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감
EBS 다큐멘터리에서 '놀이'의 중요성을 다룬 영상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유아기에 자연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놀이했던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잘 적응하고, 우리는 성인이 된 후에도 유년기 시절에 놀이했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낸다고 한다.
놀이보다 공부가 우선인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까? 오랫동안 도전을 멀리하고 시련을 덮어둔 채 그저 노는 게 좋았다. 그 이유는 우리 부부가 철없는 막내들이기 때문이라 여겼다.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평생 철들고 싶지 않았다. 지천명의 나이가 가까워진 요즘은 생각이 좀 다르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놀이의 시간은 나답게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두 달 동안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를 여행했던 2018년 봄이 나다운 놀이의 출발점이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분명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다. 하지만 유럽 여행을 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맛봤다. 정확히 말하면 해방감을 느꼈다. 아무도 섣불리 우리를 평가하지 않았다. 아니, 평가를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듯하다. 여행자의 여유로운 마음은 유럽인들의 일상과 잘 맞았다. 유명한 관광지 또는 동양인이 우리뿐인 시골 마을을 다니는 동안 많은 이들이 호기심 어린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따뜻한 시선들이 고마워 나도 발길 닿는 곳들을 평가하는 대신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들의 문화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했다. 그 마음을 알아주듯 다시 돌아오는 미소와 친절이 참 고마웠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네고 통하지 않는 언어를 주고받으며 짧고 작지만 포근한 마음들을 나눴다.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며 제주 이주를 결심했다. 제주와 크로아티아의 돌은 다르지만 돌담과 구옥이 주는 느낌이 어딘가 비슷했다. 호텔이 아닌 가정집들에서 숙박하며 한 달 동안 그들의 삶에 살포시 녹아들었다. 근처 마트로 장을 보러 가고, 주방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 먹고, 렌터카를 타고 여행을 다니며 깨달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는 더 이상 서울에서 살 수 없겠구나. 나는 이제 여행하기 전과 다른 사람이구나.'
여행 전에는 서울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첫 장기여행은 그런 나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두 달 만에 우리는 제주로 이주했다.
유럽에서 우리가 추구했던 건 일상 같은 여행이었다. 제주에 와서 우리의 추구미는 여행 같은 일상이 되었다. 제주로 여행온 김에 일을 한다는 느낌으로 주말마다 정말 뽀로로처럼 신나게 놀았다. 천리향, 벚꽃, 유채꽃, 배롱나무, 메밀꽃, 억새, 동백. 계절마다 꽃구경은 물론이고 오름 지도를 구입해 봄과 가을에는 오름에 올랐다. 여름에는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바다에서 오리발을 끼고 스노클링을 즐겼다. 겨울에는 한라산 1100 고지의 눈꽃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남편과 단 둘이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걱정에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실컷 노는 생활이 지속되자 삶은 환희와 행복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즐거웠다. 제발 아침이 오지 않길 바라며 잠들고 겨우 일어나 억지로 출근했던 서울에서의 삶과 제주의 삶은 퍽 달랐다. 여기서도 일 하기 싫은 건 비슷하고 서울과는 다른 제주의 업무 방식에 적응하느라 꽤나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신기하게도 제주에서는 온라인 게임의 스트레스를 집까지 가져오지 않았다. 차로 출퇴근 길에 해안도로를 달리며 지금 이 순간에 제대로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어릴 적 마당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다. 돌이 무성한 높은 계곡을 어른들보다 더 빠르게 올랐다. 활발한 만큼 자주 넘어져 양쪽 다리는 언제나 멍으로 가득했다. 그 시절, 나다운 것은 여성스럽지 못한 것이 되었고 그 평가와 애정 어린 걱정에 나다움을 좀처럼 펼치지 못했다. 자연 속에서 마음껏 놀자 본래의 내가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당시 우리 부부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젊음을 낭비한다며 혀를 찼을 것이다.(크게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양가 어른들의 마음이 그러하셨으리라.) 하지만 실컷 놀고 나서야 흐리고 춥고 어두운 제주의 겨울에 바카라을 펼쳐 들기 시작했다. 만족스러운 놀이의 시간은 마음에 새로운 배움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노는 게 제일 좋다. 노는 건 중요하다. 나답게 노는 건 행복 그 자체다. 행복한 시간은 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다. 놀이에 몰입했던 경험은 행복에 몰입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매주 목요일 밤 9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