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을 읽는 100가지 방법

52. 우리 마을에서 걷는 제인 오스틴 로드

by제이오름

아직 스코틀랜드에 가본 적이 없다. 글래스고에서 학위를 마치신 대학원 지도교수님은 스코틀랜드 이야기를 종종 하시곤 했다. 제주 날씨와 매우 흡사한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이다. 에딘버러는 꼭 가보라고 하셨다. 맘이야 지금이라도 가보고 싶지만, 여건상 갈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떠올리는 풍경은 고향 마을의 아름다운 길들이다.


우리 마을에는 고야 동산이라는 작은 언덕이 있다. 이름이 왜 고야 동산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 부터 마을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온 토속적 이름이다. 유명 화가 이름과 같아서 뭔가 사연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전혀 관련은 없다. ㅎㅎ 고야 동산은 동네 아이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이 동산은 무척 아름다워서 어느 쪽으로 가도 걷기에 좋은 곳이 많다. 경사진 곳과 평평한 곳이 골고루 섞인 곳, 저 멀리 아름다운 전망이 보이는 곳, 조그만 걸어가도 우거진 숲이 있어서 비밀 사연 공유하기에도 좋고, 숨박꼭질 놀이 하기에도 안성맞춤인 곳, 날이 맑아도 눈이 펑펑 내려도 놀 거리가 풍부했던 곳이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았을 때 그 곳은 여전히 매력적인 곳이고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안개가 낀 날도, 보슬보슬 비가 내린 날도 좋았다. 생각해 보니, 이 곳은 내가 누군인척, 아니면 무거운 내 역할에 몰입하지 않아도 되고 오로지 무상무념으로 바라만 봐도 괜찮은 곳이었다. 나를 보여주기 위해 애써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니, 이 점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싶다.


고야 동산의 한 쪽에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는데, 숲에 가면 토속 신앙의 하나로서 마을 어머니들이 기도하는 곳이 있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에 동그란 쌀떡을 빚어 광주리에 이고는 동이 트기 전에 기도하는 곳으로 가셨다. 이 길을 걸으면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걸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만약 어머니가 제인 오스틴을 알았더라면 『노생거 사원』의 캐서린이 노생거 사원으로 가는 길에 가졌을 어떤 간절한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맨스필드 파크』에서 패니 프라이스가 버트람 이모댁의 정원을 거닐면서 가족을 생각하면서 느꼈을 마음들도 말이다.


내가 느낀 마을의 고야 동산과 비슷한 광경은 제인 오스틴 소설 『이성과 감성』의 바튼 코티지 언덕이 아닐까 한다. 날이 맑아도 비가 와도 사람들을 이끄는 곳 말이다.


주위의 시골에는 온통 아름다운 산바카라로가 즐비하였다. 코티지의 거의 모든 창문에서 내다 보이는 높은 초원 지대는 그 꼭대기에서 맑은 공기를 한껏 즐겨보라고 그들을 유혹하였다. 이 언덕 목초지는 아래쪽의 골짜기가 흙탕이 되어버려서 그 기막힌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게 막아버릴 때에는 아주 안성맞춤의 대안이 되었다. 어느 기억할만한 아침 메리앤과 마거릿은 소나기 뿌리는 하늘 한쪽에서 비치는 햇살에 끌리기도 했고 이틀 내낸 줄기차게 비가 오는 통에 집에 갇혀 지냈으므로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어서 이 언덕 가운데 하나로 발길을 향했다. (이성과 감성 중에서, p. 58)


『이성과 감성』에서 비가 오는 날에도 산바카라을 즐기는 메리앤을 보면 그녀가 어떤 기질을 가졌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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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아버지를 따라 제주 해안가에서 보말 종류의 해산물을 채집하기도 했다. 1년에 한번 연례 행사처럼 가는 이 길이 매우 좋았다. 주로 아버지께서 경운기를 운전하여 우리들을 직접 데리고 가셨기 때문이다. 보말 한번 줍고, 바다 한번 쳐다보고, 아버지의 채집량도 보고, 동생과 학교 이야기도 나누었으니, 이 일은 단순히 보말 줍기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즐거운 추억 놀이와도 같았다. 이 날따라 아버지도 아이같은 모습으로 더욱 즐거워 보였으니, 그런 모습이 이 날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 시간만큼은 아버지도 현실의 온갖 시름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중학교 시절에 친구들은 바닷가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가 바다 근처에 있기도 했지만, 서로의 속마음과 진심을 공유하는데 해안길 걷기가 최고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답답한 마음을 바닷 바람에 목놓아 소리치며 날려 보내기도 하고, 우리들의 비밀은 파도 소리에 쉽게 파묻힐 수 있었으니, 사춘기 아이들에게 참 좋은 길이었던 것 같다.『설득』에서 앤과 앤트워스 대령도 방파제 길을 걸으며 같은 마음을 느끼지 않았을까 한다.


