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프게 한 것이 나를 아물게 한다
소유하지 않는 존재로서 비워진 충만 속에 머물고 싶다.
그곳에서 '나'라는 이름을 벗고 온전히 존재하고 싶다.
2026년 4월 26일 일요일
어제 병원에 다녀와 그대로 잠이 끊어졌다. 깨어났을 때 기운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았다. 얇게 금 간 그릇에 물이 고이듯 잠시 무언가가 나를 채운 듯했다. 그러나 손을 대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다시 빈 그릇.
살아난 줄 알고 몸을 움직이면 그때마다 안에 있던 것은 먼저 빠져나간다. 손에 쥐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공기였다는 걸 늦게 안다.
안쪽에는 말들이 있다. 자라다 멈춘 꺼내지 못한 언어들이 벽처럼 붙어 있다.
겉은 비어 있고 안은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하루는 그런 상태로 지나간다.
무너진 것도 아닌데 유지되지도 않는 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안쪽에서만 소모되는 하루.
금이 간 곳마다 검은 물이 배어 나온다.
대상포진 증상인 가려움이 조금씩 나아간다. 가려움은 유혹이었고, 통증은 경고였다. 시원함에 속아 상처를 헤집을 때쯤 찾아온 통증이 나를 멈추게 했다. 고통이 아니었다면 내 몸에 딱지가 앉을 틈이 있었을까.
그냥 뼈가 통째로 아프면서 띠처럼 한 줄로 찌릿, 타는 통증이 기력을 빠지게 하는 것 외에는 잘 지나가고 있다.
나를 아프게 한 것이 결국 나를 아물게 한다.
아픔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허기를 때웠다. 식사가 아니라 ‘처리’에 가까운 행위였다. 대충 집어 든 군것질거리와 컵라면. 일 년을 다 합쳐봐야 나무젓가락을 쪼개는 횟수가 열두 번을 넘지 않았다.
전복의 탱글한 식감을 얹고, 콩나물의 아삭거리는 생동감과 대파, 계란의 노란 온기, 참깨의 고소함까지 더해 ‘요리’로 완성하지 않으면 잘 먹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몸이 부어서 면은 잘 먹지 않았는데 오죽하면 주위에서 신장이 안 좋냐는 말을 자주 들었을까.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정성껏 끓여낸 냄비를 식탁 중앙에 두고 친구와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떠들썩한 작은 잔치를 벌이는 것이 나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몸이 휘청거리자 라면만큼 간편한 안식처가 없었다.
사람들이 라면을 사랑하는 건 맛보다도, 삶의 무게에 짓눌려 무언가를 씹고 삼킬 기력조차 사치스러워진 이들의 마지막 도피처였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은 마른 김에 밥을 돌돌 말아 입안으로 구겨 넣는다. 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챙겨 먹는다는 것에 안도하지만, 가슴 밑바닥에는 메워지지 않는 무엇이 차오른다.
안에서 Concept는 불꽃처럼 튀어 오르는데 출력하기 위한 음운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차단된 것 같다.
표현되지 못한 채 안에서 곪아가는 언어들의 아우성이다.
글이라 함은 영혼을 채우는 일이지만 몸은 제일 간편하고 부실한 음식으로 채워질 때가 많다. 끼니를 때운다는 말의 무게를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잠시 나를 방치하겠다는 고백인지도 모른다.
쌀알이 부딪히는 사락사락한 소리와 채소를 써는 서글서글한 소리가 주방을 채웠으면 좋겠다. 내일의 나는 부디 때우는 존재가 아니라 짓는 존재이기를 소망하면서.
그러나 그 다짐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싱크대 한쪽에 씻지 않은 냄비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제도 그랬고, 그 전날도 그랬다.
과거의 나는 늘 예보되지 않은 통증 앞에 무릎을 꿇었다. 또 아플까 봐 무서워요, 열이 안 내려서 서울에 못 가면 어떡하죠? 같은 말들.
그럴 때마다 의사 선생님은 그것이 다 생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이해하고 난 뒤 그 말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내 삶의 골격이 되어버린, 두고두고 꺼내 보는 말이다.
오전에 몸이 더 무겁고 아픈 이유를 들여다보면 나를 가로막았던 것은 병원이나 병이 아니라 부풀어 오른 나의 '마음'이었다. 그 무게의 팔 할은 물리적인 질량이 아니다. 아프기 때문에 기필코 가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목적지에 닿기까지 지불해야 할 고단함을 미리 가불해온 '마음의 부채'다. 그 부채가 보이지 않는 밧줄이 되어 나를 침대에 결박하곤 했다.
어제까지의 일기장에는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적었다. 죽을 만큼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4월 초, 원장님께 아무 생각이 없다가 요즘 부쩍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생각은 Shorts처럼 하세요."
그 말에 빵 터지고 말았다. 맞다. 내 불안은 알고리즘을 탄 쇼츠와 같다. 한 개를 클릭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망할 놈의 가능성'들.
가다가 넘어지면 어떡하지? 중간에 지치면 어떡하지?
이런 저화질의 불안 영상들이 재생되는 날이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재난을 수습하느라 현실의 에너지를 다 써버린다.
뇌는 멍청하면서도 사랑스럽다.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니까. 그렇다면 결함을 역이용하면 그만이다. 불안을 상상할 에너지를 '설렘'으로 바꾸면 도파민은 몸을 일으킬 강력한 동력이 된다.
원인 모를 불명열이 매일 나를 괴롭히던 시절, 나는 나에게 매일 '뇌물'을 줬다.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반드시 베스킨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것이다. 한 달 아이스크림 값만 십만 원을 훌쩍 넘겼으니 당시 내 혈관에는 피 대신 민트초코가 흘렀을지도 모른다. ㅎㅎ 열이 끓는 와중에도 내일 먹을 플레이버를 생각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병원에 갈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의지가 피어올랐다.
설렘은 '생존'의 에너지다. 늘 호기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조언해 주셨던 원장님은 "넘어지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의 채널을 "안 그럴 수도 있잖아? 혹시 알아, 생각보다 가뿐할지?"라는 가능성의 채널로 돌려주셨다.
내일은 병원에 가고 싶다. 견디기가 힘들다. 글도 10분 쓰고 눕고, 다시 30분 쓰고 눕기를 반복한다. 마음의 무게가 무거워질 때쯤 나는 내일의 나에게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약속할 것이다.
불안이라는 쇼츠가 재생되려 할 때 그것을 가뿐히 위로 스와이프해 넘겨버리면서.
#감정 #통증 #불안 #언어 #생각 #쇼츠 #불명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