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가이드와 함께한 고베 당일치기
고베 당일치기 여행날.
전날 빵순이 본능으로 사두었던 빵을 잔뜩 꺼내 아침을 먹고 기차에 올랐다.
그런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고베역에 내리자마자 화장실로 직행.
긴 줄 앞에서 안절부절 기다렸다가 겨우 해결했지만 왠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걷다 다시 급한 상황.
아들은 재빨리 가까운 지하철역 화장실로 안내했고, 길가 약국에서 지사제까지 구해주었다.
이쿠타 신사에 도착했을 때는 기운이 쏙 빠져 정자에 드러누웠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그날은 정말 힘이 없었다.
예민한 아들은 공공장소에서 그러는 내 모습이 못내 불편했는지
언짢은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포카리 스웨트를 사 들고 왔다.
"엄마, 이온음료 마셔. 화장실도 근처에 알아놨어."
눈을 감고 듣는데 괜히 울컥했다.
속 깊은 장남.
여행 중 내 가장 큰 변수는 늘 화장실 문제다.
대장암 수술 후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끔 장이 제멋대로다.
그래서 어딜 가든 화장실 위치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한참 쉬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신사 연못가에서는 젊은 커플들이 물에 적셔 읽는 점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도 며칠 전 금각사에서 재미 삼아 해봤는데 운세가 꽤 좋게 나왔었다.
젊은 날엔 마음 가는 대로 살면 될 것 같지만,
그래도 미래가 궁금한 마음은 나이와 상관없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희생당한 동식물,어류에 대한 감사함으로 사용하던 칼을 묻은 곳이라 한다.
기운을 차린 뒤 아들이 점찍어 둔 빵집에 들렀다.
고베는 빵으로도 유명한 도시다.
모토마치 상점가와 난킨마치를 걷는데 뽑기 가게와 게임센터가 유난히 많았다.
아이들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열심히 뽑기에 도전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람은 누구나 작은 설렘과 짜릿함을 찾으며 사는 것 아닐까.
아들도 신이 나 자동차 뽑기에 도전했다.
유럽이나 동유럽을 여행해도 이토록 자잘한 소품 문화가 발달한 곳은 드물다.
일본인 특유의 섬세한 결이 삶의 무료함이나 공허함을
이런 아기자기한 즐거움으로 채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은 아들이 기대하던 히레 비프카츠.
부드러운 고베 소고기 안심을 바삭하게 튀겨낸 고베의 명물이다.
나는 속이 편한 오므라이스를,
남편은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주문해 서로 나눠 먹었다.
함박스테이크가 최고의 외식이던 시절.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비를 털어 경양식을 사주던 남편의 젊은 얼굴도 문득 떠올랐다.
베이비부머 세대인 우리에게 함박스테이크는
학창 시절 가장 폼 나게 먹던 최고의 외식 메뉴였다.
사실 나는 예습 없는 여행을 좋아한다.
미리 다 알고 가기보다 처음 마주하는 순간의 감동을 즐기는 편이다.
이번 여행은 특히 아들이 총괄 기획자라 더 그랬다.
고베 하면 떠오르는 건 대지진뿐이었는데, 아들은 행선지를 끝까지 비밀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이진칸 거리였다.
개항 이후 고베에 정착한 서양인들이 살던 저택들이 언덕 위에 남아 있는 곳이다.
택시를 타고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높은 오르막을 한참 올라가니 화려한 목조 2층 구조의 저택들이 드러났다.
유럽 고성 같은 외벽의 천연석 슬레이트가 마치 물고기 비늘을 닮아 이름이 붙은 '비늘의 집'에서는 고풍스러운 가구와 도자기를 구경했고, 고베 시내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풍경도 감상했다.
'풍향계의 집'과 미국 총영사관 저택이었다는 연둣빛 외벽의 서양식 저택들도 저마다 아름다웠다.
