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차게 걷노라니

너와 함께 그곳에 도착했다

by김광희

경주 양남 주상절리 전망대를 지나 파도 소리 길로 들어섰다. 바다를 따라 나무 덱을 걸으니, 길 이름처럼 파도 소리가 귀를 때렸다. 같이 걷던 친구 셋이 뒤로 처졌다. 나는 숨을 고르면서 친구들을 기다렸다. 일본으로 접근한 7, 8호 태풍 탓인지 잔뜩 흐린 하늘이 짜증을 드러냈다. 덕분에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무거웠다. 나는 바람에 들썩이는 모자를 벗어 머리카락을 정리한 후 다시 썼다. 그사이 거의 달리듯이 내 곁으로 온 친구 한 명이 소리쳤다.

“좀 천천히 가.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빨리 가?”

친구의 목소리가 헐떡이는 숨소리에 묻혔다. 걸음을 멈추고 손을 옆구리에 올린 친구는 눈을 흘기며 내 손을 잡았다. 습기와 땀이 섞여 눅눅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을 꽉 쥐었다. 내 왼손이 친구 오른손에 잡혔다. 힘껏 나를 끌어당기며 친구가 중얼거렸다. ‘가시내! 걸음은 여전히 전사여!’


내 빠른 걸음의 시작은 성격 급한 친정아버지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심부름시킬 일이 생기면 딸 넷 이름을 순서대로 불렀다. 그 이름이 다 불리기 전 누군가 한 명은 아버지 앞에 도착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 넷은 어려서부터 친구들보다 걸음이 빨랐다. 아버지를 닮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걷는 나 또한 성격이 급하다. 준비도 안 된 왼발을 무시하고 오른발은 벌써 문밖에서 엘리베이터를 누른다. 그럴 때면 발이 엇갈려 휘청거리거나 넘어져 다치는데도 나는 여전히 서두른다. 심지어는 젊은 날. 데이트하면서도 손을 잡지 않으면 내가 앞, 남자는 뒤. 그래서 이별 통보를 자주 받았을까? 변명 같지만 그랬을 거라 생각해야 헤어진 뒤의 황당하고 서러웠던 것들이 조금은 누그러든다. 나는 어른이 된 뒤에도 어려서부터 익힌 대로 빠르게 걸었다. 다만, 걸음도 나잇값을 하느라 지금은 속도가 예전만 못하다. 친구들은 아니라고 고개를 젓겠지만.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뜨거운 용암이 빠르게 식으면서 만들어졌다는 주상절리. 보통은 우뚝 선 모양이지만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에는 수직과 수평이 섞여 있다. 2012년 군부대 이전으로 일반인에게도 공개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파도, 바람, 바위, 시간이 빗어냈다는 보물. 바다에서 오랜 세월 닳고 닳았지만 여전히 신비롭고 웅장한 모습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위로 옆으로 다듬고 가꿨을 텐데. 그 든든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이 앞만 보고 걷던 빠른 내 걸음을 붙잡았다.


흐린 날과 상관없이 동해는 푸르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를 바라봤다.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해안선이 보였다. 거기를 따라 배도 지나갔다. 밀려오는 파도와 바다 위로 솟은 암석들이 부딪치면서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그래도 내가 서있는 곳은 평온했다. 그 순간을 즐기고자 나는 친구 손을 놓고 눈을 감았다. 우르르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들. 부채처럼 펼쳐져 있는 주상절리. 바람과 파도가 나를 스치며 지나갔다. 입술이 실룩거렸다. 이게 행복이지. 나는 양팔을 벌려 습한 공기를 가슴이 터질 때까지 깊게 들이마셨다. 지금까지 살아내느라 바빴던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느긋하게 휘파람 불듯이 숨을 뱉었다. 돌아보니 아버지 호통이 무서워 시작했을 빠른 걸음이 내가 힘들 때마다 나를 받쳐주는 힘이 되었다. 나와 같이 가쁜 숨을 뱉어내며 걸어준 친구들이 튼실한 근육을 만들어줬다. 걸음걸음마다 더 열심히 신나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주문도 새겨줬다. 가끔 엉키기는 했지만, 양팔과 다리를 야무지게 흔들며 지금까지 살도록 영양분을 뿌려준 친구들. 그들이 있어 오늘도 나는 힘차게 걷는 중이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내가 애써 찾아낸 이유들은 사라지고 다른 이유는 이미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 충분히 젊고 새 출발 하기에 충분한 힘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을 다시 시작해야 하나? 나는 마당과 마당 사이로 난 그 흰 길 속에서 고독하다. 고독과 자유. 그러나 자유는 어딘지 죽음과 비슷하다. 그러나 나는 도시로 내려가는 군대처럼 행진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장폴 사르트르

『구토』중에서



파도 소리를 음악 삼아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친구들이 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드디어 넷이 되었다. ‘너는 도대체 언제쯤 천천히 걸을래’라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른 바다처럼 환한 미소를 띠며 땀이 차 끈적한 손을 허리에 받쳤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구름이 뭉쳐있는 하늘을 봤다. 친구들이 나를 따라 했다. 여자 네 명이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20대를 거쳐 50대에 다시 만난 우리가 이제는 60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만나기만 하면 서로 여기저기 아픈 곳을 늘어놓는다. 그래도 만나서 웃고 떠드는 시간이 반갑고 즐거운 것은 젊은 시절을 함께 했기 때문이리라. 그런 시간들이 모여 우리를 한마디 하면 열 마디가 통하는 사이로 만들었다. 머리가 희끗해진 여자 넷이 하늘과 바다를 베개 삼아 느긋하게 그곳에서 머물렀다.


친구들은 나에게 다음 만남에는 힘차게를 빼고 걸어라는 주문을 했다. 그 말에 네 여자가 한꺼번에 쏟아낸 웃음이 부채꼴 주상절리에 부딪쳐 푸른 파도의 하얀 포말이 되어 동해를 덮어 버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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