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1815년, 조선 시대 화산성 소빙하기 대가뭄

연쇄적인 화산폭발로 인한 화산성 소빙하기가 조선을 덮쳤다

by이월

1809~1810년의 기경대기근(己庚大飢饉)과 1814~1815년의 갑술대기근(甲戌大飢饉)으로 명명된 두 차례의 대가뭄은 한반도 남부 곡창지대의 농업 기반을 붕괴시켰습니다. 당시 조선 인구 약 1,400만 명 중 24.3%에 달하는 약 340만 명이 기아와 동사,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은 전근대 조선 슬롯가 경험한 최악의 재앙이었습니다.

1810년대 조선 반도에 발생한 극단적인 기상 이변은 이 시기에 태양의 흑점 활동이 현저히 감소하여 지구로 유입되는 태양 복사 에너지가 줄어든 달튼 극소기(약 1790-1830년)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습니다. 달튼 극소기의 기저 한랭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발생한 연쇄적인 대형 화산 폭발은 기후 변동성의 폭을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증폭시켰습니다.

화산성 겨울과 성층권 에어로졸

1809년, 현재까지 정확한 위치가 규명되지 않은 열대 지역의 거대 화산(화산폭발지수 VEI 6 규모 추정)이 폭발하면서 화산성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빙하 코어의 황산염 농도 분석에 따르면 이 폭발은 훗날 발생할 탐보라 화산에 필적할 만한 막대한 양의 이산화황(SO₂)을 성층권으로 뿜어냈습니다.
연이어 1812년 카리브해 세인트빈센트섬의 라 수프리에르(La Soufrière, VEI 4), 1813년 일본 스와노세지마(Suwanose-jima, VEI 4), 1814년 필리핀 마욘(Mayon, VEI 4) 화산이 차례로 폭발하며 대기권의 에어로졸 층을 두텁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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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쇄적인 화산폭발의 정점은 1815년 4월 인도네시아 숨바와섬에서 발생한 탐보라 화산 폭발(VEI 7)이었습니다. 탐보라 폭발은 지난 2,000년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화산 활동으로 기록되며, 최대 1억 2,000만 톤에 달하는 황 화합물을 고도 43km의 성층권까지 쏘아 올렸습니다.
이 에어로졸 안개 층은 태양으로부터 유입되는 단파 복사 에너지를 우주로 반사시켜 대류권으로 들어오는 일사량을 급감시켰습니다. 그 결과 북반구 전체의 기온이 0.4°C에서 0.8°C 이상 급강하하는 '화산성 겨울(Volcanic Winter)'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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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하계 몬순(EASM) 순환의 변화

조선 농업은 봄과 여름철에 강수량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집니다. 여름철 북반구가 가열되면 유라시아 대륙 지표면이 해양보다 빠르게 뜨거워지면서 강력한 열적 대조 현상이 발생하고, 이 온도 차이로 인해 형성된 기압 경도력이 북태평양의 습하고 더운 수증기를 한반도로 밀어 올리는 것이 몬순의 기본 동력입니다.
그러나 성층권 에어로졸에 의해 태양빛이 차단되면서 유라시아 대륙 지표면의 온도가 오르지 못했고, 대륙과 대양 간의 열적 대조가 임계점 이하로 약화되었습니다. 육지의 증발량이 감소하고 몬순 순환이 동력을 상실함에 따라, 한반도와 중국 북부 일대에는 극단적인 건조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더불어, 열대 화산 폭발은 대류권 상부의 남북 간 기온 경도를 강화시켜 동아시아 아열대 제트기류(EASWJ)의 속도를 증가시키고 그 위치를 남쪽으로 편향시켰습니다. 기류가 남하하면서 북태평양 고기압의 정상적인 북상을 가로막았고, 한반도 위로 올라와야 할 수증기 통로가 원천 차단되었습니다.

조선의 기록 유산 - 승정원일기

조선 국왕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작성된 『승정원일기』는 조선 왕조의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전기 기록을 제외하고 인조 1년(1623)부터 순종 4년(1910)까지 285년간의 기록만 3,245바카라에 달하며, 글자 수로는 약 2억 4,250만 자에 이르는 세계 최대 단일 역사 기록물입니다.
승정원일기를 통해 17세기부터 19세기의 여름철 강수량 변화를 현대적 단위(mm)로 정밀하게 기록하여 1809년과 1815년에 조선에 닥친 대가뭄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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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행정 기록 - 『조선왕조실록』

왕의 사후에 편찬되는 조선왕조실록 역시 객관적인 재난 현황을 보여줍니다. 실록청 사관들은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직필의 의무를 지녔으며,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의 관료 시스템이 재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고스란히 남겨졌습니다. 특히, 조선 중앙 조정은 농업 생산량 파악을 위해 각 도의 관찰사와 군현의 수령들이 가뭄이나 홍수로 인한 피해를 조사하여 작성했습니다.

