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정쩡한 계절의 중간에서

보름달을 만나다

by김광희

언제쯤 이 여름이 갈까. 그녀는 벌판 위에서 아직도 이글거리고 있을 늦여름의 태양을 생각했다. 시들어가는 풀들 위로 내리쬐는 뜨겁고 건조한 햇볕과 혜완의 집 앞 로터리에서 붉은 혀 같은 꽃잎을 늘어뜨리고 시들어 가는 칸나….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이 어정쩡한 계절의 중간에 내가 서있다.


공지영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에서



추석 연휴 내내 먹고 뒹굴었더니, 추석날 밤 끝내 보이지 않던 보름달이 내 배에 덜컥 자리를 잡았다. 이번 명절에 더 두툼하게 뱃살이 붙은 건 다 이유가 있다. 손만 대면 요리를 망치는 나를 위해 추석 전날 두 여동생이 구원투수로 나섰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 집 냉장고는 명절 요리로 가득 채워졌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잡채에 들기름 듬뿍 들어간 나물, 고소한 전, 달콤하고 짭조름한 갈비찜까지. 연휴 내내 배불리 먹었건만 냉장고는 여전히 풍성하다.


동생들의 부지런한 손맛에 버무려진 맛있는 음식 탓에 내 뱃속으로 들어온 보름달은 당분간 기울지 않을 것 같다. 숨을 쉴 때마다 밀물과 썰물처럼 출렁이는 뱃살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집을 나섰다.


퇴직한 이후로 나는 외출하더라도 해가 지기 전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저녁 먹자!’라고 부르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늘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랬던 내가 해가 진 뒤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 같은 뱃살을 줄이려고 망설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발을 내 민 것이다.


매일 오가던 익숙한 길이 낯설게 다가왔다. 나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후덥지근했던 여름날 나를 홀렸던 더운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안겼다. 거리 곳곳에 가로등이 환하게 불을 밝히는 시간인데도 여전히 후끈했다. 나는 요즘 동네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신대천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신대천 산바카라로에는 나처럼 둥근 배를 앞으로 내밀고 걷는 이들이 많았다. 슬그머니 그들 틈에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숨소리와 발걸음으로 밤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잔디에 자국을 남기며 내딛는 발걸음마다 마치 작은북, 큰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다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달콤하고 기름진 음식을 탑처럼 쌓아두고 곶감처럼 빼먹었나 보다. 행복하게 먹고 마신 후유증을 이겨보려는 표정들이 비장하기까지 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는 사람도 보였다. 그걸 시샘하듯 내 등줄기에서도 따뜻한 땀이 흘러내렸다.


물가를 밝히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모여드는 날벌레들 소리가 요란했다. 그 소리에 맞춰 아이들 웃음소리도 들렸다. 칠부바지를 입은 사람들 사이로 연두색 짧은 반바지를 입은 나도 자연스럽게 그 풍경 속으로 스며들었다. 낯설고 서먹했던 밤길이 비로소 내가 평상시 걸었던 대낮 거리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9월 말인데도 늦여름의 습한 기운이 자꾸 몸에 들러붙었다. 땀방울과 섞여 끈적이는 그 기운이 출렁이는 뱃살을 조금씩 거두어가길 바랐다. 추석 연휴가 끝난 여름과 가을 사이. 어정쩡한 계절의 중간에 멈춰 선 시간이 나를 밤길로 자꾸만 이끌었다. 집을 나설 때 무거웠던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잔디 위에 찍히던 내 운동화 자국도 한결 연해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걷는 한 가족 뒤를 따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나만 배 속에 보름달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서. 저들과 함께 즐겁게 걸으며, 내 안에 들어앉은 달을 조금씩 깎아 내보리라.’


나는 낯선 밤의 거리를 소란스럽지 않게 조용히 걸었다. 어둠이 점점 깊어지고 가로등 불빛에서 내가 멀어지자 보이지 않던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제법 큼직한 별 하나가 내 뒤통수를 비추며 조용히 따라왔다. 밤하늘에 웅크리고 있던 서늘하고 완연한 가을도 데리고 오나 싶어 나는 반갑게 양팔을 벌려 환영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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