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3,000만 명에서 최대 6,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
19세기 후반, 정확히 1876년에서 1879년, 그리고 1896년에서 190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전 지구를 강타한 극심한 기근은 최소 3,000만 명에서 최대 6,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참사였습니다. 역사가이자 도시 이론가인 마이크 데이비스는 그의 저서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트』를 통해 이 참극의 실상을 알렸습니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전통적으로 홀로코스트라는 용어는 나치 독일이 자행한 600만 명의 유대인과 같이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학살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주창한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트'는 '시장 경제'와 '제국주의적 무관심'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식민 통치자들이 굶주림을 인위적으로 조장하거나 악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수천만 명이 아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데이비스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본의 축적』에서 언급한 "자본주의 확장이 남반구에 가한 영구적 폭력"의 연장선상에서 이 사태를 분석했습니다. 희생자들이 세계화 과정에서 경제적·정치적 구조에 강제로 편입되는 바로 그 과정에서 학살당했음을 주장합니다.
자유주의 경제학과 인구론
빅토리아 시대의 제국주의 관료들은 애덤 스미스,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등이 주장한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과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을 맹신했습니다. 이들은 흉작으로 인해 곡물 가격이 폭등하는 상황에서도 가격 통제나 식량의 이동 제한을 "시장의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행위"로 규정했습니다.
또한, 다윈주의적 인종 우월주의와 맬서스의 이론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량 아사 사태를 '과잉 인구를 조절하기 위한 자연의 섭리'로 치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구호 정바카라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방해받았으며, 오히려 식량은 굶주리는 현지에서 유럽의 중심부로 꾸준히 수출되었습니다.
19세기말, 엘니뇨-남방진동(ENSO)
1876년에서 1878년에 걸쳐 아시아, 브라질, 아프리카를 강타한 동시다발적인 대가뭄은 엘니뇨-남방진동(ENSO)의 영향이 컸습니다. 현대 고기후학자 딥티 싱 등의 연구진이 전 세계의 나이테 데이터와 해수면 온도(SST) 복원 기록을 분석한 결과, 1876~1878년의 가뭄은 지난 800년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극심한 규모였음을 밝혀냈습니다.
이 이례적인 재난은 1870년부터 1876년까지 관측 사상 가장 긴 라니냐 현상이 발생하며 서태평양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막대한 양의 온수 풀(warm pool)이 트리거로 작동했습니다. 축적된 에너지는 마치 힘껏 당겨진 고무줄이 풀려버린 것처럼 1877년에 이르러 반대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튕겨 나가며 16~18개월간 기록적인 엘니뇨를 촉발했습니다.
전 지구적 생태계 붕괴
엘니뇨의 영향으로 동아시아 및 남아시아의 몬순은 완전히 소멸하여 인도, 중국 북부, 한반도, 인도차이나 반도에 강우가 멈췄습니다. 남반구 및 기타 열대 지대에서는 극심한 가뭄이 발생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이집트, 수단, 모로코 및 남아프리카 공화국, 라틴아메리카의 브라질 북동부 제르탕(Sertão), 심지어 호주와 북미 서남부 지역까지 극심한 건조기에 접어들었습니다.
1896년에서 1902년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엘니뇨와 기후 교란이 연이어 발생하여 생태계의 회복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기후적 요인은 희생의 필요조건이었을 뿐, 그것을 대량 학살로 변환시킨 것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정바카라이었습니다.
대영제국과 인도
인도는 이 시기 가장 뼈아픈 희생을 치른 지역입니다. 1876~1878년 대기근 기간에만 560만 명에서 960만 명이 사망했으며, 1896~1897년(약 500만 명), 1899~1900년(100만~450만 명) 기근을 포함하면 희생자 수는 최소 1,500만 명을 상회합니다. 영국은 이 시기 인도에 철도와 전신망을 구축하여 인도의 근대화 성과로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가뭄으로 흉작이 닥치자 철도는 기근 지역으로 구호 식량을 나르는 대신, 현지의 잉여 식량을 매집하여 항구로, 나아가 런던으로 빼돌리는 진공청소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기근이 가장 심했던 1875년부터 1900년 사이, 인도의 연간 곡물 수출량은 300만 톤에서 1,000만 톤으로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이는 무려 2,500만 명의 인도인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영양분에 해당하는 양이었습니다.
전신망은 상인들이 글로벌 곡물 가격 상승에 맞춰 매점매석을 단행하게 만들어 식량 가격 폭등을 부채질했습니다. 1877년 수백만 명의 인도 민중이 길거리에서 아사하고 있던 시기, 인도 총독 리턴 경은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 여제로 추대하는 성대한 델리 다르바 축제를 개최하며 500만 파운드라는 천문학적 국부를 탕진했습니다. 반면 구호 예산은 극도로 통제되었습니다.
