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도 되나요?

누가 눈치 게임의 승자가 될 것인가

by수키

아이와 함께 김성미 작가의 그림바카라 《인사》를 읽으면서 과연 누가 인사하기 눈치 게임에서 승자가 될 것인지 궁금했다. 그림바카라을 다 읽고 아이에게 둘은 왜 먼저 인사를 하지 않는 걸까 물으니 자존심 때문이라고 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인사를 피하는 두 주인공의 심리는 이상해 보였지만 낯설지 않았다.

나에게도 마음을 숨겨야 할 순간들이 있었다. 좋아도 그렇게 좋지 않은 척, 기뻐도 많이 기쁘지 않은 척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얼굴에 가면을 써야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잘 웃는 사람이었다. 낙엽이 굴러가기만 해도 웃는 사람, 그게 나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도 작은 일에도 잘 웃었다. 하지만 모두가 웃는 얼굴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어릴 적 활짝 웃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입이 너무 크다며 입 큰 개구리라고 놀렸고, 슬롯생활을 하면서 웃지 말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웃으면 사람이 가벼워 보이니 참으라고 했다. 웃으면 사람들이 만만하게 본다고 했다. 웃는 얼굴 뒤에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산 적도 있다. 웃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 뿐인데 그게 단점이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점점 웃음을 잃어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마음껏 웃는 얼굴을 지을 수 있던 때도 있었다.


일본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잦은 온라인 게임 이동으로 이십 대를 보내며 또다시 퇴사를 고민하고 있을 때, 어쩌면 이번이 일본에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유학을 결심했다. 캐릭터 디자이너였던 나는 틈틈이 어학원에 다니며 일본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어학원 선생님 외에 원어민과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어서 일본에 가서 말은 하고 살 수 있을지 걱정됐다.

일본에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나카노였다. 짐을 푼 다음 날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구청에 갔다. 일본에서 지내려면 꼭 필요한 절차였기에 한국에 있을 때부터 발급 절차를 여러 차례 머릿속으로 연습해 본 덕에 떨리지는 않았다. 구청 직원은 나를 맞이한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속도로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모든 감각을 동원해 말을 알아들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막 일본에 왔는데 일본어를 참 잘한다며 칭찬해 주었다. 내가 일본에서 먹고살 수는 있겠구나, 하고 크게 용기를 얻은 건 그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일본 유학을 결심한 계기는 올빼미 여행에서 만난 친절이었다. 새벽 비행기로 일본에 갔다가 다시 새벽 비행기로 귀국하는 여행이 유행하던 때였다. 캐릭터 디자인 학원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이 일본에서 열리는 큰 규모의 디자인 전시를 보러 간다는 말에 흔쾌히 동참했다. 아침 일찍 전시장에 도착한 덕분에 여유롭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고, 한 바퀴를 다 돌고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우리는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시모키타자와로 향했다. 빈티지 콘셉트 가게가 많기로 유명한 동네라 한국인들 사이에서 여행 시 꼭 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 외에 우리가 아는 정보는 없었다. 일본어도 할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당했다. 눈에 띄는 가게가 있으면 들어가고, 길을 모를 때는 지나가는 일본인을 붙잡고 물었다.

그때 그녀를 만났다. 일본 여행바카라을 보면서 가고 싶었던 가게를 찾던 중에 지나가는 그녀에게 길을 물었다. 말이 아닌 손가락으로. 일본어라고는 짧은 인사밖에 할 줄 몰라 바카라 속의 가게를 가리키며 애절한 눈빛을 보냈고, 그녀는 우리의 몸짓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러고는 처음 만난 나의 손을 덥석 잡고 친구인 양 같이 길을 걸었다. 첫 일본 여행에서 받은 뜻밖의 친절에 감동한 나는 언젠가는 꼭 일본에서 살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일본에서 살게 되었다.


취학 비자로 일본에 가긴 했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사람은 무식할 때 가장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일본어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다. 그중 몇 군데에서 연락이 왔고, 한 군데를 골라 면접을 보러 갔다. 지원한 곳의 정보를 잘 알지 못했던 나는 당연히 일하게 될 가게에서 면접을 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첫 면접 장소는 신주쿠에 위치한 큰 빌딩이었다. 동그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인사 담당자와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눴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회사에서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한 소개부터 내가 일하게 될 가게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면접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그 회사가 일본에서 여러 개의 요식업 체인점을 운영한다는 것과 내가 면접을 보는 장소는 본사라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큰 회사 규모에 긴장했지만, 최대한 웃는 얼굴로 알아듣는 척을 했다. 그러던 중에 인사 담당자가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표정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 말을 알아들은 나는 “笑顔は自信あります!” (미소는 자신 있어요!)라고 말하며 주먹을 쥔 손을 번쩍 들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지원자의 기세에 놀란 인사 담당자는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당연히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면접을 보면서 알아들은 말은 그가 했던 말의 30% 정도였다. 며칠 뒤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자 목소리였다. 나에게 김상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연이어 굉장히 빠른 일본어가 쏟아져 나왔고, 대충 알아들은 바로는 아르바이트에 합격했으니 가게로 나오라는 말 같았다. 장소는 시부야에 있는 백화점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지하’를 가리키는 ‘地下’를 못 알아들어 우리의 대화는 계속 맴돌았고, 그녀가 ‘一番下!’(가장 아래!)라고 말했을 때 겨우 그 뜻을 알아차렸다.


신기한 일이다. 그저 웃었을 뿐인데 면접에 합격하다니.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인사 담당자가 했던 말을 자주 떠올렸고, 최대한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년의 남성 손님이 혼자 가게로 들어왔다. 메뉴판을 보던 어르신의 손짓에 나는 주문을 받기 위해 테이블로 다가갔다. 어르신은 식사를 주문하고는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お誕生日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생신 축하드립니다!)라고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마침 한가한 시간이기도 했고, 어르신의 다정한 태도에 나도 반갑게 화답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어르신은 계산을 하며 점장님에게 기분 좋은 식사를 했다고 전했다.

어르신이 다녀가고 며칠 후, 매장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백화점 직원이었다. 얼마 전 식사를 하러 온 손님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준 아르바이트생에게 고맙다며 일부러 백화점에 전화를 걸어 칭찬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친절한 직원상을 받았다. 하지만 상을 받은 것보다 내 웃는 얼굴 덕분에 누군가가 기분 좋은 생일을 보냈다는 것이 더 뿌듯했다.

이자카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내가 전단지를 돌리면 매장에 손님이 꽉 찰 정도였다. 나는 그저 웃으며 전단지를 돌렸을 뿐인데, 사람들은 내 웃는 얼굴을 참 좋아해 주었다. 그 후로 다시 웃는 얼굴에 자신감이 생겼다.


학교에서 그림바카라을 읽어주는 봉사를 하다가 아이들 반응이 좋아서 점점 신이 난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가 “선생님이 왜 이렇게 신나 보이지?”라며 웃었다. 그 말을 듣고 기뻤다. 내 웃는 얼굴을 그대로 바라봐 준 아이의 마음이 고마웠고, 같은 마음을 지닌 영혼의 조각을 만난 듯 반가웠다. 나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과 한껏 웃었다. 그렇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웃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참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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