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데리고 그들 곁으로

귀향

by김광희

날이 더워 에어컨 근처를 떠나지 않고 있던 지난 8월 어느 날. 친구가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진행하는 답사에 나를 초대했다. 작년 봄 동기 모임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을 뿐 큰 관심은 없었지만,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답사 일행은 대부분 국립 순천대학교 박물관 대학에서 수업을 듣는 학우들이었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다 정년퇴직 후 역사와 문화를 깊이 알고자 열정을 쏟고 있는 분들이었다. 나는 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답사버스에 올랐다. 그들은 친구와 인사를 나누며 오늘 일정에 대한 해박한 정보를 나누었다. 나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대화를 엿들었다. 소곤거리는 그들 목소리에 내 귀가 점점 토끼 귀처럼 길어졌다.


오래전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배웠던 백제 이야기였다. 이번 답사의 중심인 충남 역사박물관과 제25대 '무령왕'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1971년 공주 송산리 제6호 분의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드러난 무령왕릉. 무덤 안 묘지석을 통해 왕과 왕비가 함께 잠들어 있음이 밝혀진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무거운 눈꺼풀이 유혹하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공주 국립박물관에 도착해서야 눈이 떠졌다. 간밤에 잠을 설친 것도 아닌데 고개를 얼마나 흔들었는지 목이 뻐근했다. 입가에 말라붙은 침을 닦으며 어색한 미소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그곳에서는 타국을 떠돌다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온 국보들의 전시가 '귀향'이라는 이름으로 진행 중이었다.


근현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강압이나 약탈, 생계 등의 이유로 고향을 떠난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이 타국을 헤맨 끝에 돌아와 우리 앞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뿌리째 흔들려 조각이 된 문화재들까지도 많은 사람의 간절한 집념과 땀방울로 완벽한 귀향을 이뤄냈다. 여러 이유로 원본 반환이 어려운 몇 가지는 최첨단 기술로 복원되어 본연의 아늑한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쉽게도 '환수' 되지 못하고 여전히 타국을 떠돌고 있는 유물들의 '귀향'을 위한 작업도 꾸준히 진행 중이었다.


내가 찍은 내 발자국 데리고 고요도 데리고 더 깊은 곳에 깃든 내 집 찾아가고 싶다.


도종환 『고요로 가야겠다』 중에서


전 세계 구석진 곳에 숨겨져 있다 돌아온 국보들을 소개하던 학예사님의 떨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차분히 설명을 이어가면서도 밀려오는 감동에 자꾸만 목이 멘다던 그 마음은, 아마도 상처 입은 채 오랜 세월을 홀로 견뎌낸 존재에 대한 연민이자 반가움이었으리라.


나는 도민들의 환수 염원을 담아 재현되었다는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바라보다 영화 <귀향> 속 소녀들이 떠올랐다. 온화한 눈빛의 불상이 그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아서였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시절 고향에서 뛰놀다 타향으로 끌려가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가혹한 일을 당한 열넷 다섯 소녀들의 아픔을 보여준다. 그들은 짐승 취급을 받으면서도 오직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나 멀고도 험했다. 수많은 소녀가 짓밟힌 채 차디찬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했고, 겨우 살아남은 이들조차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평생을 이방인으로 고통받으며 떠돌아야 했다.


문화재가 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적법한 절차를 지키면서 치열한 노력을 쏟은 수많은 사람의 눈물과 집념이 필요했다. 그리고 잡혀간 어린 소녀들이 영혼으로나마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도 거칠고 험한 바다를 건너야 했다. 영화 속 그들이 만난 파도와 바람을 보는 동안 내내 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


거칠고 험한 바다에서 부하들을 모두 잃고 고향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도 있다. 바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 속 지략가 오디세우스다. 그가 십 년 동안의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 이타카로 향하며 만난 사나운 바다, 괴물들. 그리고 신들의 분노. 그의 '귀향'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다. 안락한 유혹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그를 견디게 한 힘은 오직 하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집념이었다.


그날 공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귀향'이라는 단어에 푹 빠졌다. 공주로 갈 때와 다르게 내 눈도 말똥말똥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영화 <귀향>과 극장 대형관에서 입을 벌리고 봤던 영화 <오디세이>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귀향'에 대한 생각들을 들려줬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과 생각들을 글로 쓰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정돈하려 애써도 어수선한 글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어정쩡한 계절의 시간이 지나도록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문장 속을 헤맸다.


어느덧 시월 연휴가 지나고 밤바람이 제법 선선해졌다. 날씨 탓인지 공주 박물관의 어스름한 조명 아래 정갈하게 놓여있던 유물들이 다시 떠올랐다. 오디세우스가 고난을 헤치고 이타카로 돌아왔듯, 영화 <귀향>에서도 생을 마친 소녀들의 영혼이 희망의 색 초록 나비가 되어 고향의 품으로 날아왔다. 떠돌던 우리 문화재 역시 제자리를 찾았다.


'귀향'은 어쩌면 길을 잃고 헤매던 모든 존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내 뿌리와 그리움을 되찾는 치열한 투쟁일 것이다. 그렇게 힘든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제자리로 온 모든 것에 부디 잔잔한 평화만 있기를 바란다.


비를 몰고 올 거라는 바람이 창문을 때리는 밤. 평화를 비는 내 손끝으로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 문장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그들이 내게 준 선물이라 생각하고 차분하게 써 내려갔다. 드디어 완성된 한 편의 글과 함께 고요를 데리고 제자리로 돌아간 그들 곁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떼어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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