기근이 극심해지면, 각 고을 수령은 유랑민의 수와 굶주리는 백성의 실태를 파악하여 구호 곡식을 요청하는 진휼보고를 올렸습니다. 이 기록물들을 통해 1809-1810년과 1814-1815년 기근 당시 도별 아사자 통계, 진휼 대상자 인원, 지급된 곡물의 양(석) 등이 단위 하나 틀리지 않고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기경대기근의 참상 (1809-1810)

가뭄의 피해는 한반도의 주요 곡창 지대인 남부 지방,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 치명적으로 집중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실학자이자 관료였던 다산 정약용은 신유박해 이후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어 있었으며, 이 생지옥의 참상을 자신의 문집과 편지 등에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전라도 강진에서는 1809년 2월 초부터 8월 초까지 무려 6개월이라는 장기간 동안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가혹한 건조 기후 속에서 대나무는 새순을 밀어내지 못했고, 소나무조차 솔방울을 맺지 못했습니다. 하천은 바닥을 드러냈고, 우물과 샘이 모두 말라붙었으며, 수원지가 사라지자 민물고기와 우렁이, 심지어 연안 바다의 조개류마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막대한 수자원을 필요로 하는 친수성 작물이자 조선 농업의 근간인 벼농사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강진 지역에 속한 총 6,000결(약 29만 4,000에이커, 1결=4.9에이커)의 논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4,000결은 물이 없어 아예 모내기조차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2,000결의 논조차도 계속된 가뭄으로 벼의 70~90%가 타들어 갔습니다. 그 결과, 그해 가을 수확량은 전체의 1.7%에서 최대 10%(100~600결)에 불과했습니다.

이웃 도시인 나주 관할의 논 17,000결 중 13,000결이 모내기를 하지 못했고, 수확에 성공한 논은 5.9%~11.8%에 그쳤습니다. 1809년 7월 중하순에 이르자 시장에서 거래될 곡식은 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유층조차 식량을 구하지 못해 쌀 대신 보리죽으로 연명해야 했으며, 은과 금을 짊어지고 저잣거리에 나가도 곡식을 살 수 없는 화폐 경제의 붕괴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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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소와 말 등 농사에 필수적인 가축을 먹일 수 없게 되자 이를 도축하여 식량으로 삼았고 다음 해 가축이 없어지자 농사를 더 짓기 어려워졌습니다. 식량이 동나자 육지에서는 생계형 도적과 화적 떼가 횃불을 들고 부유한 집을 약탈했고, 해상에서는 어시장과 상선, 어선을 습격하는 해적이 들끓었습니다.
관아에 구휼을 요구하며 모여든 유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관아에서 제공하는 구호죽마저 쌀의 양은 턱없이 부족하고 겨와 모래가 절반 이상 섞여 있어 이를 섭취한 이들은 어지럼증과 심한 구토 등 위장 질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추웠던 그해 겨울

식량이 극도로 결핍되어 면역력이 바닥에 떨어진 백성들을 향해 다가온 것은 화산성 겨울의 가혹한 혹한이었습니다. 1809~1810년의 겨울은 평상시 소빙하기(LIA, 1350-1850)의 평균 기온보다 0.7°C에서 0.8°C가량 더 추웠습니다. 살기 위해 유랑 길에 나선 피난민들은 혹한 속에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갔습니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여 위생 상태가 불결한 구호소에 수만 명의 인파가 밀집하고 식수가 오염되면서, 이질과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감염병은 물론 천연두, 홍역 등 치명적인 전염병이 유행했습니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1809-1810년 기경대기근으로 인해 희생된 조선 백성의 수는 전체 인구의 약 7.8%에 달했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홍경래의 난 (1811-1812)