Gemini_Generated_Image_9j8sm49j8sm49j8s.png제미나이가 그린 <설득>의 한장면


해안가 풍광이 좋기는 하지만, 오름에서 바라보는 풍광에 비길 수 없다. 어머니를 따라 고사리를 꺾으러 몇 번이고 올라갔던 따라비 오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고사리를 좋아하셨던 어머니, 문득 고사리는 어머니의 영혼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걷기는 고사리 꺾기와 동일어였다. 고사리 뿌리가 마을 어귀에서 시작되어 이 따라비 오름까지 뻗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왜냐하면 고사리 채집을 위해 길을 나섰는데 고사리를 찾아서 계속 계속 이어서 가다보니 어느새 따라비 오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오름의 아름다운 풍광을 제대로 누리지는 못했다. 어린 아이에게 그 풍경이 그렇게 돋보적으로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았고, 어린 시절에는 자연이 시야에 크게 들어오지 않기 마련이다. 따라비 오름의 풍경은 내 나이 30이 넘었을 때부터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마치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영지인 펨벌리 경치에 매료된 것과 버금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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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그 계곡 쪽으로 다소 급하게 굽어 있었다. 저택은 크고 위풍 있는 석조 건물로, 오르막에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있었고, 뒤로는 숲이 울창한 구릉이 받쳐주고 있었다. 또 저택 앞으로는 원래 있는 개울을 더 넓혀놓았는데, 인공적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둑들은 형식적으로 가는 것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괜스럽게 꾸며놓지도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기뻤다. 자연의 묘미가 이토록 손대지 않고, 혹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서툰 취향 탓에 훼손되지 않고 이토록 살아 있는 곳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일행은 모두 열렬히 찬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느꼈다. 펨벌리의 안주인이 된다는 것이 대단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언덕을 내려와 다리를 건너 문을 향해 마차를 몰아갔는데, 저택을 더 가까이서 살펴보면서 그녀는 혹시 소유자를 마주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다시 일었다. 객실 하녀가 잘못 안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일행이 집 구경을 부탁하자, 현관 안으로 안내를 했는데. 함께 하녀장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의 여유가 있던 엘리자베스는 자기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해졌다. 하녀장이 왔는데, 점잖아 보이는 나이 지긋한 여자였고 상상했던 것보다 덜 세련됐지만 더 친절했다. 일행은 그녀를 따라 식당 겸 거실로 들어갔다. 갖출 것은 다 갖춘 넓고 배치가 잘 된 방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훅 훑어보고 나서, 창가로 가 경치를 즐겼다. 그들이 방금 내려온 언덕은 위로는 숲이 덮고 있고, 멀리서 보니 더 가팔라 보이는 게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땅의 모양새도 모두 훌륭했다. 그녀는 강이라든가, 둑 위에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들, 구불구불한 계곡 등 눈길이 미치는 모든 전경을 기쁨에 차서 바라보았다. 일행이 다른 방으로 들어서면 이런 경치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어느 창문에서나 저마다 아름다운 볼거리가 있었다. 방들은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가구는 소유주의 재력에 어울리는 것이었으나, 번지르르하지도 쓸데없이 세련되지도 않아 엘리자베스는 그의 미적 안목에 감탄하였다. 로징스의 가구들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오만과 편견> 중에서, 340-341)


