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람

그들이 있어 숨을 쉰다

by김광희


올해 들어 내가 사는 아파트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아파트 시설도 그런가 보다. 지하 주차장 에폭시 공사를 시작으로 입구 차단기, 공동 현관문 자동 열림까지.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시간이었다. 이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나니 이곳을 감싸고도는 공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덕분에 밖이 조용하다. 놀이터를 뛰던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있을 시간이라 더 고요한 것 같다. 점심시간이나 돼야 어린이집 문이 열리면서 물 분수대로 뛰어올 건데. 아쉬운 마음을 거두고 거실 창문을 닫았다. 내 숨소리만 들릴 집안에 라디오 소리를 덧붙이러 부엌으로 갔다.


주방용 디지털 TV 폰을 켰다. 라디오를 선택했다.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는 가정음악 대신 찌지직 소리가 들렸다. 다른 음악프로를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메뉴를 눌러 이리저리 살피다 자동 검색을 눌렀다. 검색 대상이 제로란다. 나만 있던 공간으로 길 잃은 주파수들이 날아들었다. 어제까지는 정규방송을 보고 들었는데. 이것까지도 이곳으로 온 지 10년을 넘었더니 힘들다고 나에게 하소연하는 걸까?


요즘 수납장 문과 손잡이, 방 문턱, 바닥 몰딩까지. 여기저기서 이젠 낡았으니 새 옷을 입혀달라고 떼를 쓰며 나를 잡아끌고 있다. 나 원 참. 나는 여전히 여전사처럼 팔다리를 힘차게 휘저으며 걷는 60 중반인데. 겨우 10년 지난 것들이. 쯧쯧.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귀에 익숙하지 않은 소리를 뱉어내는 라디오를 심란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팔목이 흔들렸다. 가까이 지내는 나보다 어린 지인의 전화를 알리는 스마트 워치 진동음이었다. 나는 요란한 라디오를 끄고 식탁 위에서 곤하게 잠든 핸드폰에 손을 뻗쳤다. 그때 관리실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단지 내 장송을 소독할 예정이니 모든 창문은 닫으란다. 특히 낮은 층 가구는 오전 중 현관문도 열지 말라는 말에 27층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잠깐 동안 소음에 시달린 탓인지 단정한 기계음 여성 목소리가 아나운서 같았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지인의 목소리는 높은 도였다. 영상통화가 아니라도 표정이 보였다. 들뜬 그녀가 지난 5월 중순 자신의 결혼식을 쑥스러워 이제야 알린다고 했다. 나와 같은 한 부모였던 그녀가 축하객 150명과 함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펜션에서 1박 2일을 즐겼다고 한다. 전화기 넘어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면서 코에 잔뜩 바람을 넣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가슴 한쪽이 멍해져 입으로만 축하를 건넸다. 그동안 같은 처지라고 동지애로 속내를 나눴는데. 노년기를 같이 잘 보내자고도 했는데. 그런 그녀가 나만 두고 한 집에서 함께 할 사람 곁으로 가버리다니.


하퍼 리 작가의 『앵무새 죽이기』마지막 페이지가 문득 떠올랐다. 아빠 애티커스 핀치가 딸 스카웃에게 말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멋지단다.'라고. 그동안 나는 앞만 바라보고 가느라 그런 사람들을 살피지 못했던 걸까? 그녀와 주거니 받거니 통화하는 동안 가슴 밑바닥에서 부러움이 기지개를 켰다. 그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려 했다. 나는 그런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평소보다 더 밝고 신나게 말했다. 한참을 떠들다 전화를 끊고 나니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복받쳤다. 이럴 땐 창문을 확 열어 바람이라도 맞아야 하는데. 하필이면 소독일이라니. 벌레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나무까지도 나를 긁었다.


사람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모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모두가 각자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속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레프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나무에 소독약을 다 뿌렸는지 기계음 소리가 멈췄다. 그동안 잊었던 질투가 솟았다. 나는 감정을 추스르려 창문에 코를 박고 아파트 광장을 내려다봤다. 아이들이 모이려면 아직 멀었는데 내 귀를 때려줄 그들의 목소리가 벌써 기다려졌다. 퇴직 전 싱싱한 활어처럼 웃고 떠들며 내 품으로 뛰어들어 쓸쓸할 시간조차 뺏어가던 아이들도 보고 싶다.


관리실로 전화를 걸었다. 음 이탈한 라디오로 내가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지인 결혼 소식이 아니라 찌지직거리는 라디오 탓인 것처럼 나를 포장했다. 오늘은 일정이 꽉 차서 내일 오전 중으로 기사님이 방문할 거라는 관리실 직원 대답에 포장지가 찢겼다. 혼자보다는 둘이면 좋겠지만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나를 싸맸던 날들이 터져 나왔다. 나는 행여 누가 볼세라 거실 바닥으로 흩어지는 고독을 호주머니 속으로 얼른 거둬들였다. 헐거웠던 바지 주머니가 축 처졌다. 두둑해진 호주머니를 손에 쥔 채 오전 중에는 닫혀있어야 할 창문은 집에 두고 현관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나에게 인류의 오래된 질문이라는 '사랑은 또 오는가'를 물었다.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이 그리운 지금 힘차게를 빼고 천천히 그대들을 찾아가 보리라.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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