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요일, 하찮은 이탈의 기록
효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시간의 효율을 엄청나게 따지는 편이다.
이왕 헬스장에 왔으니, 설렁설렁 시간을 보내는 건 내게 허락되지 않는다. 당연히 고강도 운동으로 채워진다.
이왕 도서관에 온 김에, 필사를 하거나 문장 수집을 한두 줄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고나 할까.
‘이왕’이라는 부사는 모든 것이 그렇듯 장점과 단점을 가진다. 단점이라면 나를 약간은 극단으로 몰고 가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늦게 일어난 날에는 이왕 시간이 이렇게 흘러갔으니, 오늘은 그냥 드러누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등교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지각을 하느니 차라리 결석을 택하는 쪽이었다.물론 그런 결석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성격이라, 애초에 늦잠을 자지 않기 위한 나만의 노하우들을 필사적으로 개발해 나갔지만 말이다.
'올 오어 나싱(All or Nothing)', 중간이 없는 흑백 논리, 완벽주의자.
많이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남아있었다. 주말의 하루는 평일처럼 빡빡하게 효율적으로 많은 걸 해내려 애썼으니까.
매일 아침 7시 40분에 알람이 울린다.
평일에는 둘째를 깨우기 위해, 주말에는 내가 일어나기 위해 세팅한 시간이다.
일요일, 오랜만에 실컷 자려고 알람을 껐다.
둘째가 깨워 눈을 떠보니 오전 9시 50분.
아점을 차리고 청소와 스트레칭을 끝내니 어느덧 오전 11시가 훌쩍 넘겨 있었다. 그 사이 아이들과 남편은 시댁에 갔고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평소라면 당연히 운동을 하러 나섰겠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보지 않는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소파에 누워 이 영화 저 영화 들락거리다 파반느,라는 영화를 시작했다. 전혀 기대가 없어서 그런지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37분.
집안 온도는 29도, 더위를 많이 타지 않지만 소파 가죽과 맞닿은 피부가 끈적인다. 더위 타는 식구들이 없어서인지 혼자 에어컨을 틀기도 그렇다.
음... 시간 효율을 따지던 나에게 오후 1시 37분이란 이미 ‘오늘 하루는 그냥, 대에충 흘려보내야 하나’ 싶은 기분이 드는 시간이었다.
운동을 하기에도 애매하고,
준비하고 누구를 만나기에도 어정쩡하며,
그대로 누워있기도 껄적지근한,
아주 모호한 시간.
예전 같았으면 이대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가 저녁이 오는 걸 하염없이 지켜봤을 것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시간을 보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 기분을 박차고 나와 보기로 했다. 온몸에 내려앉은 무거운 공기를 환기하려 빳빳한 수건과 바카라 세 권을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제일 큰 관문을 통과했으니 이제 뜨거운 햇살에 몸을 맡기고 다음 퀘스트를 실행하면 된다.
이렇게까지 나서는 날이면 당연히 운동을 하겠지만, 오늘은 기필코 샤워만 하기로 한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라며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져 본다. 깨끗하게 씻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뿐하고 개운했다. 역시 나오길 잘했다.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어제 읽다 만 백온유 작가의《약속의 세계》를 펼쳤다. 이런 무드에 딱이다. 근처 사는 언니에게 연락을 했고, 언니가 왔다. 신나게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오후 5시. 둘째가 집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온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차리고 집안을 정리한다.
오후 1시 37분은 내가 원하는 하루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오후 1시가 넘었으니 알찬 하루를 보내기엔 글렀다’며 포기하던 기존의 내 틀을 소소하게 깨부순 날. 완벽한 계획 대신 유연함을 선택할 줄 알게 된, 꽤 괜찮게 흘러간 일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