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노어랜드에서 바턴 코티지까지
지금까지 살면서 적지 않게 이사를 다녔다. 제일 먼저 집을 떠난 것은 중학교 졸업을 하고 제주 시내의 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고향을 떠난 일이다. 고등학교 가까운 시내 한 곳에 자취방을 얻어서 2년을 살았고, 이후 부모님께서 나중에 다시 지을 목적으로 구입하신 근처의 낡은 집으로 이사하여 1년을 더 살았다. 당시 나는 어린 나이였기에 집을 떠나 혼자 사는 것을 낭만으로 여기면서 나의 아지트로 들어갔지만 일주일도 안되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후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고향집을 찾았고 일요일 오후에 버스를 타고 쓸쓸한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3년동안이나 했다. 고향 시골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는 3시간에 한번씩 있는 버스였다. 나는 그 버스를 타고 우리 동네 목장을 지나, 억새풀이 펼쳐진 들판을 지나고, 사려니 숲 가까운 곳의 삼나무 숲길을 지나 구불구불 난 도로를 달려 시내로 들어오곤 했다. 가을 저녁 어두컴컴할 때 억새풀이 바람에 스치는 쉬이쉬이~ 소리가 어찌나 쓸쓸하게 들리던지 나는 이미 적막감과 외로움의 깊이가 어떤 것인지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 같았다. 고등학교 생활을 위해 고향 집을 떠난 것은 반은 자의, 반은 타의라 할 수 있다. 당시에 나는 제인 오스틴 소설 <이성과 감성>울 몰랐지만, 세월이 흘러서 소설을 읽었을 때, 정든 고향을 떠나는 대시우드 부인과 딸들의 심정이 절절히 다가오기도 했다.
고향 집에 살때는 몰랐지만, 집을 떠나 삭막한 도시로 가니, 밤에 잠이 잘 오지도 않았고 고향 집의 삼나무들과 제밤나무, 귤나무들이 바람에 쓰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정든 곳에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하면서 그들은 많은 눈물을 흘렸다. "노어랜드, 내 사랑!" 그곳에 머무는 마지막 날 저녁 때 집 팡을 혼자 거닐면서 메리앤이 말했다. "얼마나 지나야 널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겠니! 얼마나 지나야 다른 곳에서 편해질 수 있을까! 오! 행복한 집아, 앞으로 다시는 못 볼텐데, 내 여기 서서 지금 널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넌 알기나 할까! 그리고 너, 정든 나무들아! 너희들은 늘 그대로일거야. 우리가 가버린다고 잎이 시들지도 않을 거고, 우리가 너희들을 더 이상 안본다고 해서 가지가 살랑대지 않을 리도 없겠지! 그래, 너희ㅣ들은 꼭 같을 거야. 너희들로 인해 생긴 기쁨도 슬픔도 모른 채, 너희들의 그늘 아래 걷는 사람들에게 생긴 변화도 모른 채! 그러나 누가 남아 너희들을 즐길까?" (40-41, <이성과 감성> 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이사간 집은 젊은 부부가 지내는 작은 집이었다. 어린 딸이 혼자 지내기에는 같이 지낼 분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판단하신 부모님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취집을 구해주셨다. 집 주인은 어린 딸과 갓난 아기를 키우고 있는 젊은 부부였고, 언제든지 주방을 공유해서 써도 좋다고 했다. 낯선 곳이었지만 가끔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와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외로움을 달래주었고, 마당 한켠에 있는 작은 정원의 나무들과 화분들이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집에 숨통을 트이게 했다. <이성과 감성>의 바턴 골짜기 만큼 전망이 아름다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자 앞으로 살게 될 지방의 모습에 대한 관심이 우울한 기분을 압도하였고, 막 들어선 바턴 골짜기의 전망이 그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곳은 환하고 비옥한 곳으로 숲이 우거지고 목초지도 넓었다. 일 마일 이상 꾸불꾸불 골짜기를 통과한 후에 그들의 집에 당도하였다. 작은 녹색 마당이 앞터의 전부였다. (41)
집은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높은 언덕들이 바로 뒤편으로 솟아 있었고, 양옆으로도 조금밖에 거리를 두고 있지 않았다. 언덕 가운데에는 훤히 트인 목초지도 있었고 조림이 되어 숲이 우거진 곳도 있었다. 바턴 마을은 이 언덕들 가운데 하나에 주로 위치해 있었고 코티지 창문에서의 전망이 아주 멋졌다. 집 정면의 경관은 더 탁 트여 있었다. (42)
