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시간 안에 스며든 무늬
가끔 북한산을 오르다 보면 문득 걸음을 멈추게 하는 모습이 있다. 밑동만 남은 채 세월을 뒤집어쓴 나무. 한때는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었을 생의 중심이 이제는 싹둑 잘린 모습으로 쓰러져 있다. 그러나 그 단면은 살아낸 시간의 기록이다. 그리고 둥글게 겹겹이 쌓인 나이테 모습이 보인다. 그 고요한 무늬는 말없이 시간을 말한다. 한 해 한 해를 견디며 덧입혀진 삶의 시간이고 안으로 스며든 시간이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나이테는 고르게 이어지지 않는다. 어떤 해는 넓고 어떤 해는 유난히 좁다. 비바람이 거셌던 계절, 또 햇볕이 충분하지 않았던 날들의 흔적이 그 안에 남아 있다. 곧고 반듯하게 자란 부분보다 비틀리고 뒤틀린 결이 더 많은 것은, 삶은 본래 반듯한 직선이 아니고 흔들림 속에서 겨우 균형을 잡는 곡선이기 때문이다.
손바닥으로 그 단면을 가만히 쓸어보면 차가울 것만 같은 나무살 속에서 묘한 온기가 전해진다. 이미 잘려 나간 생임에도, 그 안에는 아직 식지 않은 시간이 머물러 있다. 마치 오래전 누군가의 체온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기억의 온도와도 같다. 흔히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식어버린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시간은 식지 않는다.
그 나무가 베어지던 날, 공중으로 흩어졌을 톱밥 가루들조차도 어쩌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입자로 다시 땅에 내려앉아, 또 다른 생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삶 또한 그렇다. 흘려보낸 날들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의 부스러기들이 어딘가에 쌓여 내면을 이루고 있다. 때로는 후회가 되고 때로는 그리움으로,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온기로 남는다.
그 곁에는 이제 막 뿌리를 내린 어린 나무들이 있다. 연둣빛의 여린 줄기는 금세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롭지만, 그 아래에는 이미 오랜 시간이 응축된 땅이 받치고 있다. 새로 움튼 생명은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시간과 희생이 그 뿌리를 지탱하고 있다.
그 풍경 앞에 서면 한 사람이 떠오른다. 늘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부엌의 불을 밝히던 한 사람. 종갓집의 긴 시간과 수많은 종가 행사와 노동을 온몸으로 감당해 내던 나의 엄마. 엄마의 하루는 언제나 자신보다 먼저 타인을 향해 있었다. 수많은 종가 행사를 하고 사람을 맞이하고, 집안을 돌보는 일상은 끝이 없었고, 그 속에서 단 한 번도 엄마의 개인 시간은 없었다. 엄마의 시간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안으로만 쌓였을 그 시간.
누군가는 그것이 희생이었다고. 그러나 그 희생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 엄마는 종갓집 안살림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누군가의 그늘이 되었고 바람을 막아주고, 때로는 누군가의 삶을 살피는 삶을 살아내셨다.
이제야 알게 된다. 사람에게도 나이테가 있다는 것을.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겹겹이 쌓인 시간의 결이다. 삶은 사랑하고 기다리고 견뎌낸 순간들이 하나의 원을 이루며 내면을 채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시간을 통해 누군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엄마의 삶은 떠올릴 때마다 넓고 깊은 무언가를 마주하게 된다. 그 안에는 햇빛도 있고 그늘도 있고, 바람과 비와 눈이 모두 함께 존재하는 삶. 북한산에서 만난 그 나무의 밑동처럼.
인간은 언젠가는 멈춰 서게 되는 때가 온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저마다의 살아낸 시간의 무늬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흔적을 통해 또다시 삶을 이야기할 것이다.
엄마는 이제 세상에 안 계시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삶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쌓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쌓임이 누군가를 지탱하는 숲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엄마는 엄마의 나이테를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충분히 살아냈기 때문에,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산길에서 마주한 나무의 단면과 엄마의 일생은 한 생의 철학이며, 한 이름의 증언이다. 그리고 그 나이테의 온도는 지금도 조용히 내 삶을 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