우리나라의 적산가옥처럼 역사의 흔적을 품고 있는 공간을 세련된 관광 자원으로 되살려 놓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기념으로 남편과 내 머그컵 하나씩을 골라 가방에 담았다.
비록 남의 나라에 왔지만 이렇게 전망좋은 곳에서 아름다운 저택을 짓고 살았던 그 시절의 외국인들과 가족들은 행복했으리라 짐작해봤다.
언덕길을 천천히 내려와 오래된 명물 카페인 니시무라 커피점에 들렀다.
묵직한 향의 커피와 클래식한 실내 분위기.
나무로 된 두꺼운 메뉴판과 함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정장 차림으로 서빙하는 직원들의 품격 때문이었을까.
커피 한 잔의 맛마저 조금 더 깊게 느껴졌다.
1948년부터 이어져 온 시간의 깊이가 공간 곳곳에 스며 있었다.
일본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카페를 꼽으라면 아마 이곳일 것이다.
고베 여행의 두 번째 하이라이트였다.
흡족한 휴식을 취한 뒤 연두색의 클래식한 시티루프 버스를 탔다.
언덕이 많은 고베 지형을 효율적으로 순환하는 관광버스인데, 차내에 옛날식 차장까지 있어 어린 시절의 복고풍 향수를 자극했다.
버스가 내려준 곳은 고베의 명품 수변 공원인 메리켄 파크였다.
원래 '어메리칸'이라는 발음이 굳어져 붙은 이름이란다.
입구의 커다란 생선 조각상 앞에서 남편은 신이 나 사진을 찍었고, 내 눈에는 흰 돛과 그물을 형상화한 독특한 모양의 해양박물관 지붕이 먼저 들어왔다.
고베의 필수 인증샷이라는 하얀 'BE KOBE' 조형물도 사진에 담았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들과 벤치에 앉아 배낭 속에 넣어둔 짭짤한 명란빵을 나누어 먹었다.
차츰 저물어가는 하루를 온전히 만끽하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쯤 '철탑의 마녀'라는 별명을 가진 고베의 랜드마크, 붉은 포트타워가 저녁노을을 받아 더욱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연이어 하나둘 불을 밝히는 고베항의 아름다운 야경을 뒤로하고 서둘러 오사카로 돌아왔다.
아들은 저녁만큼은 아직 안 가본 곳을 경험해야 한다며 숙소 근처의 활기찬 *이자카야로 우리를 이끌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퇴근길 온라인 게임인들의 왁자지껄한 사람 소리로 야단법석이었다.
남편이 꼭 한번 와보고 싶어 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아들은 맥주와 하이볼, 그리고 나를 위해 따뜻한 우롱차를 주문했다.
불향 가득하게 구워낸 일본식 닭꼬치 야키토리와 각종 안주의 달콤 짭조름한 현지의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조금씩 맛을 보았고,
아들이 여전히 내 속을 걱정하며 시켜 준 돌솥밥도 먹고,
간사이식 오뎅탕 국물도 떠먹었다.
아침엔 화장실 걱정으로 시작한 하루였다.
여행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나는 또 한 번 아들의 따뜻한 마음을 만났고,
감미로운 커피 향과 고베항의 붉은 노을,
그리고 왁자지껄한 이자카야의 온기를 만났다.
지진의 기억 너머,
품격 있는 이국의 풍경을 품은 도시 고베.
그렇게 고베항의 푸른 추억과 함께
또 하루의 여행이 다정하게 저물어 갔다.
이 여행기는 지난 달 5월 12일에서 20일 사이의 일본 여행기입니다
*이자까야~이자카야(居酒屋)는 술과 함께 다양한 안주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일본식 대중 선술집을 뜻한다.
대표적인 인기 메뉴는 닭의 다양한 부위를 꼬치에 꽂아 숯불에 구워낸 야키토리나 바삭하게 튀겨낸 일본식 닭튀김외에도 제철 생선을 신선하게 썰어내어 사케와 잘 어울리는 사시미나 국물요리등을 니미 비루 생맥주나 하이볼과 함께 마시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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