 들었다. 오랜만의 공부여서인지 긴장감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와 산바카라을 하다가 문득, ‘다시 학교 갈 생각 하니까 너무 걱정돼’라고 말했다. 아이는 그렇게 걱정되면 그만두라고 했다. 누군가와 닮은 그 말에 서운함을 표현하며, 그럴 때일수록 힘내라고 응원해 달라고 했다. 아이와는 이런 대화가 참 쉽다. 40대 중반이 되어서 이제 만 10살이 된 아이에게 하는 고민 상담이라니. 하지만 누구보다도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건 아이다. 아이한테 말할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 이기적인 걸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 의지한다. 어디에서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툭 터놓고 편안하게.

그러나 타인과의 대화가 어렵다. 혹여라도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실례가 될까 봐 조심하게 된다.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치 유리와 같아서 보기엔 예쁘지만 잘못 던져지는 순간 쨍그랑 깨져버리고 만다. 산산이 조각나버린 유리 조각은 치우기도 어렵다. 다 치웠다고 생각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작은 조각에 살이 베이는 것처럼. 그래서 대화를 할 때는 최대한 뭉툭한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 게 예의라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그 뭉툭함은 마치 질소로 가득 차 있는 과대 포장된 과자 봉지 같았다. 가득 차 있을 것 같지만 실상 봉지를 열어 보면 몇 개 들어있지 않은 과자를 봤을 때의 배신감이란. 겉도는 대화는 관계도 겉돌게 만든다.


학교에 입학하고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 걸까’ 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때 떠오른 단어는 ‘해방’이었다. 자유를 꿈꾸던 나는 글 쓸 때 가장 자유롭다고 느꼈다. 하고 싶은 말을 A4 크기에 한가득 써넣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통쾌함이었다. 처음 글쓰기를 했을 때 나의 글을 들어주었던 사람들은 나라는 사람을 알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 다정함에 기대어 어디에서도 꺼내 보일 수 없었던 내 생각을 맘껏 펼쳐 보였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화면에 쓰고, 지우기를 실컷 반복하면서 결국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듬었다. 나는 그렇게 글쓰기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내 멋대로 쓴 마음을 온전히 받아주던 그 사랑이 다정하고 따뜻해서.


그림바카라 《한 발 더 가까이 오세요》도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하얀 바탕의 표지에서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대고 멀어지는 듯하지만 그림바카라의 뒤표지의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무기를 내려놓고 나를 만나러 오지 않겠어요?" 그림바카라 속에서 총을 들고 있던 사람의 손에는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기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있기도, 마법사의 모자를 들고 있기도 한다. 나의 눈에 그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어떤 모호함 속으로 용기 있게 들어가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 용기는 어쩌면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보였고, 참 다정하구나 생각했다.

독서 모임에서 올해 첫 바카라으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었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어코 다정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그 다정함은 진짜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다정함은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의 힘이었을까. 며칠 후 남편과 부부 싸움을 한 날, 나는 그 마음을 믿으며 그동안의 서러움을 한껏 쏟아내었다. “누가 들으면 그동안 쌓인 거 많은 줄 알겠어”라고 말하는 남편의 말에 “나 쌓인 거 엄청 많은데”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로 감정을 털어버리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동안 내가 아닌 상대를 먼저 배려하느라 하고 싶은 말을 너무 안 하고 살았다. 단단함으로 버텨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가는 줄도 모르고, 하고 싶은 말들을 외면했다.

그 외면은 타인의 상처에 대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나의 상처에 대한 회피였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내가 생각한 결론은 ‘나는 사랑을 믿지 못했구나’였다.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때그때 표현하는 것도 사랑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었을 텐데.

자, 앞으로는 조금 더 사랑에 기대어 보자.





+ 이야기 나눈 그림바카라

한 발 더 가까이 오세요(원제 : Il duello)

이네스 비에가스 올리베이라 지음, 김지은 옮김

길벗어린이(2025)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