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ing for My Father 1

서문 & Chapter 1

bysiwoo

- 序文


오래전 영화 《Searching for Sugar Man》을 보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나 행방이 묘연했던 한 가수의 자취를 추적해 나가는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결국 그가 미국에서 소시민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고, 영화를 계기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되는 결말이 깊은 잔상을 남겼다. 처음으로 홀로 극장에서 보았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과거의 잊힌 행적을 찾아내어 현재 나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서사를 본능적으로 나는 좋아하는 듯하다.


그런 영화 속 얘기처럼, 나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고 불과 닷새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병석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신 직후였다고 한다. 당신의 삶에 나의 존재가 닿았음을 알고 가셨다는 사실은 내게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유년 시절의 기억은 온전히 어머니와 누이들의 이야기로만 채워졌다. 나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오직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경험해 본 적도,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가 내게 남긴 것은 유전자였다. 가정을 이루고 딸아이를 낳아 부모로서의 역할을 어설프게나마 해내고 있는 나를 보며 인간의 진화론과 유전자론을 수긍하곤 한다. 부모로서 자식을 보호하고 키워내는 본능은 이미 우리 유전자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리라.


여기 온라인카지노북인 [자아록]에 담긴 어린 날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사춘기를 통과하며 끊임없이 몰아쳤던 공허함과 알 수 없는 그리움의 근원이 모두 누군가의 부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는 어린 감성에 거대한 공백으로 남아있었고, 나는 삶의 마디마다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또 실패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친척들의 귀동냥을 통해 들었던 아버지의 짧은 생애가 떠올랐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일본과 중국, 북한을 거치며 성장한 아버지는 6·25 전쟁이 터지기 전 사촌 누나와 함께 단신으로 월남하셨다. 얼마 뒤 터진 전쟁은 이북에 남겨진 가족과의 영원한 이산(離散)으로 이어졌다. 혈혈단신이 된 아버지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셨고, 훗날 신문기자가 되어 당대의 지식인으로 활동하셨다.


전쟁 중 피난 수도였던 부산에서는 바카라장사를 하며 소중한 친구들을 만났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두 딸을 얻었다. 신문사 기자로서 해외 취재를 다닐 만큼 번듯한 슬롯생활을 영위하셨고, 당시 흔치 않던 식모를 둔 집과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였던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입주할 정도로 성공적인 삶을 일구어 내기도 하셨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해 시작했던 자영업에서의 고초, 그리고 고향과 가족을 잃은 이산가족의 한을 달래기 위함이었을까? 끊임없이 마셨을 독한 술은 결국 간경화라는 병마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1972년 5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으신 뒤 며칠 뒤, 약 41세라는 너무도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정말로 짧은 몇 줄의 문장으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롭고 대단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고 짧은 삶이었다.


그저 어렴풋한 이야기로만 떠돌던 아버지의 삶이 구체적인 실체로 다가온 것은 낡은 앨범을 뒤지다 발견한 조그만 쪽지 한 장 덕분이었다. 부산 피난 시절 만나 평생을 함께했던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분이 아버지의 병상에서 듣고 받아 적어둔 짧은 연대기였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까지의 내력이 담긴 그 쪽지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척박하고 암울한 시대를 버텨낸 증조부와 할아버지 대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비로소 가문의 내력과 아버지의 젊은 날을 직면하면서, 아버지의 삶에 대한 치열한 집착과 강인한 생명력이 왜 나에게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닳아 없어지기 직전의 쪽지 기록을,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감상과 생각을 [자아록]에 조심스럽게 적어둔다.


2026년 10월 16일, 파주와 서울에서 기록하다.




chapter 1


祖父 沈龍澤은 咸鏡道 定州郡에서 부유하게 생활하였으며 그 아들 沈相俊을 日本 東京으로 유학까지 시킬 정도이었음."


증조부 심용택은 함경도 정주군(정평군)에서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셨으며, 아들 심상준(할아버지)을 일본 도쿄로 유학 보낼 정도의 재력을 지닌 분이셨다. (훗날 아버지가 증조부의 함자인 '심용택'으로 개명하셨는데, 어떤 연유로 증조부의 이름을 채용하셨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당시 증조부가 거주하셨던 함경도 정주는 함흥평야의 풍요로운 농지이자 중국 대륙과 연결되는 교통·무역의 요충지였다. 일제강점기 초·중기 개항과 함께 상업과 대륙 무역, 농업을 기반으로 막강한 부를 축적한 유력 유지 가문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자녀를 일본 도쿄로 유학 보낸다는 것은 엄청난 등록금과 현지 체류비를 감당할 수 있는 조선 최상위 엘리트 가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도쿄 유학은 단순히 부의 과시를 넘어, 당시 조선 슬롯에서 근대적 신학문과 지식을 독점하던 최고 지식인 계층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 풍족한 가문의 자산과 할아버지의 학구열은 훗날 아버지의 짧은 생에 강력한 동기로 작동했을 것 같다.


父 沈相俊은 함경도 정주군에서 구식으로 결혼 후 자녀까지 몇을 두었으나 중국의 신식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도쿄로 유학하였으며 이때 신식 공부를 한 여자와 다시 결혼하게 되었음(한차복). 여기서 남매가 출생했는데 고 심용택(본명 심동민)과 그의 누이동생 정희이었음."


할아버지 심상준은 고향 함경도 정주에서 전통적인 구식 간택을 통해 결혼을 하고 이미 몇의 자녀를 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뒤로한 채 일본 도쿄라는 타향으로 먼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낯선 이국땅으로 떠난 배경에는 신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주체할 수 없는 학구열과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려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오늘날 우리 가문의 뿌리를 이어지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유학 생활 중 배움에 대한 열망이나 이국에서의 깊은 고독 때문이었을까,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신학문을 배우던 '신여성' 한차복(친할머니)을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의 아버지인 故 심용택(본명 심동민)과 고모 심정희 남매가 태어났다.


이 기록을 접하며 아버지가 이국땅인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1920~1930년대 일제강점기 도쿄 유학 시절은, 한편으로는 서구 근대 학문과 사상을 접하던 열띤 시대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감시, 그리고 관동대지진(1923) 이후 한층 심화된 불안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 했던 시기였다. 전통적인 구식 가정에서 벗어나 도쿄에서 신여성을 만나 새로운 삶을 일구고, 타향에서 아이들을 낳아 키워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 일제의 서슬 퍼런 차별과 모진 이국생활을 견뎌내야 했던 그 시절 가족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면, 시대를 정면으로 파고들었던 가문의 강인한 기개와 강단을 비로소 깊게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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