기경대기근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조선 후기 체제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1811년 음력 12월, 평안도 일대를 휩쓴 홍경래의 난은 극단적인 기후 스트레스가 중앙의 수탈 및 봉건적 차별 체제와 충돌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조선의 서북 지역(평안도 일대)은 청나라와 사행 무역이 번성하면서 상업과 수공업, 광산 채굴 등 신흥 경제 체제가 활성화되고 있었습니다. 거점 상인들이 거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를 기반으로 경영형 부농과 서민 지주들이 등장하며 인구 부양력도 상대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그러나 중앙 권력을 독점한 세도정치 세력은 서북민에 대한 정치적 차별을 심화했고 평안도 출신이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고위 관직에 오르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습니다. 부를 획득하고도 정치적 신분 상승이 막힌 현실에 서북 지역 지식인과 신흥 상공업 계층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반란을 주도한 홍경래 역시 재능이 뛰어났으나 관직 진출이 가로막힌 몰락 양반 출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 불만이 심해지던 와중 1809~1810년의 기경대기근이 발생했고 부패한 지방관과 아전들이 백성을 구휼하기는커녕 청나라 사신 접대 비용과 과도한 조세를 착취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홍경래와 우군칙 등 반란 지휘부는 슬롯적 불만과 기후 재난으로 큰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조직화했습니다.
그들은 평안도의 거부이자 역졸(양인 또는 천인, 슬롯적으로 매우 낮은 대접을 받음)인 이희저를 포섭하여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상업 자본을 바탕으로 반란군은 가산 다복동에 비밀 기지를 세우고, 운산 금광 개발을 미끼로 가뭄에 굶주린 광산 노동자와 유민, 빈농 수천 명을 꾀어내어 임금을 주고 훈련시키며 사병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반란과 진압

1811년 12월, 홍경래가 스스로를 '평서대원수'라 칭하며 봉기를 일으키자 서북 지역 슬롯는 즉각적으로 호응했습니다. 반란군은 불과 며칠 만에 가산, 박천, 곽산, 정주 등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을 장악했으며 이는 억압에 시달리던 향임층과 상인,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길을 안내하고 성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란군은 조선의 수도 한양(지금 한국의 수도 서울)으로의 남진을 꾀했으나 안주목사 조종영과 관군의 진압에 정주성으로 후퇴하여 고립되었습니다. 5개월간의 농성을 끝으로 1812년 4월 관군에 의해 성은 함락되었고 홍경래는 전사했으며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이후 포로로 잡힌 2,983명 중 여성과 10세 이하 소년을 제외한 성인 및 청소년 남성 1,917명이 전원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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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대기근 (1814-1815)

필리핀 마욘 화산과 태평양 일대의 연쇄적 화산 폭발이 다시금 아시아 몬순 기후에 큰 교란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1809년에 이어 두 번째 대 가뭄이 한반도를 덮치며 1814~1815년의 갑술대기근이 발발했습니다.

기경대기근과 매우 유사한 패턴으로 극심한 봄 가뭄으로 인해 여름 보리 수확이 실패로 돌아갔고, 가뭄이 가을까지 이어지며 주식인 벼농사가 궤멸하여 이듬해 초여름까지 무려 12~13개월간 잔혹한 기근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체감되는 파괴력은 이전보다 훨씬 컸습니다.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경상도 지역의 곡물 가격 변동이 기경대기근보다 1.5배에서 2배가량 더 높았습니다. 이는 1809년의 1차 타격으로 인해 농민들이 비축 식량과 가축, 종자 등 위기 대응 자본을 모두 소진한 상태에서 또다시 가뭄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인구의 40%가 구호 식량을 배급받다

조선 조정이 1815년 9월에 중앙으로 취합한 구휼 현황 보고(진휼장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구호 식량을 배급받아야 하는 굶주린 백성(기민)의 수는 약 553만 명으로 조선의 총인구 약 1,400만 명으로 추산할 때 40%에 육박했습니다. 타격은 남부 지방에 집중되어, 전체 기민 중 경상도와 전라도가 차지하는 비율이 각각 45.8%와 40.9%에 달했다. 전국 굶주린 자의 86%가 두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가뭄 직후 1814년 후반과 1815년에는 대기가 불안정해지며 갑산, 삼수, 신천, 공주 등지에서 예기치 못한 대규모 집중 호우와 홍수가 발생하여 설상가상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극심한 영양실조에 수해까지 겹친 백성들 사이에서 '호열자(콜레라)'를 비롯해 천연두, 장티푸스 등의 끔찍한 전염병이 다시 창궐했습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1814-1815년 갑술대기근으로 인해 희생된 조선 백성의 수는 약 231만 명으로, 조선 인구의 17.8%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를 1809년의 1차 재난 사망자 비율(7.8%)과 합산하면, 불과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전체 인구의 약 24.3%에 해당하는 약 340만 명이 자연재해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1815년 4월, 대재앙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 탐보라(Tambora) 화산 폭발이 발생하며 성층권을 덮은 이산화황의 양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폭발 직후인 1816년 유럽 등 서구와 동아시아의 조선은 대조적으로 기후 변화에 대한 상반된 결과물을 맞이했습니다. 이는 각 슬롯에서 선택한 식량 생산 체계와 방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 것으로 분석됩니다.

