뙤약볕아래 빛났던 아들의 서프라이즈
엄마는 미처 몰랐다,
아들의 서프라이즈를
효율적인 엄마와 엉뚱한 아들의 동선
8박 9일간의 일본 여행도 이제 막바지, 8일 차 아침이 밝았다. 아들은 오늘 일정을 짤막하게 브리핑하며 "오늘은 편하게 동네 산바카라하고 공원 갔다가, 점심때쯤 잠시 숙소에 들어와서 쉬고 다시 나갈 거예요"라고 했다.
내 성향은 흔히 리더형이라 불리는 ENTJ다.
목표가 정해지면 비효율성을 극도로 싫어하는 기질이 있다.
반면 아들은 조용하고 사려 깊은 INFP다. 평소에는 합이 잘 맞았지만, 이번 제안만큼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행을 오면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 게 상식이지, 애써 나온 길에 중간에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니 비효율의 극치 같았다.
마음속으로 '왜 저러지?' 싶었지만 짐짓 알겠노라 답하고 남편의 눈치를 보니, 남편 역시 마땅찮은 표정이었지만 이내 아들의 뜻을 따라주려는 기색이었다.
우선 아침은 온라인카지노 카페 풍의 '코메다 커피 혼마치점'으로 향했다. 모닝세트에 달걀 샐러드와 토스트를 푸짐하게 시켜놓고,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사람, 의자에 기대 까무룩 졸고 있는 아주머니까지, 일본 노포 카페 특유의 여유롭고 평화로운 풍경이 참 부러웠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니 아침의 묘한 정적도 잠시 잊히는 듯했다.
카페를 나와 근처 '우쓰보 공원'으로 향했다. 넓은 정원에 5월 중순의 장미가 만개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흥미로운 건 이제 겨우 아점을 먹고 나온 우리와 달리, 현지 온라인 게임인들은 벌써 나무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병아리 떼 같은 유치원생들도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그 다정한 풍경이 좋아 보여 아들에게 "우리도 이런 데서 피크닉 하면 좋겠다" 하고 넌지시 흘렸다.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 "인근에 더 좋은 공원이 있으니 그리로 가요"라며 앞장섰다.
뙤약볕 아래 숨겨진 아들의 비밀 계획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들은 다른 공원으로 가기 전, 무조건 숙소에 먼저 들러야 한다며 택시를 잡자고 했다.
바로 공원으로 가면 될 것을, 굳이 택시비까지 써가며 숙소를 들렀다 가자는 고집에 내 심사는 결국 다시 언짢아지고 말았다.
하필 뙤약볕 아래서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았고, 내 표정이 굳어갈수록 아들의 마음도 급해졌는지 이리저리 허둥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아들은 "엄마, 아빠. 여기 에어컨 시원하게 켜놓고 잠깐만 쉬고 계세요. 나 금방 나갔다 올게요!" 하더니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문밖으로 서둘러 뛰쳐나갔다.
남편과 나는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며칠 내내 붙어 다녀 답답했으니 잠시 혼자 바람이라도 쐬고 오려나 보다' 생각했다.
시원한 방에서 살짝 낮잠이 들었다 깼을 무렵, 문이 열리며 아들이 들어왔다. 양손 가득 묵직한 비닐봉지를 든 아들은 뛰어온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제 공원으로 가요" 했다.
아들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1891년에 개장한 오사카 최초의 공영 공원, '나카노시마 공원'이었다.
도심 속 강줄기 사이에 떠 있는 긴 섬 모양의 이 공원은 과연 특색이 있었다.
마침 5월 중순을 맞아 310여 종, 4,000여 송이의 장미가 절정을 이루며 화려하게 피어 있었고, 그 뒤로 붉은 벽돌의 오사카시 중앙 공회당 등 백 년이 넘은 유럽풍 근대 건축물들이 고풍스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그늘 밑 벤치에 자리를 잡자, 아들이 가방에서 보물 보따리를 풀듯 점심거리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180년 전통의 명가 '요시노스시'에서 포장해 온 상자 초밥(하코스시), 세븐일레븐에서 공수해 온 타마고 샌드위치와 낫토 김밥,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아사히 캔맥주와 나를 위한 우롱차가 차려졌다.