기근 위원장 리처드 템플 경은 이른바 '템플 임금'이라는 구호 기준을 도입하여, 철도 건설 등의 중노동을 수행하는 조건으로 하루 1.25파운드(약 570그램)의 곡물과 약간의 콩류를 지급했습니다. 이는 성인에게 하루 1,600칼로리를 제공하는 수준으로, 현대의 나치 강제 수용소 배급량보다도 못한 임금이었습니다.
이러한 참상은 윌리엄 웨더번과 앨런 옥타비안 흄 같은 일부 양심적인 영국 관료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으며, 훗날 이들이 인도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인도 민족주의 운동을 촉발하는 정치적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청나라의 멸망과 중국 북부 기근
1876년에서 1879년 사이 중국 북부의 산시, 허난, 즈리(현재의 허베이), 산둥 등 5개 성을 휩쓴 정무기황(丁戊奇荒)은 약 950만 명에서 1,3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엘니뇨로 인한 강수량 부족이 직접적 원인이었으나, 이 재난을 극단으로 몰고 간 것은 청나라의 국가 역량 쇠퇴와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중앙 집권 체제는 잘 조직된 국가 식량 저장 시스템을 통해 기근에 효과적으로 대비해 왔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 서구 열강의 침략과 내전으로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군비 지출이 강요되었고, 이는 국가 재정의 파탄을 초래했습니다. 특히 피해가 집중된 산시성에서는 인구 1,500만 명 중 550만 명이 아사했습니다.
험준한 산악 지형 탓에 외부의 구호 식량이 도달하기 어려웠으며, 티머시 리처드나 아서 헨더슨 스미스 같은 서양 선교사들의 구호 활동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명이 나무껍질을 벗겨 먹거나 진흙을 파먹다 못해 자식을 시장에 내다 팔고 극단적인 인육 섭취에 의존하는 지옥도가 펼쳐졌습니다.
의화단 운동
이러한 기후, 경제적 문제는 1898년 황하 대홍수와 1899~1900년의 연속적인 가뭄으로 이어졌습니다. 생존에 대한 북중국 농민들의 고통은 외세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었습니다. 가뭄으로 유랑하던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를 돕고 서양 세력을 멸한다)"라는 구호로 의화단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기근과 제국주의로 수탈에 대한 민중의 필사적인 저항이 있었으나 이 봉기는 서구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중국은 또 한 번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게 되며 제국의 완전한 붕괴를 맞이하게 됩니다.
브라질 북동부 대가뭄과 카누두스 대학살
브라질 북동부 세르탕 지역에서 발생한 그란데 세카(Grande Seca, 1877~1879)는 브라질 역사상 최악의 기상재해로, 전체 80만 명의 인구 중 40만 명에서 50만 명이 아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 지역의 비극 역시 글로벌 자본주의 시장 편입에 따른 농업 구조의 왜곡에서 발생했습니다.
19세기 브라질 북동부 경제는 세계 시장의 수요에 맞춘 사탕수수와 면화 등 단일 경작 시스템에 깊이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호치니스무(맹목적으로 구시대적 관행을 따르며 발전을 꾀하지 않는 농업 방식)로 불리는 무분별한 벌채, 화전 농업, 그리고 광범위한 방목은 토양 침식을 가속화했고 생태계를 기후 변화에 극도로 취약하게 만들었습니다. 1877년 엘니뇨로 인해 겨울비가 내리지 않자, 척박한 땅에 의존하던 소작농과 목동들은 순식간에 아사 위기에 처했습니다.
유랑민들은 해안 도시 포르탈레자로 몰려들어 인구 2만 5천 명의 도시에 11만 4천 명의 난민이 유입되었습니다. 브라질 제국 정부의 구호는 참당할 정도로 실패했습니다. 인산인해를 이룬 난민 수용소에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여 시체가 길거리에 방치되어 1877년 12월 한 달에만 포르탈레자에서 1만 5천 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카누두스 전쟁
대가뭄과 정부의 대처 실패로 결국 1890년대 초 농민 봉기가 발생했습니다. 안토니오 콘셀례이루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가난한 농민과 기근 생존자들이 바이아 주 오지에 카누두스라는 자치 공동체를 건설했습니다. 공화정을 타도하고 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의 규모가 3만 명에 달하자, 신생 브라질 공화국 정부는 이들을 근대화의 걸림돌이자 반역으로 규정하고 정규군을 파견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