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이야기

묘비명은 죽음을 위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며 나에게 던지는 문장

by현월안



작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문득 묘비명 이야기를 꺼냈다. 죽음을 맞이하고 나의 이야기를 한 줄로 표현하는 문장. 누군가는 오래도록 품어온 문장을 꺼내놓았고, 또 다른 이는 농담처럼 웃으며 자신의 마지막 한 줄을 읊었다.



"나는 자유를 품다가 간다."

"여기, 물에 이름을 새긴 자가 잠들다."

"애만 쓰다가 잠들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 근처에 오래 얼쩡거리다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등등.



다들 짧은 한 줄인데도 그 사람의 기질과 성격과 위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서 마지막까지 한 문장으로 자신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동안에 소설과 시와 산문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마지막을 짧은 한 줄로 자기 생을 요약하려 하는 생각까지 충분히 보였다.



그날 새삼 알게 되었다. 묘비명은 죽음을 위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며 나에게 던지는 문장이라는 것을.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나 대부분 마지막은 멀리 있고 아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겐 묘비명을 사용할 일은 없겠지만 내 맘에 간직해 두고 나에게 던지는 평생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나 자신에게 묻는 말.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이력을 길게 늘어놓는다. 무엇을 했고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말한다. 하지만 죽음은 놀랍도록 공평하다. 아무리 긴 문장의 생애도 마지막은 그리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애는 그것으로 마감이 되지만, 또 누군가 특별한 사람의 온기는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는 사실.



문득 오래전 읽었던 기사가 떠오른다. 911 테러. 세상을 충격에 빠뜨린 테러가 일어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절망 속에 빠졌다. 그 현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예배당인 세인트 폴 예배당에는 오래된 묘비들이 남아 있다고. 그 가운데 어느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들은 안녕하다." 얼마나 담담한가. 죽음을 비극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시선. 남겨진 사람들에게 슬픔보다 평안을 건네는 문장이고

그 한 줄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또 위로일 수 있으니까.



좋은 묘비명은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

아마도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닐까. 잘 살아낸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의 어깨를 조금 가볍게 한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한 사람, 떠난 뒤에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 어쩌면 그것이 아름다운 생의 완성인지도 모른다.



가끔 나의 묘비명을 상상해 본다. 요즘은 화장 문화가 일반화되면서 묘비를 세우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고. 언젠가는 묘비라는 문화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실제 비석에 새겨지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한 줄을 품고 살아간다.



거창한 문장은 아니더라도 그냥 편안함 들어 있는 문장. 어쩌면 사람의 진짜 묘비명은 죽은 뒤에 새겨지는 것이 아닌 오늘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가 하루하루 마음에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뱉는 말,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시선,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사랑이 이미 묘비명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ㅂ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성실하게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쓰다 보면, 생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굳이 긴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단 한 줄이면 충분하다.

'이제 안녕하다'라고.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