"엄마, 아빠한테 장미꽃이 만발한 공원에서 멋진 서프라이즈 피크닉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점심시간 맞춰서 음식 사 오려고 잠깐 숙소에서 기다리시라고 한 거예요."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아, 아침부터 내 아들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
"엄마, 제발 좀 더 아들을 믿어주세요"
틀에 밥과 생선을 넣고 꾹 눌러 만들어 찰기와 감칠맛이 일품인 하코스시(상자초밥)는 도미, 장어, 새우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도시락 한 통에 5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지만, 그 돈 아까운 줄 모를 만큼 감동이 일렁이며 밀려왔다.
이번 여행 내내 지갑은 아빠 카드가 담당했는데, 이 특별한 점심만큼은 자기가 그동안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돈으로 사고 싶었다는 아들의 말에 더욱 목이 메일듯 했다.
스시를 입에 넣으며 참았던 미안함이 결국 터져 나왔다.
"아들, 네가 이런 멋진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줄도 모르고… 생뚱맞게 왜 숙소로 돌아가냐고 오해했는데 정말 미안하다."
내 솔직한 사과에 아들도 조심스럽게 속내를 꺼내놓았다.
"사실 아침에 엄마 표정 보고 서운했어요. 일주일 넘게 엄마, 아빠 가이드 하면서 최선을 다해 보호자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는데… 정작 엄마는 나를 온전히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서 서운했어요.
앞으로도 같이 여행하면서 '왜 저러지?' 싶을 때가 있어도, 그냥 저를 더 믿고 따라 주시면 안 돼요?"
가슴이 저릿하도록 미안했다. 서른이 훌쩍 넘은 다 자란 장남을, 내 기준의 효율성이라는 잣대에 가두고 여전히 못미더워했던 나의 조급함이 부끄러웠다.
옆에 있던 남편도 아들의 손을 잡으며 "우리 아들이 이렇게 속 깊고 세심하게 배려하는데, 그걸 끝까지 믿어주지 못해 아빠도 정말 미안하다"며 덧붙였다.
그렇게 오해는 금새 화해로 바뀌었고, 나카노시마 공원의 장미는 아까 본 우쓰보 공원의 꽃보다 훨씬 더 눈부시고 화려하게 다가왔다.
강바람을 맞으며 사람 구경을 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그 시간이,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장 밀도 높은 행복이자 진정한 여유처럼 여겨졌다.
다정하게 저물어간 8박 9일의 여정
이튿날, 여행의 마지막 날은 소박하고 정겨웠다. 아들이 눈독 들여놓았던 강아지 인형을 사기 위해 지하상가로 향했고, 덕분에 나도 편안한 베이지색 바지 하나를 건졌다. 아들은 품에 소중히 강아지 인형을 안고 웃었다.
간사이 공항을 거쳐 김포로, 그리고 다시 아들이 사는 아산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컴컴한 저녁이었다.
귀가길 여정에 지친 우리가 샤워를 하는 동안, 아들은 피곤할 법도 한데 서둘러 창문을 열어 집안을 환기시켰다.
그러고는 냉동실에 얼려둔 김치갈비찜을 꺼내 찬물에 녹이고, 라면 두 개를 보글보글 끓여 햇반과 함께 저녁상을 뚝딱 차려냈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편안하게 먹는 집밥만 한 보약이 없다는 듯, 셋이서 맥주로 건배를 했다.
이틀 전 기차역 화장실에서의 아찔했던 기억으로 시작해 이국적인 이진칸의 언덕, 고베항의 붉은 노을, 그리고 마침내 아들의 진심과 마주했던 전날 나카노시마 공원의 장미 피크닉까지.
서툴고 무지했던 부모를 넓은 품으로 안아주고 이끌어준 아들 덕분에, 우리의 8박 9일 일본 여행은 마르지 않을 샘물처럼 마음속에 깊이 저장되었다. 고맙다, 아들아.
역사와 미식,
그리고 푸른 쉼표가 함께했던
오사카의 시간은
하루에 수천 송이 장미를 본 기억과
아들의 사랑으로
오래도록
다정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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