서구의 재앙: 여름 없는 해

탐보라 화산 폭발로 발생한 기후의 급격한 한랭화는 1816년 북반구, 특히 서유럽과 북미 지역에 "여름 없는 해"로 불리며 사상 최악의 한파와 기상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뉴잉글랜드와 캐나다 동부에서는 6월에 엄청난 눈보라가 치고 여름 내내 서리가 내렸습니다. 유럽 역시 비정상적으로 기온이 곤두박질치고 끊임없는 폭우와 홍수가 이어졌습니다.
서양의 주곡 작물은 밀, 귀리. 감자 등 밭작물(Dry-field crops)이었습니다. 이 작물들은 본래 서늘한 기후에 강한 편이나, 생육기에 지속적으로 쏟아진 차가운 비와 서리는 농작물을 뿌리째 썩게 만들었습니다.
스위스와 아일랜드, 독일 등지에서는 감자와 밀 수확량이 20~50% 이상 급감했고 곡물 가격이 400~500%까지 치솟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의 상흔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인 유럽은 이 화산성 냉해로 수십만 명이 아사했으며, 대규모 인구 이동과 폭력적인 식량 폭동이 대륙 전역에서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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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례없는 대풍작

조선은 1816년부터 1818년까지 오히려 유례없는 대풍작을 기록하며 기근에서 벗어났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연례 작황 보고를 분석한 결과, 1816년 흉년을 보고한 군현은 전국 336개 중 51곳(15.2%)에 불과했으며, 조세를 면제받은 농지도 전국의 13.2% 수준에 그쳤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 등 남부 지방은 대규모 풍작을 기록했습니다.
동아시아의 주곡 작물인 '벼'는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보리나 밀보다 2배 이상 높은 고효율 작물이나, 물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극단적인 친수성 작물입니다. 반대로 파종기와 생육기에 풍부한 수분만 보장된다면, 기온이 다소 낮아지더라도 높은 수확량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탐보라 폭발 이후 대기 대순환이 요동치면서 발생한 화산 유도성 엘니뇨 현상은 북서태평양의 해수면 온도 패턴을 변화시켜, 1816년 동아시아 지역에 평년 이상의 막대한 몬순 강수를 유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816년의 서늘한 기온 속에서도 풍부하게 쏟아진 비는 조선의 논을 가득 채웠고, 이는 벼농사의 풍작을 이끌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경세론

참혹한 재난을 전라도 강진 유배지에서 목격하고 기록한 지식인 다산 정약용은 조선의 봉건 체계와 국가 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에 대한 내용을 1817년 『경세유표』, 1818년 『목민심서』 등 저술하며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는 평상시 세금 문제와 백성의 부 축적 문제, 관료의 청렴(율기)과 절검을 강조하며, 재난 관리를 지방관의 가장 중요한 덕목(애민)으로 규정했습니다.

현대 지구는 인위적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기후 변화와 이상 기후의 일상화라는 위협 아래 일부 현대 과학계에서 화산 폭발의 에어로졸 효과를 통해 지구를 냉각시키는 '기후 개입' 전략을 논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19세기 초 조선과 서구의 화산성 소빙하기 대가뭄 및 기근 사태를 보면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지구 대기 순환을 교란하는 행위는 기후의 예측 불가능성을 높이며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첨단 기후 예측 모델의 고도화뿐만 아니라, 농업과 경제 체제를 다변화하고 슬롯적 불평등 완화, 슬롯적 복원력(Social Resilience)을 확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전 세계적인 과제가 되었습니다.


References

위 글은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만들어진 글입니다.

Cascading impacts of the Maunder Minimum on rainfall and society in the Joseon dynasty - https://www.researchgate.net

Two severe famines (1809-1810, 1814-1815) in Korea during the last stage of the Little - CP

Little Ice Age volcanism, Dalton minimum, Year Without a Summer, Mount Tambora - Wikipedia

The unidentified eruption of 1809: a climatic cold case - https://cp.copernicus.org/

https://www.volcanocafe.org/1809-the-missing-volcano/

Tambora 1815 as a test case for high impact volcanic eruptions: Earth system effects - https://pmc.ncbi.nlm.nih.gov/

Successive volcanic eruptions (1809–1815) and two severe famines of Korea (1809–1810, 1814–1815) seen through historical records - https://www.researchgate.net/

Climatic Aftermath of the 1815 Tambora Eruption in China 1. Introduction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 국립전주박물관

홍경래의 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www.hma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