돌담길이 익숙하다 보니, 어쩌다 보이는 생울타리 길을 좋아하기도 했다. 무궁화가 촘촘하게 심어진 울타리 길도 있었고, 수국이 울타리처럼 풍성하게 피어있는 길도 있었다. 관목들이나 작은 나무들을 길 양쪽에 빼곡히 심어 놓은 길의 아름다움은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데, 비밀을 공유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바닷길 만큼이나 아이들이 작은 비밀들을 털어 놓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길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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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 19세기 영국에서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제인 오스틴도 소설의 모티브로 쓰기 위해 산울타리를 찾아 나섰다. 시기는 『맨스필드 파크』 집필을 앞둔 시점, 1813년 1월 29일에 제인 오스틴은 언니 커샌드라에게 생울타리를 알아봐 달라고 한다. “가능하면 노샘프턴셔가 생울타리의 본거지인지 알아봐 줘. 그러면 난 다시 기뻐할거야.”『설득』의 생울타리는 인물들이 조심스레 내밀한 이야기를 하는 곳, 심리가 드러나는 곳이다.


하지만 루이자가 웬트워스 대령에게 가까운 생울타리에 있는 견과를 줍자며 함께 멀어져 더 이상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되자 메리는 기분이 나빠졌다...앤은 그들이 부근 어딘가에 있음 직한 생울타리로 가서 그 아래 마르고 햇볕이 잘 드는 둔덕에 동생을 위해 좋은 자리를 찾아냈다...앤은 지쳐서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내 등 뒤 생울타리 쪽에서 웬트워스 대령과 루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생울타리 중앙의 거칠고 험한 통로를 따라 돌아오고 있는 듯 했다. 목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먼저 루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뭔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 중인 것 같았다. (<설득>의 한 장면 중에서, p. 130)


『맨스필드 파크』의 생울타리는 조금 다르다. 이 소설에서의 생울타리는 경계와 구속의 의미, 넘지 말아야 하는 도덕전 기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처럼 그녀가 자주 걸었던 생울타리를 소설의 중요한 기제로 만들어 중요한 의미로 만들어내는 제인 오스틴의 필력에 감동을 받는다.


"네, 확실히 햇살이 환하고 파크도 아주 상쾌해 보이네요. 하지만 불행히도 저 철문, 저 해자 울타리는 제게 구속과 고난의 느낌을 주네요. 그 찌르레기가 노래한 것처럼, 나갈 수가 없잖아요."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철문쪽으로 갔다. 그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열쇠를 가지러 간 러시워스 씨가 왜 이렇게 오래 걸리죠!"

"무슨 일이 있어도 열쇠 없이는, 러시워스 씨의 권위와 보호 없이는 나가실 생각이 없겠지요. 그런 게 아니라면 여기 철문 가장자리로 어렵지 않게 빠져나갈 수 있겠는데요. 제가 조금만 도와드리면요. 정말로 좀 더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으시다면,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은 아니라고 마음만 먹으신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은데요."

"해서는 안 된다뇨! 무슨 말씀이세요! 저리 나가는 거야 제 마음이고, 그렇게 할래요. 러시워스 씨도 금방 돌아올 거잖아요.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갈 것도 아니고요."

"혹시 그리된다면 프라이스 양이 전해 주실 겁니다. 저 둔덕 근처, 그러니까 둔덕 위 참나무 숲 근처에 있을 거라고요."

패니는 잘못된 행동이라 여겨져 말릴 수밖에 없었다. "다치면 어쩌려고, 언니." 그녀는 외쳤다. "저 담장 못에 찔릴 텐데......옷이 찢어질 수도 있고 자칫하면 해자에 빠질지도 모르잖아. 가지마, 언니."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이 사촌 언니는 이미 반대편으로 무사히 내려서서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패니. 하지만 나도 내 옷도 다 무사하네. 그럼 나중에 봐."

패니는 다시 혼자 남았는데, 기분이 영 좋아지지 않았다. 방금 목격한 일들이 거의 다 마음에 걸렸고, 버트럼 양의 행동에 놀라고 크로퍼드 씨한테 화가 났다. (149)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는 시골길과 생울타리를 따라 긴 산바카라을 즐기곤 한다. 그녀가 사는 롱본 주변의 들길과 생울타리는 그녀의 독립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나도 그녀만큼 독립적인 기질을 지녔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오늘은 특별히 "작지만 괜찮은 야생정원"을 즐겨 걸었던 엘리자베스를 나의 고향 고야동산으로 초대하여 오붓하게 걷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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