이후 서울로 올라온 나는 제주 시골 집의 넓은 마당과 작은 정원, 돌담들, 귤과수원, 목초지가 있는 집은 갈 수 없었다. 서울에서의 삶은 편리하기는 하나 걸어서 바로 갈 수 있는 목초지와 숲이 없으니 이런 전망에 대한 갈망이 계속 남아 있었다. 20대 시절에는 성당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생활했다. 성당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배우자도 만났으니 이사와 새로운 공간은 또 다른 만남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출발하였다. 메리앤이 처음에는 앞섰으나 갑자기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마거릿은 언니를 돕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어서 별수 없이 계속 달려 내려가 언덕 아래에 무사히 도달하였다. 이런 사고가 일어났을 때 메리앤에게서 몇 야드 떨어진 곳에 포인터 종 사냥개 두 마리를 거느리고 총을 든 한 신사가 언덕 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총을 내려놓고 도와 주려고 달려왔다.(59)
남편의 온라인 게임과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찾아 이사를 몇 번이고 더 다녔다. 남편이 좋아했던 산자락 밑의 아파트에선 4년을 살았다. 이 곳은 우리가 처음으로 구매한 아파트였다. 두 동짜리 작은 규모의 아파트였지만, 전망 좋은 집이었고, 놀이터와 산바카라로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아이들도 또래 친구들과 어두컴컴해질때까지 신나게 놀았고, 나는 비슷한 나이의 엄마들과 정자의 벤치에 앉아서 육아 정보를 나누기도 했다. 조금 친해진 엄마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다과 시간을 갖기도 했고, 같은 동에 살고 계셨던 아이들 피아노 선생님 집에 초대받기도 했다. 10층에는 미국인과 결혼한 한국인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미국인 아저씨가 놀이터에 나올 때마다 아이들은 호기심과 반가움에 인사를 하곤 했다. 미국인 아저씨는 가끔씩 아이스크림을 한봉지 사와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처음 데번셔에 왔을 때 대시우드 부인이나 딸들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약속이 너무 많이 잡혀서 여기에 시간을 많이 잡혀서 여기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초대도 자주 받고 손님도 자주 맞이하게 되어서 진득하니 무슨 일을 할 여유가 없어질 줄은 거의 짐작도 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곧 그렇게 되었다. 메리앤이 회복되자 존 경이 진작부터 세우고 있던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실내에서든 야외에서든 모여서 놀자는 것이었다. 파크에서의 개인 무도회가 시작되었고, 소나기가 많은 10월 날씨가 허용하는 한 물놀이도 이루어졌다. (73)
E.M. 포스터의 소설, <하워즈 엔드>에서 마가렛과 헬렌 자매에게 "하워즈 엔드"는 단순한 집이 아니다. "하워즈 엔드"는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장소이자, 사람과 사람, 이성과 감성, 구시대의 감성과 새로운 시대의 과학, 혹은 계층과 계층을 이어주는 매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소설 말미에 "하워즈 엔드"는 마가렛, 헬렌, 그리고 헬렌이 낳은 아이가 살아가는 공간이 되면서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 매우 인상 깊었던 것은 "하워즈 엔드"라는 집은 그 어떤 것이든지 연결(connection)의 공간이 되면서 새로운 출발의 힘을 제공한다는 점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이성과 감성>에서도 바튼 코티지는 매우 소박한 장소였지만, 인물과 인물의 연결, 서투른 사랑과 진실된 사랑의 연결,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의 연결 장소가 된다. 엘리너에게는 에드워드를 만나는 장소, 메리앤에게는 윌러비와의 사랑의 상처에서 벗어나 브랜든 대령의 진실된 사랑을 알아가는 장소이니 말이다.
지금까지 여러번의 이사 끝에 참 오랫동안 살고 싶은 집에 정착해 있다. 사람들과의 교류도 활발히 할 수 있는 곳이면서 인근에 숲도 있고, 공원과 산바카라로도 있어서 거주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다. 그러나 나의 이사는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의 "하워즈 엔드"인 시골집에 내려갈지도 모르고, 여건이 되면 나만의 "하워즈 엔드"를 지을 지도 모르겠다. 나의 하워즈 엔드는 E.M. 포스터가 말한 것 처럼, "단지 서로 연결하라(only connect)"의 메시지를 잘 간직하는 곳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